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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6/22 01:59:33
Name
눈시BB
File #1
만주_지도.JPG (21.0 KB) , Download : 80
Subject
[일반] 남한산성 - 1. 누르하치의 등장
여진 지도는 대~충 대~충 한 거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만주 지도 찾으려고 검색하니까 뜨는 건 다 만주는 우리땅이다 이런 거 -_-;
bgm이 너무 정신 사나워서 유명한 걸로 교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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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가 그를 감당할 수 없다"
어디서 시작됐는지 몰라도 옛부터 내려오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이나 고려나 그 힘을 제대로 느꼈고, 원이 멸망 후 명과 조선으로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을 때도 그 경계는 풀리지 않았죠. 만주에 광활하게 흩어져 있는 여진족에 대한 방침은 중국 역사에서 쉽게 발견되는 "이이제이"였습니다. 명은 우선 산해관부터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에 요동도사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이 지역에 여진족이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쪽은 노아간도사를 두고 그 아래 위소라는 행정기구를 두어 여진족의 우두머리들을 임명했죠. 이 범위 내에서 자치를 허용하되 사이에 분쟁이 있을 경우 명이 직접 개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어느 한 쪽이 커질 것 같으면 다른 쪽들을 동원해서 토벌하는 식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생필품이 극히 부족했고, 중국과 조선에게 특산물을 바치고 곡물 등 생필품을 받아 갔습니다.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흔들리는 16세기 말까지 이런 시스템은 비교적 잘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게 깨어지기 시작합니다. 재밌게도 역시 16세기 말이었죠.
1. 푸른 늑대
1583년, 해서여진의 아타이가 반기를 듭니다. 이 때 요동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장수는 이성량, 이여송의 아버지였죠. 그는 건주 여진과 연합하여 아타이를 정벌하죠. 이 과정에서 건주 여진의 아타이, 교창가가 전사합니다. 모두 명군의 오인사격에 희생되었다고 하죠.
이들이 바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였습니다.
이성량은 이게 미안했는지 칙서 30통을 보내서 위로합니다. 이 칙서는 곧 명과 여진 사이의 교역을 가능하게 해 주는 물건이었죠. 이 무역을 독점하게 된 누르하치는 급격히 성장합니다. 이후 갈라져 있던 건주여진을 통일한 게 불과 5년 후인 1588년이었습니다. 명은 이에 대해 고민하다가 건주위도독첨사직을 내립니다. 누르하치가 강해진 것을 인정하면서 명예직을 주어 견제하려고 한 것입니다. 일단 누르하치가 친명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죠. 하지만... 이 푸른 늑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89년 그는 스스로 왕을 칭합니다.
조선부터 명, 일본이 임진왜란으로 시끄러울 때 그는 자기의 가치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2. 북방의 위협
여진족의 위협은 조선에서도 늘 경계 대상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4군 6진을 세우며 평안, 함경도를 확실히 조선의 땅으로 만들었고, 사민정책으로 그걸 공고히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 달래고 토벌했죠. 하지만 성종 대로 가면서 북방의 침략이 잦았는데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 했고, 기껏 토벌하려고 했다가 성과는 적고 피해만 크기도 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왕이 없는 장기에서 이기기는 정말 어렵죠. 기껏 강을 건너서 치려고 해야 수는 적었고, 흩어져 있었습니다. 확실한 목표를 잡기가 정말 어려웠죠. 만주 전체를 통제하는 건 조선은 물론 명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선조 대로 가면 꽤나 의욕적으로 대처하게 됩니다. 니탕개의 난이나 시전부락 공략 작전 등으로 상당한 성과를 누리게 되죠. 하지만 이는 여진의 세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것을 뜻 합니다. 선조는 이들을 확실한 주적으로 분류했고, 임진왜란 때도 북병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습니다. 북관대첩 때 언급했듯 함경도에서 국경인의 반란 세력도 북병들을 건드리지 않았고, 북병들도 국경인의 반란 세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미묘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정문부 역시 국경인을 토벌하고 가토를 쫓아내면서도 여진족의 공격을 막기도 했죠. 그러고보니 가토가 괜히 강을 건넜다가 패하고 쫓겨 온 경우도 있군요. -_-;
이후에도 북병들은 소수만 내려오지 대부분은 그 자리에 머뭅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9월, 누르하치는 명과 조선에게 원군 파병을 제안합니다. 이 때 조선은 거부했죠. 당시 명과 나눈 자문의 일부입니다.
