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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10/20 19:22:07
Name 내꿈은세계정복
Subject [일반] 나를 스쳐지나간 불꽃
우리의 첫 만남이 기억난다. 나는 웬들러 5/3/1 주기의 두 번째 주에 맞춰 200 킬로그램의 바벨로 3 회의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었다. 고중량으로 씩씩대며 운동하는 내게 와 당신은 앳된 얼굴로, 하지만 그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쾌활하게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운동하시는 거에요?'

나는  아름다운 몸도 잘생긴 얼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궁금하다' 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처음 본 그날 내게 말을 걸고,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잠을 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은 그랬다.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고, 멈춰서지 않았다. 항상 전속력으로 달렸다.

그리고 항상 벽에 들이박아야 멈춰섰다.

나는 당신이 좋았다. 당신은 예뻤다. 당신은 어렸다. 내게 친구가 필요할 때 당신은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내게 여자가 필요할 때 당신은 나만을 위한 여인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당신이 벌이는 미친 짓에 나는 내 나이도 맞지 않게 따라가곤 했다.

우리의 사이가 언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걸까?

당신이 헬스장 사업을 시작했다가 실패하고 수 억이 넘는 채무가 있다는 걸 내가 알아차렸을 때? 그 채무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고급 외제차를 어떻게든 할부로 구매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 그렇게 고집을 부려 구매하고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반파되었을 때? 무리하게 한 체급 더 높은 종목에 출전하겠다고 약물 복용량을 늘렸다가 신장 이상으로 쓰러졌을 때? 예뻤던 얼굴이, 근육질의 몸이 투석을 받으며 부어오르기 시작했을 때? 당신이 전 남친과 찍은 섹스비디오로 전 남친에게 협박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사실 협박을 하고 있는 건 전 남친이 아니라 당신이라는 사실을 전 남친으로부터 알게 되었을 때? 출전했던 대회의 심사위원에게 육체적인 로비를 했었고 그 관계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언제부터인가 가까운 헬스장에서 일하는 걸 그만두고 페이가 좋다며 멀리 있는 헬스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을 때? 사실 그게 헬스장이 아닌 오피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무너지고 있던 건 우리의 사이가 아니라 당신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붕괴가 내게 전염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결혼 이야기를 꺼내던 것은 나였고 그 주제를 회피하던 당신이었지만, 어느샌가 당신은 투석을 받으며 나와 결혼하면 행복할 거 같다 말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그 독백에 대답을 해 준 적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당신이 신장 한 쪽을 잃은 뒤 부터는.

나는 당신의 손을 처음부터 과감하게 놓지도, 우직하게 끝까지 잡고 있지도 못했다. 진작 당신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이제 그만뒀다' 라는 거짓말로 변명을 하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당신도 더 이상 내 손을 잡을 힘이 남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날 당신은 내게 말했다. 부모님께 급하게 내려갔다 와야 할 거 같은데 100 만원만 빌려달라고. 나는 어렴풋이 눈치를 챘다. 말없이 100 만원을 이체한 내게 교태를 부리는 당신을 보며, 나는 농담조로 '나 안 볼 거면 안 갚아도 돼' 라 말했다. 당신은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다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무슨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에게 100 만원만 꾸고 잠수타냐며, 몇 억으로 받아낼 거라 말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당신의 번호는 없는 번호가 되었고 카톡 프로필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당신이 총무를 맡았던, 분당에서 제법 큰 규모의 스포츠 동호회가 당신의 실종으로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도 들었다.

처음에 든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해방감과 홀가분함이었다.

