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3/07/10 12:00:36
Name 두괴즐
Link #1 https://brunch.co.kr/@cisiwing/16
Subject [일반] 소 잡는 섭태지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 에세이) (수정됨)
소 잡는 섭태지
-맨 정신의 수학여행



고등학생 시절 나의 별명은 섭태지였다. 필명으로 최우주를 쓰고 있지만, 본명은 섭이다. 그러니까 섭태지라는 별명의 ‘섭’은 뼈대 있는 가문이라 믿었던 집안 어르신이 우리네 자식들에게 ‘섭’자 돌림을 붙인 탓이다. 그 많던 상놈은 어디 가고 양반 족보만 남았더냐. 그래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딴 게 다 뭔 의미가 있냐?”라고 일갈했던 가수를 좋아했다.



나는 평소 그리 눈에 띄지 않았던 아이로 혼자 엎드려 서태지 음악을 듣곤 했다. 그 10분의 쉬는 시간을 위해 50분의 수업 시간을 버텼다. 열심히 가르치던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유감이겠지만, 학생의 태반이 그랬다. 그러니까 시대유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교육 활동의 하나로서 교사의 인솔 아래 실시하는 여행. 학생들이 평상시에 접하지 못하는 자연 및 문화를 실지로 보고 들으며 지식을 넓히는 목적의 여행. 그게 수학여행이라 던데, 정말?



거기서 뭘 배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뭘 했는지는 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담임선생님은 우리를 모아 둥그렇게 앉혔다. 술을 돌렸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안 마셨다. 그러다 잤으면 딱 좋았을 텐데, 선생은 노래를 부르자고 했다. ‘뭔, 노래?’랄 것도 없이, 시계 방향으로 진행시켰다. 그러니까 열외는 없는 것이다. 선생도 불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여긴 숙소였고 방이었고 아무것도 없었고, 우리만 있었다. 정적이 가득 찬 방에는 목소리만 있었다.



선생의 추억 만들어 주기 프로젝트를 어떤 친구들은 반겼고, 또 어떤 친구들은 ‘전부다?’했는데, 나는 이런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자, 시작!”이라는 선생의 신호에 ‘제정신인가?’했는데, 나만 맨 정신이었다. 하나, 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다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이탈자가 나오길 기도하며 도망칠 궁리를 했다.



때는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시절, 그야말로 가요계는 대소몰이의 시대였다. 그 소몰이의 충직한 상놈이 남자고등학생이었는데, 우리 반도 별 수 없었다. SG워너비, 바이브, 먼데이키즈, 박효신, 휘성, 브라운아이즈의 백성들이 정적을 소 울음소리로 채워갔는데, 그건 반장도 주번도 부반장도 볼보이도 마찬가지였다.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는 애들의 테스토스테론 성대는 우리 방을 소들로 점점 채웠고, 내 차례가 왔을 때는 목장이 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노래 부르기 보이콧을 하는 애들은 없었고, 다들 목동이 됐다.



나로서는 소 때문에 도망갈 수 없었고, 일어서기도 힘들었으며, 희박한 산소 때문에 호흡도 막혔다. 아마 질식하기 일보 직전이었기에 그랬다고 생각한다. 탄소배출권도 없는 소들이 방귀를 뀌어댔기 때문에 질러버렸다. 똥을 싼 놈도 있었다. 바야흐로 테스토스테론의 절정기였다.



남성 호르몬으로 가득 찬 환기되지 않는 방에서, 그러니까 부른다. 빌어먹을 ‘필승’을. 군대도 안 간 서태지가 빨간 머리를 하고 계집애 흉내를 내며 가성으로 부르던 그 노래. 나는 칠판에 손톱을 긁어댔고, 알루미늄 배트를 가지고 유리창을 깼으며, 망나니의 칼을 들고 기어이 소의 모가지를 쳤다. 놀란 눈의 소들이 자욱한 먼지를 피우며 입구를 향해 뛰쳐나갔고, 우리 방은 그야말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제정신인가?’하며 선생도 소들도 목동도 나를 봤던 것 같은데, 나는 맨 정신이었다. 정말 술을 마신 기억은 없다.



