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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4/03/14 11:12:53
Name meson
Subject [일반] [역사] 연개소문 최후의 전쟁, 최대의 승첩: 6. 고구려의 ‘이일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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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둔지: 평양도행군의 경우

661년 8월, 소정방은 대동강으로 진입하여 마읍산(馬邑山)을 빼앗은 뒤 평양을 공격하였습니다.[6-1] 평양은 대동강 북안에 위치하므로, 소정방은 대동강 북안의 마읍산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 상륙전을 감행한 것입니다.[6-2] 이때 소정방이 영채를 세운[6-3] 마읍산은 과거 고구려군이 내호아와 전투를 벌인 평양 교외 60리 지점으로 여겨지며,[6-4] 조선시대 평양에서 (대동강을 따라) 서남쪽으로 60여 리를 가면 실제로 보산진(保山鎭)이라는 요해처가 존재하였다고 합니다.[6-5] 따라서 소정방의 평양도행군은 보산진 일대에 주둔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6-6]

[6-1] 『新唐書』 卷220, 列傳145 東夷 高麗.
[6-2]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296쪽.
[6-3] 『新唐書』 卷111 蘇定方傳.
[6-4]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298쪽.
[6-5]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299쪽.
[6-6]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306쪽.


104-2017-307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307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주둔지: 옥저도행군의 경우

한편 소정방과 함께 평양 공격에 참여한 방효태는 영남(嶺南)의 수군을 거느리고 사수(蛇水) 가에 진영을 폈으며[6-7] 이곳에 벽을 쌓았다고 합니다.[6-8] 즉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은 사수를 천연 해자로 삼아 야전축성을 진행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6-9] 이때 사수의 위치는 “사수는 평양의 서쪽 경계에 있다[蛇水在平壤西境]”라는 『독사방여기요』의 언급에 따라 평양성 왼쪽을 흐르는 보통강으로 비정됩니다.[6-10] 따라서 방효태는 사수를 사이에 두고 평양성과 마주보는 지점에 주둔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6-7] 『冊府元龜』 卷373 將師部34.
[6-8] 『讀史方輿紀要』 卷38, 山東9, 外國附考, “蛇水在平壤西境, 唐龍朔初, 龐孝恭等擊高麗, 以嶺南兵壁於蛇水, 爲蓋蘇文所攻一軍沒.”
[6-9]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49쪽.
[6-10] 이상훈, 「신라군의 사수 전투와 평양성 전투」, 『신라의 통일전쟁』, 민속원, 2021, 279-282쪽;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28쪽;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3쪽;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47쪽.


2-661-662-17-2023-163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3쪽. 참고용 지도이며, 당군의 주둔지는 아래에서 다시 검토합니다.)

주둔지: 패강도행군의 경우

한편 당군이 평양을 포위하기 위해서는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적두산성을 장악해 수로를 통제할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6-11] 실제로 훗날 평양에서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의 토벌군도 적두산성에 중군(中軍)을 주둔시킨 바 있지요.[6-12] 또한 같은 논리에서 합장강과 대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청암리토성에도 당군이 주둔했을 공산이 큽니다.[6-13]

[6-11]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3쪽.
[6-12]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平壤府 古跡.
[6-13]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5-156쪽.


이때 방효태는 보통강에 의지하여 야전축성을 하였으므로, 적두산성에서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보통강 북안 일대에 병력을 전개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임아상은 자연스럽게 보통강 동쪽의 모란봉과 청암리토성 일대를 맡아 평양성 내성을 노리고 병력을 전개하였을 것입니다.[6-14] 다만 적두산성과 청암리토성은 평양성의 측면만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이므로, 옥저도행군과 패강도행군 모두 평양성 정면의 평야에 별도의 진지를 구축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6-15] 이러한 진지의 소재지로는 평양성 보통문 방면의 사수 북안과 평양성 칠성문 방면의 병현(並峴) 일대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특히 병현은 묘청의 난 당시 김부식이 우군(右軍)과 전군(前軍)을 주둔시킨 곳이기도 하죠.[6-16]

[6-14]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9쪽.
[6-15]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6쪽.
[6-16]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4쪽.