"그들 무리인 마삼비(馬三非) 등이 왜적을 토벌한다는 이름을 빌어 병부에 아뢰면서 겉으로는 양순하게 돕는 체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물어뜯으려는 계책을 품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예측할 수 없는 화가 발생할 것입니다."
92년 9월 17일
94년 10월에는 함경북도 병사 정현룡, 순찰사 이희득 등이 적을 여러 차례 토벌하기도 했고, 제법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그 밖에도 여진족의 동태에 대한 장계가 여러 개 보입니다. 그 중에 98년 8월의 이일의 장계의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여기에 노토가 "올아적"이라는 자가 오라고 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고 보고해 왔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올아적이 누르하치인지는 모르겠군요.
"이 올호(兀胡)는 계미년(1583)의 반호(叛胡)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니, 아무리 생각해도 계책이 서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각별히 진념(軫念)하여 음우(陰雨)의 변에 대비하게 하소서"
이 해 1월에 누르하치는 다시 원병 파견을 제안하지만 이번 역시 거부합니다. 명 역시 마찬가지였죠.
"“만일 달자에게 왜적을 정토하도록 허락해 준다면 천조(天朝) 병마의 다소와 조선(朝鮮) 병력의 강약은 물론이요, 산천의 험이(險易)에 대해서도 모두 세밀히 알게 될 것이어서 관계되는 바가 작지 않으니 결코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98년 2월 28일)
-_-; 조선은 둘째 치고 명군의 강약도 알게 될 거니까 그만두자는 거였습니다.
95년에는 평안도 위원에 몰래 들어와 산삼을 캐던 건주 여진 40여명이 발각되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긴장상황이 만들어졌죠. 선조는 아직 남쪽의 적이 물러나지 않은 상황에서도 이를 경계했습니다. 특히 항왜들도 아내를 주고 잘 다독거려서 여기에 투입하자는 말도 했죠. 이 사건에 대한 선조의 평가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전일처럼 가볍고 얕은 무모한 계책으로 함부로 그들을 죽이고 거짓 보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95년 8월 5일)
이듬해 2월에 명나라 사절 편에 역관을 동행시켰는데, 그 때 그들의 위세가 험했습니다. 자기는 명을 섬기고 조선을 도와주려 했는데 정작 조선인들은 죄 지었으면 포박해서 보내지 왜 죽이냐고 힐난했죠. 이후에도 계속 그들의 동태를 살피는 일이 계속됩니다. 선조도 자기가 평안도에 직접 있었던만큼 그 사정을 잘 알고 있다면서 자신하죠. 노을가적, 노가적, 올아적(맞나 모르겠네요), 노추 등 누르하치의 이름은 정말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주부 신충일은 직접 누르하치를 찾아갔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담아서 보고하기도 했죠. 이른바 '건주기정도기'입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에 대한 대비를 생각하면 북방에 대한 대비는 이렇게 치밀했습니다. 그것도 전쟁중인 상황에서도 말이죠. 한명기 교수는 이것을 임진왜란을 겪어서 선조가 국방에 대한 관심 및 능력이 커진 걸로 판단하지만, 그 이전의 일들을 생각하면 이건 선조의 재위기간 전체를 관통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왜란을 통해 그 경계가 더 강화된 것일 뿐이라는 거죠.
이건 임란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601년에는 함북 병사 이수일이 여진족 부락 두 개를 토벌하기도 하고 일전에 "올아적"과 맞섰던 노토가 세력이 밀린 건지 조선에 항복해 오기도 합니다. 이 해에는 누르하치가 조선에서 직첩(벼슬)을 내려달라고 요청해 오기도 합니다. 힘이 세져 놓고 조선에 벼슬을 달라고 한 게 이상하죠? 이게 자기가 강성해졌음을 나타내는 표시였던 겁니다. 우리 역사 전반에 나타나는 사대와 같은 맥락이죠. 조선은 거부합니다.
