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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9/24 08: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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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여우와 사자의 전쟁


Paolo_Uccello_045.jpg 여우와 사자의 전쟁


 피렌체와 피사의 전쟁은 당대인들에게 '여우와 사자의 전쟁'으로 불렸습니다. (적어도 피렌체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하면) 피사인들은 여우고, 피렌체인들은 사자라는 것이었습니다. 마흔이 다 된 존 호크우드는 피사군의 선봉에 있었고, '늙은 여우'로 불렸습니다. 여우와 사자의 비유는 훗날 마키아벨리가 이상적인 군주가 지녀야할 덕목들을 언급하면서 다시 활용됩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존 호크우드는 여우와 사자의 미덕을 고루 뽐내게 됩니다.

 피사와 백색용병단의 계약은 좋은 징조들과 함께 했습니다. 피사 성문 앞까지 들이닥쳤던 피렌체의 용병 피에로 파레네세가 흑사병에 걸려 죽었고, 그 죽음과 함께 갑작스런 산들바람과 하늘을 가릴 정도로 빽빽한 귀뚜라미 떼의 이동이 목격되었기 때문입니다. 용병단은 피렌체로 진격하여 아직 제대로 조직되지도 못한 피렌체군을 격파했고, 수없이 많은 피렌체 측의 주요인사들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용병단은 끝모를 전리품의 목록과 포로들의 행렬을 동반한 채 피사로 돌아왔는데, 당대의 연대기 서술에 따르면 "모든 영국인들이 부자가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존 호크우드가 피사 관료들에 의해 총대장에 선출된 것은 바로 이 때였습니다. 그가 오랜 상관이자 동료였던 알브레히트 슈테르츠를 밀어내고 총대장이 된 것은 다소간 껄끄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때 존 호크우드가 백색용병단의 확고부동한 총대장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 이 당시의 용병단장은 선출식이었고, 단장의 직위는 유동적인 것이었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2월의 추운 겨울날, 군대를 출진시켰고, 이번에는 피렌체 또한 슈바벤의 저명한 귀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해 만전을 기한 상태였습니다. 촌락들은 이미 식량을 요새 안으로 밀어넣은 지 오래였고, 각 고개마다 방비가 철저히 되어있었습니다. 존 호크우드의 용병단은 겨우 열 다섯의 포로만을 지닌채 피사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말들과 병사들이 얼어죽었습니다.


EB1911_Plate_I._24,_Fig_2.jpg 여우와 사자의 전쟁


 4월, 피사는 독일인 한네킨 바움가르텐의 용병단(3,000명)을 추가로 고용했습니다. 이는 사실 피렌체와의 휴전에서 우위를 얻기 위한 고용이었는데, 협상이 결렬되자 곧 실전용 계약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출진한 호크우드와 바움가르텐의 군대는 6천이 넘는 기병대와 수많은 보병 공병대로 구성되었고, 이는 다분히 공성전을 염두에 둔 부대 구성이었습니다. 

 피렌체 측에서 나선 용병대장은 몇 해 전 란다우의 용병단을 격파한 것으로 명성 드높았던 판돌포 말라테스타였습니다. 판돌포를 괴롭히기 위해 호크우드는 일백명의 분견대를 파견했는데, 그들은 들판 위에서 삽십여 명의 독일 용병들과 마주쳤습니다. 하인리히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진 어느 독일인 기사가 말에서 내려 창을 들고 일백명의 영국인들에게 돌진했고, 무려 열 명을 낙마시키고 두 명을 살해했습니다. 


The_White_company_(1901)_-frontispiece.jpg 여우와 사자의 전쟁


 그 광경을 보고 사기가 충천한 독일 용병들이 일제히 돌격해오자, 겁에 질린 영국인들은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이 패배를 보고 받고 용병단의 진군 경로를 수정했는데, 단 한사람의 돌격이 역사에 영향을 미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존 호크우드는 신중하고도 체계적으로 피렌체의 영향 하에 있는 마을들을 하나하나 불태워갔고, 결국 판돌포 말라테스타는 피렌체 정부에 의해 해임됐습니다.

 피렌체시 공성전은 화살비, 기사서임식, 영웅적인 분투 등으로 점철된 하나의 연극과도 같았습니다. 윌리엄 골드는 대담하게도 가장 먼저 달려나가 성문을 돌파했고, 그 용맹함으로 인해 즉석에서 기사로 임명됐는데, 서임식은 적들이 마음먹고 성벽에서 석궁을 쏘면 맞을 수도 있는 거리에서 진행됐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트럼펫과 드럼 연주자들을 성문 앞에 보내 가능한 크게 연주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런 연주가 진행될 때 마다 피렌체 시민들은 적습에 방비하느라 녹초가 되곤 했습니다. 

 피렌체시의 함락이 거의 눈 앞에 있었음에도, 피사군은 공세를 포기하고 포위를 풀었습니다. 이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힘든 정황은 여러가지 말들을 낳았다. 피사측 고위 관계자들 거의 모두에게 엄청난 뇌물이 살포되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알브레히트 슈테르츠, 한네킨 바움가르텐 등은 피사와의 계약이 만료된 자유로운 용병단을 자처하며 시에나를 약탈하러 떠났습니다. 그들이 다시 돌아왔을 때, 존 호크우드의 현명한 충고를 받아들인 피사 시민들은 성문을 굳게 지켰습니다.

 마지막까지 1,200명의 용병 잔당을 이끌고 제 자리에서 공성을 지휘했던 존 호크우드는 유일하게 고용주에게 충직한 용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후대 사가들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이탈한 용병단들 입장에서도 할 말은 있을지 모릅니다. 피사측에서 특히 이탈한 용병부대들에 대해 오랫동안 급여를 체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탈한 용병대장 중 하나인 앤드루 벨몬트는 한 달 뒤 편지에서 피사의 체납을 언급하며 할 수 있다면 그 도시를 털어버리고 싶다고까지 말했습니다. 게다가 존 호크우드는 피사측에 의해서 급작스럽게 대장으로 선출된 인물이었습니다. 이것 또한 용병단의 분열에 영향을 주었을 수 있습니다.

 피렌체는 다시 전쟁의 승기를 잡았고, 공세를 취했습니다. 존 호크우드는 카시나에서 피렌체의 대군을 맞닥뜨렸고, 그에게는 직접 지휘할 수 있는 영국인 용병들이 겨우 팔백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그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태양과 먼지섞인 바람을 등져 적들의 전투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자 했는데, 크레시 전투에서 활용됐던 바로 그 전략이었습니다. 

 호크우드의 선봉대는 맹렬한 기세로 피렌체군을 몰아붙였지만, 결국 수적 열세와 피사군의 지리멸렬한 지휘로 인해 호크우드의 부대는 적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패주해 뿔뿔히 흩어지는 대패를 당했습니다. 피렌체는 포로로 잡은 피사인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존 호크우드가 패전으로 비난 받지는 않았습니다. 당대인들 모두가 그 패전의 원인이 다른 데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결국 피사는 피렌체 측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휴전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전쟁의 결과는 피사와 피렌체 양 측 모두에게 쓰라린 것이었고, 이 전쟁에서 명성과 황금을 얻은 것은 오로지 양 측에 붙어 싸우던 용병들 뿐이었습니다. 영국인들로 구성된 용병단이 어느쪽에 붙느냐가 전쟁의 향방을 갈랐다고, 당대인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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