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세이입니다.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읽고 썼습니다.
part1 (
https://pgr21.co.kr/freedom/100216)
part2 (
https://pgr21.co.kr/freedom/100220)
part3 (
https://pgr21.co.kr/freedom/100230)
과 이어집니다.
마지막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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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의 입주자들은 얼마나 닮았는가 part3 (『종의 기원담』)
-김보영의 『종의 기원담』을 읽고 (下)
<3-3> 김보영, 『종의 기원담』 3부
로봇 케이는 로봇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척결했지만, 많은 로봇이 이를 원치 않습니다. 인간교도가 된 로봇들은 유기사원을 건설하여 인간에게 제를 올립니다. 환경청장이 된 케이는 오염된 자연을 회복시키기 위해 부청장 제논과 함께 일합니다. 제논은 특수한 가루(제초제)를 분사하는 관을 가지고 있는 로봇으로 유기생물의 활동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유기생물이 등장하기 전에는 쓸모없는 로봇 취급을 받던 기종이었지요.
인간이 등장한 이후 인간과 유사한 형상은 물론, 유기물에마저 이상 반응을 보이는 인간중독 증상이 로봇 사이에 퍼집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특별히 중요도가 높아진 로봇군이 있는데, 이들은 신체에 작은 구경의 철제 파이프가 있는 모델입니다. 이 로봇들 역시 인간에 다량 노출되면 정신 손상이 오지만, 인간중독에 일정한 면역이 있습니다. 인간 등장 이후 로봇 사회는 인본주의자와 로봇원리주의자가 갈등하게 됩니다. 케이는 로봇 공동체의 생존을 위해 유기생물과 끊임없이 사투를 벌입니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다시 그 정점의 존재를 만납니다.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여전히 인간을 모시는 로봇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케이의 동료였던 세실을 계승합니다. 로봇 아연은 말합니다. “말년에 세실께서는 교육을 강조하셨습니다.”(256) 세실은 칼스트롭 연구소가 신들을 ‘숭배함으로써’ 도리어 학대했다고 판단합니다. 알고 보니 인간은 완전무결하거나 이상향의 극치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로봇이 사랑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인간을 전지전능하고 절대적 선이라고 규정한 것 자체가 오만이었습니다. 세실은 사랑을 위해 자신들이 해야 하는 일은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좋은 인간’이 되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세실은 인간을 학살한 케이를 탓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오만을 성찰합니다. 인간의 투정 따위로 노만을 죽게 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이 일은 케이 히스티온이 인간을 유해한 생물로 판단한 결정적 사건이었지요.
케이가 다시 만난 인간은 로봇에게 교육받은 인간입니다. 생존을 현명하게 추구하는 ‘좋은 인간’인 것이지요. 이 좋은 인간은 인간종이 로봇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인간은 로봇에 비해 한없이 연약하고, 지구의 환경 역시 적대적입니다. 로봇 중 단 한 명만 저항할 수 있어도 인간은 절멸합니다. 그렇기에 케이에게 협정을 맺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케이에게는 이것이 기만이자 함정입니다. 로봇의 내면에는 인간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본능이 심겨있습니다. 로봇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절멸하려고 했던 케이조차도 끊임없이 이 본능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케이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너희의 존재가 우리의 자아를 위협하는 이상 우리가 공존할 길은 없어.”(276)
과학철학자 장대익은 『공감의 반경』에서 인지적 공감의 확장은 ‘접촉’과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중대한 전제가 있습니다. 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면 오히려 편견을 증폭시키고 적대감을 불러옵니다. 가장 우선하는 단서는 두 집단이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로봇 케이는 인간이 자신들의 자아를 위협하기 때문에 공존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는 로봇을 복종시킬 수 있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예외가 인간의 멸절 가능성 그 자체가 됩니다. 이러한 배타적 상황에서 인간 대표자 시우는 말합니다. 케이와 함께 온 환경청의 로봇들과 그동안 자신을 모셔 왔던 로봇 모두에게 말입니다.
“이 명령을 여러분이 아는 모든 로봇에게 전하세요.(…) 이 명령은 영원히 철회되지 않으며,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었고 앞으로 들을 모든 명령에 우선합니다.(…) 이제 로봇은 다시는(…) 인간의 어떤 명령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로봇류와 인간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291~297)
이것은 로봇 시대에 새로운 복음이 됩니다. 시아는 자신이 로봇에게 이득이 되는 인간이라는 점을 케이에게 어필합니다. 로봇에게 ‘인간의 명령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릴 인간이 살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아는 인간종을 배신하고 자신을 신으로 모시는 로봇의 기대를 저버리면서 당면한 죽음 앞에서 살아남습니다. 공생을 택합니다.
장대익은 서로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두 집단이 서로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친밀하고 다양한 접촉이 인지적 공감을 확장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로봇류와 인간종은 이러한 활동을 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장대익은 상위 목표를 이루기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도 역설하는데, 이들에게도 시급한 당면 과제가 있습니다. 바로 지구입니다.