당신이 사라지고 1년 쯤 지났을 때, 당신의 친구에게 당신의 소식을 들었다. 지방에서 한 남자와 사실혼 관계가 되어 동거를 시작했다고. 그리고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말하고 사실은 안마시술소에 출근하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나처럼 그 역시 당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미행을 했다가 안마시술소로 가는 걸 보고 눈이 뒤집혀 경찰에 신고를 하고 경찰과 쳐들어가 노발대발했다고. 경찰은 알아서 해결하라 돌아섰고, 포주는 남자에게 상당한 돈을 쥐어주며 진정을 시켰고, 당신을 보고 경멸조로 꺼지라 말했다고. 당신은 남자에게도 쫓겨나며 지방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얼마 안 남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흐느끼며 밤을 지새고 있다고.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 번호 알려주지 말고 나 어디 있다고 절대 말하지 마.'

그 이야기를 들은 지도 3 년은 지난 거 같다. 그리고 별 생각없이 인스타그램을 돌던 중, 당신이 찍힌 사진을 보았다. 당신은 친구들에 둘러쌓여 밝게 웃고 있었다. 아직 신장을 잃기 전의 날렵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선물했던 귀걸이를 보며 나와 만나기 시작했을 때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게시글의 시작 부분을 읽기 시작했다.

'제 친한 친구인 OO 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놀라지 않았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무심하게 인스타를 닫고 잠깐 마루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멍하게 서 있을 때 내 눈에 애버펠디 16년이 들어왔다. 네가 좋아했던 위스키.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위스키. 너 이후로 내가 만난 그 어떤 여자도 좋아하지 않았던 위스키. 마침 얼마 전 선물 받아 아직 내 진열장에 놓여있었다.

한동안 그 위스키를 바라보던 나는 네 지인에게 연락을 했다. 나와 너의 관계를 모두 아는 그는 일부러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인은, 그래, 생각했던 그대로였기에 놀라지 않았다. 사실 물어보지도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가 대뜸 내게 말해주었기에 알게 되었다.

네가 묻혀 있는 곳을 물어보았고 대답을 들었다. 그래,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제법 멀다. 알고 있었다. 너는 남도 출신이었으니까.

네가 처음 람보르기니를 산 날이 떠오른다. 노발대발하며 이걸 왜 샀냐고 소리지르는 나를 너는 억지로 조수석에 앉힌 뒤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꺄르륵 대며 160 킬로미터를 밟는 너를 보며 나도 결국 허탈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런 나를 보며 안심한 너는 속도를 더욱 올렸다. 속도가 200 을 향해가자 나는 질겁을 하며 속도를 낮추라며 다시 네게 소리를 질렀다. 네가 아슬아슬하게 추월하는 차들이 미친듯이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런 나를 보며 너는 계속 꺄르륵 거렸다.

나는 네가 운전하는 차에서 내렸다. 너는 내가 내린 뒤에도 끝까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 내가 조수석에 있었다면 너는 브레이크를 밟았을까, 이런 감상은 들지 않는다. 그 정도로 나를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나는 네가 브레이크를 밟게 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너와의 관계에서 그 어떤 후회도 남지 않는다.

너를 변호하고 싶지도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너는 그들 말마따나 '썅년' 이었고, 나 역시 얼마든지 너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멋대로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삶이었고, 그 피해를 책임지지도 않았다. 너는 다른 사람들의 등에 갑작스레 비수를 찔러넣고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네가 운전하는 람보르기니 조수석에 앉아있을 때, 조금은 즐거웠다.

애버펠디 16년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차로 내려가 트렁크에 넣어두었다. 주말에 천천히 남도로 내려갈 생각이다. 정속 주행으로,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브레이크를 밟아가며. 그리고 네 앞에 모든 애버펠디를 비우고 오려 한다. 나는 싫어하는 술이니까, 10 만원 안팎의 싼 술이니까, 아까워하지 않고 네게 다 주고 오려 한다. 그렇게 청춘 흉내놀이도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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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 제임스
25/10/20 20:55
수정 아이콘
3여년의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애도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들 해요.

이 글이 부디 그 분과 글쓴이님 사이를, 그리고 글쓴이님 스스로를 잘 추스릴 수 있는 애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이쁜 글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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