지렸다던 친구들이 여행을 다녀온 뒤 나를 섭태지라고 불렀다. 21세기에 20세기의 노래를 부른 나는 시대착오적인 소년이 됐다. 20세기 소년에게 21세기는 유감이다. 그런 유감의 시간은 또 오게 되는데, 몇 해 뒤 나에게 억지로 여장을 시킨 군대에서 이는 반복된다. 군인 아저씨가 되어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 그랬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23/07/10 12:20
수정 아이콘
난! 정말! 바보였어!
두괴즐
23/07/10 13:41
수정 아이콘
크크크
덴드로븀
23/07/10 13:45
수정 아이콘
몰랐었어!
살려야한다
23/07/10 13:17
수정 아이콘
아이고 재미나다
두괴즐
23/07/10 13:4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덴드로븀
23/07/10 13:45
수정 아이콘
[몇 해 뒤 나에게 억지로 여장을 시킨 군대에서 이는 반복된다]

두근두근 다음편이 기대되는군요! 크크크
두괴즐
23/07/12 21:46
수정 아이콘
헉. 군대 이야기는 쓸 생각이 없었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크크.
23/07/10 14:05
수정 아이콘
외가쪽 사촌들이 집성촌에 섭자돌림인데... 섭자에서 그나마 쓸만한 것들은 나이 많은 사촌들이 쓰고... 어린 친구들은 정말 쉽지 않은 이름들이 많았죠.

암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군령술사
23/07/10 17:35
수정 아이콘
저도 돌림자가 섭인데, 족보에만 그렇게 쓰고, 출생신고 등등은 그냥 다른 이름을 썼어요. 다행이죠.
23/07/10 19:43
수정 아이콘
자대배치받고 얼마지나지않아 고참들앞에서
필승을 부른뒤로 상병때까지 불렀습니다.
두괴즐
23/07/12 21:46
수정 아이콘
참 고역이었겠네요. 고생하셨습니다. 흑.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9166 [일반] 소 잡는 섭태지 (수학여행에서 있었던 일/ 에세이) [11] 두괴즐7039 23/07/10 7039 7
99165 [일반] 웹소설도 도파민 분비가 상당하군요 [109] 평온한 냐옹이14035 23/07/10 14035 3
99164 [정치] 백선엽 형제와 인천 교육기관 [31] kurt14308 23/07/09 14308 0
99163 [정치] 개각인사 김영호·김채환 '촛불집회 중국 개입설' 논란 [32] 베라히15658 23/07/09 15658 0
99162 [일반] [팝송] 조안 새 앨범 "superglue" [2] 김치찌개6545 23/07/09 6545 0
99159 [일반] <미션 임파서블: 데드 레코닝 PART ONE> - 충실한 계승(노스포) [26] aDayInTheLife10184 23/07/08 10184 2
99156 수정잠금 댓글잠금 [일반] 내기의 불쾌함의 원인은 가치를 투사할 수 없다는 점이다. [16] 노틀담의곱추10782 23/07/08 10782 2
99155 [일반] 탈모약 복용 후기 [50] 카미트리아11823 23/07/07 11823 11
99154 [정치] 판사님 "나는 아무리 들어도 날리면과 바이든을 구분 못하겠다 그러니 MBC가 입증해라" [98] 검사20799 23/07/07 20799 0
99153 [정치] 국힘, “민주당이 사과하면 양평고속도로 재추진 정부 설득” 외 이모저모 [152] 검사20524 23/07/07 20524 0
99152 [일반] 불혹에 듣는 에미넴 (에세이) [2] 두괴즐8099 23/07/07 8099 13
99150 [정치] 해군, 독도인근 훈련 예고했다가… 日이 이유 물은뒤 구역 변경 [47] 톤업선크림13433 23/07/07 13433 0
99149 [일반] GS건설 검단 아파트. 주차장 붕괴사고 조사 결과 발표 [107] Leeka11867 23/07/07 11867 11
99148 [일반] 뉴욕타임스 7. 4. 일자 기사 번역(리튬 확보를 위한 경쟁) [5] 오후2시9950 23/07/06 9950 2
99147 [일반] 지하주차장이 무너진 자이. 5~6년 입주 지연 & 보상금 8천 예상 [90] Leeka18511 23/07/06 18511 0
99146 [일반] [루머] 애플, USB-C 에어팟 프로 출시 예정 [17] SAS Tony Parker 11906 23/07/06 11906 0
99145 [정치] 박민식 "백선엽 장군 친일파 아니라는 데 장관직 걸겠다" [124] 덴드로븀15668 23/07/06 15668 0
99144 [정치] 원희룡 “서울 ~ 양평 고속도로 전면 백지화” [314] 검사26043 23/07/06 26043 0
99143 [일반] 삼성전자 vs 삼성후자 [93] 겨울삼각형15653 23/07/06 15653 2
99142 [일반] <보 이즈 어프레이드> - 혼란스럽고 당혹스럽다.(노스포) [14] aDayInTheLife8267 23/07/06 8267 2
99140 [일반] 21세기 데스메탈 명곡 다섯개 추천해봅니다. [16] 요하네9058 23/07/05 9058 11
99139 [정치] '윤석열차 영향?' 문체부, 학생만화공모전 후원 안한다 [108] Crochen15409 23/07/05 15409 0
99138 [정치] 통일교 교주: 기시다 총리는 교육받아야한다. [13] 기찻길10700 23/07/05 10700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