따라서 661년 당군은 보통강을 기준으로 서쪽에 방효태의 옥저도행군이 주둔하고, 동쪽에 임아상의 패강도행군이 주둔하여 평양성을 육상에서 압박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소정방은 앞서 언급했듯 평양성 서남쪽의 마읍산(서학산)일대에 주둔하였을 것입니다.[6-17] 이때 소정방은 보산진을 중심으로 북쪽의 서학산과 남쪽의 정이산을 점거하여 당군의 퇴로를 확보하는 한편, 황룡산성이나 황주성 등 평양성을 보조하는 위성(衛城)들[6-18]에 주둔한 고구려군이 평양성을 구원하는 것을 차단하려 한 것으로 보입니다.

[6-17]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62-163쪽.
[6-18] 이인철, 「7세기 고구려 군사활동의 주요 변수」, 『신라문화』 24, 2004, 209쪽.


104-2017-310
(이상훈, 「삼국통일기 고구려 마읍산의 위치와 군사적 위상」, 『군사』 104, 2017, 310쪽. 참고용 지도입니다.)

위태로운 보급: 평양 포위전의 난항

그런데 당군은 평양성 포위에는 성공했으나 함락에는 난항을 겪었습니다. 당시 평양성에는 고구려 남부 각지의 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6-19] 성의 자체 방어력도 뛰어나 공성이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집니다.[6-20] 이에 소정방은 고구려에 도착하고 한 달이 지나니 위태로움이 심하다며 신라에 지원 대책을 요청하였고, 9월 말경에 이 전언이 문무왕에게 전달되었지요.[6-21]

[6-19]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87쪽.
[6-20]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1-152쪽.
[6-21] 『三國史記』 卷42 金庾信傳.


당시 전황에 대한 신라 측의 평가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마침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인이 견고하게 수비하니, 이 때문에 (소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당군의) 군사와 말이 많이 죽고 부상당했으며, 군량을 조달하는 길도 이어지지 않았다.
遂圍平壤, 麗人固守, 故不能克. 士馬多死傷, 糧道不繼.
- 『삼국사기』 권44 김인문전 -
위 사료에 따르면 당군은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과 군수물자 부족으로 인해 고전을 면치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치통감을 기준으로 661년 9월 20일경에야 계필하력이 압록수를 돌파하였으므로,[6-22] 압록수를 거치는 당군의 보급선이 한동안 차단된 상태였던 것으로 볼 수 있지요.[6-23] 압록수 돌파 뒤에는 잠시 보급이 재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요동도행군이 철륵 9성의 반란으로 인해 철군함에 따라 평양으로의 보급로는 다시금 끊어졌을 것입니다.

[6-22] 『資治通鑑』 卷200, 唐紀16 高宗 龍朔元年 10月 壬子.
[6-23]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1쪽.


3개 도행군의 회군: 누방도행군의 희생

전편에서 살펴보았듯 당고종은 661년 10월 11일에 철륵 토벌군을 편성하였으며, 이에 따라 장잠도·부여도·요동도행군이 고구려 전선에서 이탈하였습니다. 이들이 요동을 벗어나기까지는 2개월 이상이 걸렸을 것으로 추정됩니다.[6-24] 반면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은 예의 3개 행군과 마찬가지로 요동 일대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군하지 않았는데, 아사나충군과 소사업군 등이 안정적으로 철군할 수 있도록 전선에 남아 요동 방어선의 고구려군을 견제한 것으로 보입니다.[6-25] 그러나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만큼 고구려군의 공격은 정명진의 누방도행군에게 집중되었을 것입니다.

[6-24]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61쪽.
[6-25]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6쪽.


