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덜렁 올려놓고 대댓글을 달지 못해 죄송합니다. 격려의 글들이 너무 감사하고, 이런 글을 모두의 공간인 게시판에 자꾸 올리는 것도 송구하고 그래서, 대댓글을 어떻게 달아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감사히 보고 있고, 짚어주시는 부분들 새겨듣고 있습니다.
10. 천 개의 바늘
막내를 본 의사 선생님들 중 속시원히 병명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으나, 모두가 뇌 MRI는 한 번 찍어보라고 권했다. 나와 아내가 의심하는 대로 자폐일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다고 했다. 여기서 ‘아닐 수도 있다’는 건 괜찮다는 게 아니라 지능 발달이 의심된다는 의미였다.
7~8개월 아이들이라면 물건을 집어 들고 관찰할 수 있어야 했다. 그 물건이 갑자기 떨어지면 시선도 자연스럽게 같이 내려가 두리번거려야 했다. 심지어 눈앞에서 장난감을 뭔가로 가려놓으면 그것을 치우고 장난감을 차지하려 해야 했다. 자기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자기 이름을 부르면 느낌으로 알아채고 돌아보는 아이들도 있다고 했다. 우리 아이는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가지고 자폐니 지능 저하니 확인할 수는 없었다. 자폐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지능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눈치를 보아하니 선생님들은 지능 쪽에 더 무게를 싣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아이는 두개골 한쪽이 살짝 패인, 비대칭 구조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양 귀의 위치도 달랐기 때문이다. 외관상 나타나는 그런 특성들이 뇌 발달의 문제를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다고 의사들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의 다음 과제는 뇌 MRI가 됐다. MRI 촬영은 굳이 소아과나 재활학과에서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예약을 잡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그 월령대 아이가 촬영 시간 동안 가만히 있도록 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어린아이들이 가만히 있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재우기였다. 그러니까, MRI 예약 시간에 딱 맞게 아이가 잠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약물의 도움을 받긴 하는데, 아이에게 쓰는 약은 강력하지 않다고 했다. 잠을 좀 길게 유지해 주는 정도지 깨어있는 사람을 혼절시키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예약 시간에 딱 맞게 아이를 재우고 유지시키는 것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에 아예 입원하는 경우도 많다는 정보를 아내는 또 어디서 구했다. 우리는 지방에 살고 있고, 뇌 MRI를 촬영하여 세밀하게 판독할 만한 병원은 서울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 우리에게 허락된 선택지는 입원뿐이었다. 우리는 잠실 쪽에 있는 대형 병원에 예약을 걸어뒀다.
난 아이가 제발 자폐이기를 속으로 바랐다. 지능장애만큼은 절대로 안 된다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자폐는 언젠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각종 병원과 재활센터 정보를 구하고 있었을 때 나는 여러 자폐 가정의 수기와 간증, 논문들을 읽었고, 그 과정에서 어느 날 갑자기 자폐 증상이 사라졌다는 증언들도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흔한 현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완치가 ‘불가능’까지는 아니었기에 난 나도 모르게 그 기적을 소망하게 됐다.
아내는 나와 반대였다. 아내는 자폐보다는 지능장애가 낫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지능장애도 유형과 정도가 여러 가지겠지만, 그래도 자폐 쪽보다는 어느 정도 소통이 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쉽게 말해, 지능장애를 가진 아이라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확률이 높다는 의미다. 아내는 막내가 자기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이 예쁜 아기가 ‘엄마’만 부르고 찾아준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엄마 마음이, 아기의 자립이 더 중요한 아빠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해볼 계획이다.)
예약일이 돼서 아내와 막내는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 후에 있을 장기 입원 생활을 그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작’ 1주일(그때는 ‘장장’ 1주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빠 마음은 쓰라렸다. 아내는 아니었다. MRI 예약일까지 약 5~6일의 시간이 있었고, 그동안 병원에서 재활 수업을 해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병원도 아동 재활로 꽤나 유명한 곳이었고, 아내는 그런 곳에서 하루도 낭비하지 않고 재활을 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뻐했다.
그리고 대망의 검사일. 생전 처음 마취약까지 써서 커다란 기계에 아이를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아내는 잔뜩 긴장했고, 나 역시 멀리서 초조했다. 지척에 있든 100km 밖에 있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기도뿐이었다. 아내는 아침부터 아이가 잠들지 않게 계속해서 놀아줬다. 아이를 안고 병원 복도를 수십 차례 돌고, 여기저기 오르내렸다. 졸린 아이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금방 잠들 것 같았다.
복병은 따로 있었다. 약물 투여였다. 혈관에 주사를 놓고 재워야 하는데, 아이가 너무 어려 바늘이 들어갈 만한 혈관을 도무지 찾을 수 없다고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전화를 받는 내 입술도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아이가 이르게 재활을 시작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이번만큼은 너무 어려서 문제라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잠이 들락 말락 한 아이를 조심조심 살펴가며 간호사들은 혈관을 물색했다고 나중에 아내는 전해줬다. 그리고 팔에 첫 바늘을 꽂았다. 아이가 움찔했다. 안타깝게 그 바늘은 혈관에 도달하지 못했다. 두 번째는 어깨. 역시 실패했다. 발바닥과 목, 발등과 손등에도 차례로 바늘을 밀어 넣었다. 혈관을 짚지 못했다.
다른 병동의 내로라하는 간호사들까지 불려 왔다. 아이를 둘러싸고 열 명이 넘는 간호사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고, 이미 수십 번 찔린 아이는 졸리지 않게 됐다. 그리고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뒤에서 아내는 바늘이 아이를 찌르고 또 찌르는 걸 지켜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십자가 밑의 마리아처럼 마음이 수천 갈래로 쪼개졌다.
장장 두 시간 동안 막내는 온몸으로 바늘을 받아냈다. 아이도, 간호사도, 그리고 아내도 진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MRI는 못 찍었다. 아내는 그날 그 어느 때보다 아이를 꼭 껴안고 잤다. 그때를 회상할 때마다 아내는 “당신 같았으면 끝까지 못 보고 중간에 그만두게 했을 거야”라고 말한다. 자기는 강심장 엄마라는 자랑이다.
나도 할 말이 없지 않았다. 왜냐면 그 일로부터 불과 몇 주 뒤 막내가 후두염에 걸려 또 다른 병원에 입원하게 됐는데, 그때 보호자로 동반 입원했던 건 나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혈관을 찾지 못해 아이는 열 번도 넘게 바늘에 찔려야 했다. 나는 눈물 범벅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잠들 수가 없어 자는 아이 엉덩이를 토닥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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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스펙트럼인 저희 아들이 얼마전에 편도쪽 수술을 했었는데 그때 혈관을 잡고, 링거바늘을 꽂고 그 바늘을 뽑지 않도록 밤새 지켜보는데 마음이 아프더군요.
일반 아이들도 어려운 일이지만 자폐인 아이들에게 그 고통을 이해시키기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보니.
고생 많으셨고 지금도 고생많으실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