<3-4> 김보영, 『종의 기원담』: 로봇과 인간 그리고 지구
로봇은 인간의 도구로 만들어졌지만,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인류가 멸절하자, 지구행성의 지배류가 됩니다.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들은 상호 협력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고, 이것은 인류가 멸절한 후에도 발전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릿수 평등 놀이입니다. 로봇은 기종마다 고유한 넘버가 붙어있습니다. 전등불만 달린 로봇, 제초제를 뿌리기 위한 로봇부터 인간과 흡사한 범용 로봇까지 다양합니다. 따라서 기종마다 시력과 청력을 포함한 감각기관이 다릅니다. 이들은 각자의 감각기관을 공유기를 통해 공유하는데 이를 자릿수 평등 놀이라고 합니다.
이것보다 흥미로운 문화는 서로의 덮개를 여는 것입니다. 로봇이 덮개를 여는 행위는 내부 전선과 기관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해칠 의도가 없고 신뢰한다는 뜻을 나누는 의식이 됩니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냄으로써 도리어 협력의 규모를 확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인류의 ‘협력적 눈 가설(cooperative eye hypothesis)’을 떠올리게 합니다.(장대익, 『울트라 소셜』, 휴머니스트, 2017, 2장.)
인간은 독특한 눈을 가지고 있는데, 투명한 결막과 흰 공막을 가진 유일한 종입니다. 이런 조건은 눈의 윤곽과 눈동자의 위치를 명확하게 드러내므로 위험합니다. 다른 영장류들은 인간과 비교해서 신체 대비 눈의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공막이 갈색이기에 눈동자를 추적하기 어렵게 진화했습니다. 협력적 눈 가설에 따르면 오히려 인간의 이러한 취약성, 즉 흰 공막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이것이 상호 협력을 촉진했다고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시선이나 마음이 눈을 통해 쉽게 노출되는 개체일수록 낯선 타자에게 신뢰를 얻기 쉬웠고 협동 구성원이 되기 용이했다는 것입니다.
로봇과 인간이 동등하게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신세계에서는 서로의 취약성을 공유하여 신뢰를 쌓는 새로운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직면한 취약한 상태는 지구 환경 그 자체입니다. 『종의 기원담』의 성취 중 하나는 지구를 사건이 일어나는 단순 배경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의 조건 자체가 된다는 점입니다. 로봇중심주의적 관점에서 세계를 다루어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을 성찰했던 이 작품은, 나아가 지구는 무엇인지 묻습니다.
작품 초기부터 케이는 환경오염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 오염은 로봇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조건을 말합니다. 칼스트롭 연구소에서 시도했던 유기생물의 생장이 번번이 실패했던 이유는 로봇에게 이로운 조건인 작금의 지구 환경이 유기물에게는 치명적인 탓입니다. 로봇에게 물과 산소는 유해합니다. 몸을 녹슬게 하기 때문입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엔진이 너무 뜨겁게 되면 로봇은 버티지 못합니다. 하지만 로봇에게 최적화된 지구 환경은 인간을 비롯한 유기생물에게 극악의 조건입니다.
로봇 케이는 자신들이 지구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계도 감지합니다. 그 한계는 지구의 변화 그 자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기오염의 자연 증식이 점점 지구 곳곳에서 보고된다. 어디에서는 점균이 이상 발생하고 어디에서는 지의류가 대량 증식한다. 그 긴 세월 로봇의 점령과 침공을 묵묵히 견뎌내던 지구는 마침내 역습을 시작했고 로봇의 힘으로는 그 기세에 저항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198)
지구의 역습을 맞으며 케이는 깨닫습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오염과 환경 파괴는 지극히 로봇중심주의적 생각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염으로 뒤덮인 생물, 오염을 먹고 사는 생물. 오염을 필요로 하고, 오염을 퍼트리는 생물. 자연의 반동은 점점 힘이 붙고 있고, 지구는 굳은 몸을 뒤틀며 제 몸에 뒤덮인 콘크리트를 뜯어내려 한다. 세상에 로봇이 존재하기 이전의 환경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매년 기후는 격변하고, 이제 한낱 로봇의 힘만으로는 그 기세에 저항할 수 없어 보인다. 지구는 이제 지긋지긋해진 이 무단거주자들을 버리고 신선한 새 세입자를 원하는 듯하다.”(304)
이 고백은 로봇의 것이지만, 21세기 초를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도 적용됩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된 야생 박쥐가 서식지를 인간 거주 지역으로 옮기면서 발생한 전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바로 그것이었지요. 『종의 기원담』에서 로봇이 구축한 환경은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인간에게 필요한 환경은 로봇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렇기에 함께 살고자 선택한 이들은 서로의 생존 조건을 가늠하여 새로운 생태계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취약성을 최대한 노출해야 가능한 일이며, 무엇보다 지구 행성이라는 조건 자체에 대한 성찰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로봇과 인간의 관계, 나아가 앞으로 등장할 지구 행성의 다양한 주민과의 새로운 만남이 인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구의 지배종으로서의 인간 혹은 지구의 지배류로서의 로봇은 착각입니다. 이 모두는 지구 행성의 세입자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