예컨대 금석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용삭(龍朔) 원년(661), 요동의 죄를 묻는데, 누방도총관 정명진이 공(公)으로 하여금 행군병조(行軍兵曹)를 담당하게 할 것을 아뢰었다. (그리하여 양사선은) 군무에서의 꾀[軍謀]와 전투의 책략[戰策]으로, 많은 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큰 붕새가 비로소 이지러져, 하늘에 드리웠던 날개[羽]가 떨어지며, 큰 고기가 방향을 놓쳐[方縱], 물결이 다하고 비늘이 말라 버렸다[暴]. 어찌하여 저 푸른 하늘은 옥나무[玉樹]를 꺾어 없앴는가. 춘추 58세에, 그해 10월 16일, 군중에서 죽었다.
龍朔元年, 問罪遼東, 鏤方道總管程名振奏公充行軍兵曹. 軍謀戰策, 多所決勝. 大鵬始騫, 垂天墜羽, 巨魚方縱, 窮波暴鱗. 如何彼蒼摧殘玉樹. 春秋五十有八, 以其年十月十六日, 卒於軍所.
- 「양사선묘지(楊師善墓誌)」 -
위 사료에 따르면, 누방도행군의 행군병조로 활약한 양사선은 대붕의 날개가 떨어지고 거어의 비늘이 마르는 듯한 사건을 만나 군중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대붕과 거어의 비유를 통해 당시 누방도행군에 모종의 재난이 닥쳤음을 알 수 있죠. 이러한 서술은 661년 10월 중순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누방도행군이 위기에 처하고, 양사선이 전사한 사실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결과로 보입니다.[6-26]

[6-26]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6쪽.


물론 양사선은 10월 16일에 사망하였으므로 고구려군의 공격이 반드시 장잠도행군과 부여도행군의 회군 이후에 벌어졌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명진 역시 662년이 되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나므로[6-27] 요동에 홀로 남은 정명진군이 고구려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론할 여지는 충분합니다.[6-28] 또한 정명진은 수당교체기부터 대고구려전까지 크게 활약한 무장임에도 단독 열전이 없이 아들 정무정의 열전에 편입되어 있으며,[6-29] 2차 고당전쟁 중 누방도행군의 전투 기록 자체도 사서에서 모두 누락되어 있는 점[6-30]이 주목됩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정명진은 고구려군에 대패해 전사하였을 공산이 크며, 이를 숨기려는 의도에서 관련 기록들이 소략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6-31]

[6-27] 『舊唐書』 卷83, 列傳33 程務挺.
[6-28]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8쪽.
[6-29]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4쪽.
[6-30]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8쪽.
[6-31]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8쪽.


평양 공성의 지속: 12월 공세와 교착

한편 누방도행군뿐 아니라 평양도행군, 패강도행군, 옥저도행군 역시 철륵의 반란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전선에 잔류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3개 도행군의 안전한 철수를 위해 소정방 등이 평양 포위를 유지했다고 보기도 합니다.[6-32] 그러나 이미 정명진군이 동일한 목적으로 요동에서 고구려군을 견제하고 있었으므로, 이것이 잔류의 근본 목표였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후 당군이 평양성을 적극적으로 공격한 것[6-33]으로 보아, 당군이 포위를 유지한 주된 이유는 645년부터 공들인 평양성 함락이 철륵을 격파하는 것보다 더 큰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6-34]

[6-32] 김병곤, 「661~662년 당 수군의 평양 직공책의 전략과 한계」, 『한국사학보』 50, 2013, 61-62쪽.
[6-33] 『日本書記』 卷27, 天智天皇 7年 12月.
[6-34]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4쪽.


이렇게 계속된 평양성 일대에서의 전투는 661년 12월에 이르러 더욱 치열해졌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왜국에 방문한 고구려 사신은 다음과 같이 평양의 전황을 전했습니다.