"중국의 직첩을 받고도 여진국 용호 장군(女眞國龍虎將軍)이라 자칭하면서 중국에 조회하지도 않는 자들이 우리 나라 서울에 와서 직첩을 받을 리가 있겠는가" (01년 10월 28일)
그 후에도 홀라온, 위에서 언급한 노토 등의 세력이 누르하치에 의해 병합되고 그들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다는 보고가 계속 올라오고, 북방의 방비를 강화하자는 논의가 계속됩니다. 누르하치는 1599년 해서여진을 멸망시켰고, 명은 그 잔당을 지지하면서 대항마로 삼으려고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1607년,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는데 거기에 너희 조선(你朝鮮)이라는 표현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제 대놓고 맞먹겠다는 거죠.
2. 광해군 즉위
그런 가운데서 광해군이 즉위합니다. 정말 오랜 인내였죠. 생각해보면 정말 갖은 우연이 만들어낸 즉위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린 신성군이나 첫째인 임해군이 세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임란이 일어났고, 나이도 되고 능력도 좋은 광해군이 세자에 올랐죠. 그는 분조를 이끌고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도망이나 다녔던 선조와는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죠. 중국인들도 그를 크게 칭찬했습니다. 때문에 선조에게 질투를 받았고, 계속되는 양위 소동의 피해자가 되었죠.
임란이 끝난 후, 명은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은 절대 없었던 일이죠. 명도 만력제가 셋째를 더 총애하는 상황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선조도 거기에 힘을 얻어 광해군을 핍박했죠. 그런 상황에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왕의 총애는 거기로 쏠리고 유영경은 이에 가담합니다. 선조가 오래 살긴 했지만, 그래도 10년 정도만 더 살았다면 세자 자리는 영창대군에게 갔을지도요. 무려 16년 동안, 그것도 명과 선조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한 채 보낸 세자 생활이었습니다.
이런 모습과 앞의 선조, 뒤의 인조라는 엄청난 비교대상 때문에 광해군은 크게 재평가 받고 있죠. 그에 대한 얘기는 다음 편으로 미루고, 광해군 앞에 닥친 상황을 좀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마자 급한 소식이 들어옵니다. 누르하치가 배를 건조해서 압록강을 넘으려 한다는 거였죠. 윤근수는 그것을 알리면서 곽재우를 다시 부르기를 청했습니다. 바로 이항복을 보내려 했는데 이런저런 문제로 그만둔 모양이네요. 그 이후에는 영창대군 편을 들었던 유경영을 벌주는 문제가 많습니다. -_-; 그 달 말이 돼서야 통역관 하세국을 보내서 정세를 살피자는 논의가 나오죠. 뭐 결국 유경영은 자진하게 되고 곽재우는 사람을 보냈더니 상소 쓸 종이도 없고 몸도 아프고 말도 없고 옷도 다 해진 옷 한 벌밖에 없어서 못 올라간다는 답을 받아 오죠.
한편 염탐 간 하세국은 누르하치에게 포로로 잡힙니다. (-_-); 누르하치는 그를 풀어 주고, 광해군은 벼슬을 내려 주죠. 이 때 신하들의 반대도 컸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계속 활동하며 여진의 정세를 알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죠.
이후에도 계속 보고는 올라옵니다. 그 중에는 누르하치가 어디를 쳐서 병합했다느니 하는 내용도 있고, 여진인들이 강을 건너 도망오니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내용, 누르하치가 뭘 '바쳤는데' 어찌 할까 하는 내용들이 있었죠. 1614년 광해군은 평안 병사 이시언을 직접 만나는데, 이 때의 내용을 축약해 보겠습니다.
광해군 : 북도(함경도) 방비는 어떤가?
이시언 : 성과 병기, 활 등은 조정이 엄격히 하라 해서 비거나 소홀한 게 없습니다. 문제는 전염병 때문에 병사자가 많아서 쳐들어오면 막기 어렵습니다.