12월에 고려(高麗)가 말하였다. “유독 12월에는 고려국에 추위가 심해 패강이 얼어붙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운거(雲車)・충팽(衝輣)을 동원해, 북과 징을 치며 공격해 왔다. (그러나) 고려의 사졸들은 용감하고 씩씩하여, 다시 당나라의 두 진지[壘]를 빼앗았고, 오직 두 요새[塞]만이 남았으므로, 이 역시 밤에 빼앗으려고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당나라 병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울어서,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요새를) 빼앗을 수 없었다.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十二月, 高麗言, “惟十二月, 於高麗國, 寒極浿凍. 故唐軍, 雲車衝輣, 鼓鉦吼然. 高麗士卒, 膽勇雄壯, 故更取唐二壘, 唯有二塞, 亦備夜取之計. 唐兵抱膝而哭, 銳鈍力竭, 而不能拔. 噬臍之恥, 非此而何.”
- 『일본서기』 권27 -
위 사료에서 당군이 동원한 운거와 충팽은 높은 망루나 사다리가 설치된 수레로, 공성병기의 일종입니다.[6-35] 당군은 한파로 인해 대동강이 얼어붙자 기존에 공방이 벌어지던 평양성 서북면뿐 아니라 대동강으로 둘러싸인 동남방으로도 대대적인 공세를 편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군수물자 부족과 전투 피해 누적, 한파 등으로 인해[6-36] 당군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오히려 고구려군이 역습에 성공하여 2개의 진지를 빼앗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로써 당군의 상황은 더욱 어려워진 것으로 보입니다.[6-37] 다만 고구려군도 당군의 요새까지 함락하지는 못하여 평양에서의 교착 상태는 지속되었습니다.[6-38]

[6-35]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0쪽.
[6-36]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84쪽.
[6-37] 서영교,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문화』 8, 2023, 310쪽.
[6-38]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85쪽.


이때 고구려군이 빼앗은 당군의 진지[壘]는 한자의 의미상 평야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고, 빼앗지 못한 요새[塞]는 방어시설이 갖추어진 험지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6-39] 그렇다면 고구려군은 앞서 언급한 적두산성 및 청암리토성의 함락에는 실패하였으나, 평양성 전면에 구축되어 있던[6-40] 당군의 진채들은 무너뜨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전과는 당군의 평양성 포위를 일부 형해화시킨 것으로 평가됩니다.[6-41] 당군의 압박이 이완되었기에 고구려가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전황을 전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6-42]

[6-39] 이상훈, 「제2차 고당전쟁기(661~662) 사수 전투의 전개 양상」, 『북악사론』 17, 2023, 156쪽.
[6-40] 서영교, 「고구려의 最後와 彗星」, 『진단학보』 138, 2022, 51쪽.
[6-41] 장창은, 「660~662년 고구려와 신라 · 당의 전쟁」, 『신라사학보』 38, 2016, 92쪽.
[6-42] 이민수, 「661년 고구려-당 전쟁의 전황」, 『군사』 122, 2022, 238쪽.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사료 또한 주목됩니다.

백주(白州) 사람 방효태(龐孝泰)는, 남만의 추장[蠻酋] 출신으로 범상한 자였는데, 병사를 거느리고 고려 정벌에 나아갔다. 적은 그가 약함을 알고 습격하여 깨뜨렸다. (그런데) 허경종은 그에게 보화(寶貨)를 받아서, 방효태가 적을 자주 격파하여 수만 명을 참획했으며, 중국의 장수[漢將] 중 날래고 튼튼한 자로는 오직 소정방과 방효태만 있을 뿐이고, 조계숙과 유백영은 모두 그 아래라고 말하였다. (허경종이) 헛된 미를 쫓고 악을 감추어준 것[虛美隱惡]이 이와 같았다.
白州人龐孝泰, 蠻酋凡品, 率兵從征高麗, 賊知其懦, 襲破之. 敬宗又納其寶貨, 稱孝泰頻破賊徒, 斬獲數萬, 漢將驍健者, 唯蘇定方與龐孝泰耳, 曹繼叔・劉伯英皆出其下. 虛美隱惡如此.
- 『구당서』 권82 허경종전 -
위 기록에 따르면 방효태는 고구려군에게 격파된 뒤 허경종에게 뇌물을 주어 거짓된 평판을 쌓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방효태는 645년과 661~662년에만 고구려 원정에 참여하였으며, 허경종전에서 뛰어난 장수로 거론된 소정방은 657년 서돌궐을 대파하면서 명장의 반열에 올랐지요.[6-43] 따라서 허경종전에서 거론하는 방효태의 패전은 2차 고당전쟁 당시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효태는 패전 이후에도 허경종에게 뇌물을 보내는 등의 활동을 하였으므로, 위의 패전이 방효태가 전사한 사수 전투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허경종전의 기록은 661년 12월 고구려군에 의해 방효태가 진지를 함락당한 상황을 나타낸 것일 공산이 큽니다.