광 : 그럼 본도(평안도)는?
이 : 여기는 또 달라서 북도는 장수들이 날마다 막을 생각만 하고 백성들도 그런데 여기는 창성, 벽동이 접경지인데도 백성도 수령도 놀기만 합니다. 대충 병력은 비슷한데 성이나 병기는 미치지 못하구요. 지금 천조국(-_-)이 노추를 치려고 병력 모으고 있는데 우리는 별 신경 안 쓰니 걱정입니다.
광 : 천조국이 나서면 노추를 싹 쓸어 엎을 수 있을까?
이 : 노적은 보통 오랑캐에 비할 게 아닙니다. 행군하는 거 보니 호령이 엄숙하고 기계가 정예로웠습니다. 걱정입니다.
광 : 노추가 그리 강해졌으면 군대 수는 어떤가?
이 : 다는 몰라도 정예병만 1만에 가깝고 병합한 애들까지 치면 수만 명은 됩니다. 다만 얘네들은 토목공사 같은 거 시켜서 도망칠 궁리만 하는 거 같습니다.
광 : 만약 적이 약탈하러 온다면 어떻게 방어하는가?
이 : 우리는 반드시 성을 굳게 지켜야 됩니다. 적은 기병이라서 이기기 어렵습니다.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싸우지 말고 적이 노략직할 곳이 없게 한 후 적이 돌아갈 때 친다면 모르겠는데 전면전은 어렵습니다.
광 : 성이 없으면 뭘로 지키겠는가?
이 : 평야에서 싸울 수 없는데 성이 없다면 캐리어 아니 방법이 없습니다. 북도는 인심이 괜찮아서 죽을 마음으로 싸우려 합니다. 적절한 포상을 더 해 줘야 됩니다.
광 : 그래. 평안도도 가서 잘 해 봐라.
이 : 아, 그리고 천조가 조선에 징병하는 것을 노추가 안다면 우리를 원망할 겁니다. 노추가 "우리는 조선에 피해 준 게 없는데 왜 스스로 난을 부르는가"라고 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변방에 보내는 사람은 문관 말고 무장으로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대충 요약하면 이 정도입니다. 변방에 있던 이시언이니만큼 적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인지 광해군은 중국이 누르하치를 정벌하는 것을 철저히 비밀로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부터 중국과 조선 사이에 누르하치를 치자는 계획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논의도 계속되죠. 강을 넘지는 않더라도 국경에 병력을 모아두자는 논의도 있었고, 적의 염탐에 대비해 각 나루터에도 별장을 배치하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병력을 일으키기 전에 각 군사들에게 미리 포상해서 위로하자는 말도 있었죠. 이 모든 일들이 이미 1614년부터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명과 조선을 긴장시키던 누르하치는 마침내 몸을 일으킵니다.
3. 일곱 가지 큰 원한 (七大恨)
1616년, 누르하치는 국호를 금, 연호를 천명이라 하고 여진족의 이름을 만주족으로 고칩니다. 팔기군도 이 때 만들어지죠. 본격적으로 칸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여진국, 건주국으로 살짝씩 왕을 칭했지만, 여기서는 확실히 이전 중원을 위협했던 금나라의 후손을 내세운 것이죠. 후금의 건국입니다.
이어 1618년, 그는 일곱 가지 큰 원한이라는 격문을 발표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1. 명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이유없이 죽인 것
2. 명이 건주여진을 학대한 것
3. 명이 영토 협상을 거부하고 쳐들어와 살인을 자행한 것
4. 명이 건주여진을 막기 위해 엽혁여진에 군대를 파병한 것
5. 엽혁여진이 같은 여진으로서 신의를 저버리고 명의 앞잡이가 됐고, 자신의 약혼녀를 몽골에게 보낸 것
6. 명이 누르하치에게 시하, 무안, 삼차 땅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
7. 명의 요동총독 소백지가 권한을 남용해 건주여진인들을 착복한 것
이었죠. 뭔가 중복된 게 보이는 게 핑계 거리 늘리려고 한 거 같네요.
이건 확실한 선전포고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엽혁은 누르하치에게 멸망한 해서여진의 하나였습니다. 실록에는 홀~(홀라온, 홀적 등)이나 여허 등으로 기록돼 있죠. 이렇게 누르하치는 명을 치겠다는 자세를 공고히 하게 됩니다.
명의 움직임도 빨라집니다. 이미 명은 누르하치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18년부터 이에 대한 보고가 계속 올라오죠. 이어 18년 윤4월에는 요동 도사가 적의 정세를 알려 오고, 협공할 것을 계속 제안합니다. 이어 경략 왕가수도 "우리는 행 불행을 같이 해야 된다"면서 임진왜란 때 "10만을 파견한" 재조지은을 강조하고, 이제 이 은혜를 갚으라고 강요합니다. 일단 광해군은 장마 오는 여름철에 이러면 어렵다면서 그런 쪽으로 회답하라고 하죠. 이어 명과 조선은 부자지간과 같으니 돕긴 도와야 되는데 농사철이라 징병이 어렵고, 누르하치가 옛날의 이만주(세조 때 토벌)와는 격이 다르니 신중해야 된다고 방침을 확실히 정하죠.
누르하치가 공격했던 무순은 명과의 교역을 하던 곳으로, 이 곳을 쳤다는 것은 명과 확실히 적대하겠다는 의사표시였습니다. 당시 명은 조선과 자신에게 따르던 해서 여진의 병력을 모두 동원해 누르하치를 치려고 했죠. 특히 조선에 강요한 명분은 재조지은이었습니다.
이어 조선에 징병을 강요한 인물은 양호였습니다. 임진왜란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명나라 장수였죠. 그가 보낸 자문의 내용은 재수없기 그지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를 도와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룬다면 그야말로 국왕의 봉토에서 편안한 복을 누리게 될 뿐만이 아니라 충의의 이름까지도 얻게 되는 셈인데 또 무엇을 꺼려 하시지 않습니까."
"어쩌면 수만 병력을 갑자기 채우기가 어렵고 또 한편으로는 독자적으로 감당해내기가 난처해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제 내가 왕에게 약속하겠습니다. 그저 1만 정병만 미리 뽑아 한 달 가량의 양식을 아울러 마련한 뒤 왕의 국경에 있게 하십시오. 그리고 작전이 벌어졌을 때 노추가 동쪽으로 충돌해 오는 것을 막아 도망가지 못하게 하십시오" (18년 6월 19일)
왜 니네만 편하려고 하냐. 니네한테도 도움 되는 거다. 병력만 올려라. 다 간단히 끝난다.
글쎄요. 간단히 끝났을까요. 이렇게 광해군은, 조선은 또 하나의 전쟁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북쪽이었습니다.
다음 글의 주 내용은 심하 전투와 그 후의 내용들이 되겠습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위협에 맞서 어떤 결론을 내렸을지, 그에 대한 결과는 어땠을지... 다뤄보도록 하죠.
다음 글은 [고려처럼 - 빛과 어둠] 입니다.
누군지는 몰라도 여진을 "무좀"에 비유한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 그런 놈들에게 당했으니 기분이 어땠을지는 참...
덤으로 이 인간들이 명칭 좀 통일하지 다 지 편한대로 불러서 찾기 힘드네요. -_-; 제임스면 제임스지 어디서는 제엠스 어디서는 제무스 어디서는 제임수 이런 식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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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또 선조 옹호군요. -_-; 에휴.
뭔가 이전 댓글들에 답을 하나도 안 해서 ㅠ 여기서 달자면요.
로사님 임경업 얘기는 절대 빠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
나이트해머님 책 추천 감사합니다.
sungsik님 뭔가 금방 나올 줄 알았는데 너무 늦었네요 ㅠ
fd테란님 너무 늦은 추천이지만, 호란 전체를 관통하는 책은 의외로 찾기 힘드네요. ㅠ 한명기 교수님 책이 가장 좋을 듯 합니다. 좀 비싸지만요 - -; 병자호란 자체는 실록이나 병자록 참고하시면 될 듯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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