[6-43]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95쪽.


누방도행군의 전선 이탈

한편, 평양의 당군이 악전고투하던 겨울 무렵에는 요동의 정명진군도 고구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정명진은 고구려군에 의해 전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신·구당서는 공통적으로 정명진이 662년에 사망했다고 언급합니다.[6-44] 또한 금석문을 참고하면 662년 당시 당나라의 낙랑도총관이었던 남곽생(南郭生)이 구제(九梯, 읍루)와 숙신(肅愼)을 제압하였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6-45] 고당전쟁에서 숙신계 말갈은 주로 요동 전선에 동원된 만큼, 662년 요동에서도 당군과 고구려군 간 전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6-46] 그렇다면 정명진의 사망은 이러한 전투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6-47]

[6-44] 『舊唐書』 卷83 程務挺傳; 『新唐書』 卷111 程務挺傳.
[6-45] 「南郭生墓誌銘」, “時當犯塞, 方事從戎, 卽以龍朔二年, 樂浪道征. 功參百戰. 遼海息其祅氛, 威懾九梯, 肅愼貢其楉矢.”
[6-46]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3-104쪽.
[6-47]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8쪽;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4쪽.


물론 기록의 부족으로 인하여 661~662년의 겨울에 누방도행군의 상태가 정확히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662년이 되었다는 것은 늦어도 661년 11월에는 회군을 시작했을 소사업군과 아사나충군 등이 (2개월이 경과하여) 고구려 경내를 벗어났다는 뜻이므로, 이미 양사선 등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은 누방도행군이 더 오래 요동에 머무를 뚜렷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명진까지 사망하였다면 남은 누방도행군은 고구려군에게 전멸당했거나,[6-48] 그렇지 않았더라도 총관의 사망 등을 명분 삼아 철수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6-48] 김용만, 「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ㆍ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 『고구려발해연구』 29, 2007, 276쪽.


대반격의 여건이 마련되다

이러한 정황을 인정한다면, 662년 초에 이르러 누방도행군의 위협이 사라지게 되는 상황은 요동의 고구려군이 평양 지원을 개시할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6-49] 앞서 살펴보았듯 당시 평양성은 사신이 출입할 수 있는 상태였으므로, 요동과 평양 사이에는 연락이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양의 연개소문은 요동의 병력을 가능한 한 신속히 남하시켜 이들과 함께 평양성 앞의 당군을 격파하고자 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6-50]

[6-49] 이민수, 「662년 고구려의 평양성 전투와 임진강 전투 재구성」, 『한국고대사탐구』 41, 2022, 104쪽.
[6-50]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96쪽.


이렇게 보면 661년 12월 이후 한동안 교착 상태를 지속하던 고구려군이 662년 2월에 돌연 대공세를 감행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고구려군은 수성 측이었으므로 당군보다 각종 고충이 덜했고, 요동에서 새로운 병력이 증원되기까지 하여 전력이 상승한 상태였습니다. 반면 당군은 오랜 보급 차단과 고립, 전투 피해, 한파 등으로 인해 사실상 한계에 달해 있었지요.[6-51] 살수에서 그러했듯이,[6-52] 사수에서 대첩을 거둘 조건은 이로써 무르익었던 것입니다.

[6-51] 서영교, 「唐高宗 百濟撤兵 勅書의 背景」, 『동국사학』 57, 2014, 336-337.
[6-52] 김용만, 「2次 高句麗 - 唐 戰爭(661-662)의 進行 過程과 意義」, 『민족문화』 27, 2004, 186-187쪽.


요동 전선이 일단락되자, 고구려는 평양 전선의 종결을 강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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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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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부끄러움이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고구려의 기상이 느껴지네요. 당시 천하 최강국이 쳐들어왔는데, 잘 막아낸 건 당연한 거고 저 요새 다시 못 빼앗아서 부끄럽다니....숙연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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