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업해 봅니다.
(17) 상식, 어디까지 알아 보셨어요?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나요?”
?
아트 첫 회의 때, 배경 원화가 였던 사람에게 들은 말이었다.
무슨 회의였냐?
10레벨 기준, 저 레벨 던젼 메이킹을 위한 설정 기획 리뷰 회의였다.
1~10레벨 대상으로 저 레벨들의 사냥터를 만들어야 하는 업무.
레벨 디자이너인 D와 상의해서 동선과 공간 구성을 짜고, 스토리와 캐릭터 설정을 하고
던전 컨셉과 환경 구성 등을 해서 기획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리뷰하는 날.
내 리뷰가 딱 끝나자마자 배경 원화가가 내게 한 말이었다.
“네? 무슨 상식…이요?”
“아니, 아트한테 말이죠. 이쁘게 만들어야 하는 사람들한테, 고블린, 슬라임, 이런 애들 튀어 나오는 숲 던전을 들이밀면서 이쁘게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냐구요.”
“아니, 상식...이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 저 레벨 구간이라 그런 몬스터들이 나올 수 밖에 없구요. 저 던젼이 있는 지역 식생이 숲과 초원, 들판, 이런 곳이니까 숲 던젼을 설정한 건데요. 특히 저기 나오는 핵심 NPC가 숲의 정령인…”
“아, 됐고. 그건 솔직히 고치면 되잖아요. 저렇게 만들면 ‘안’ ‘이’ ‘쁘’ ‘다’ ‘고’ ‘요’.”
…
아 눼. 그렇군요. 그럼 어떻게 고칠까요? 설정은 뭐 바꿀 수 있어요. 저 레벨 단계 특성만 맞춰 주시면 되요. 아 그리고 하나 더, 앞으로 가면 갈수록 센 느낌의 던젼이 나와야 하니까 (당연하잖아요? 레벨 대가 올라가니까) 그것 맞춰주실 수 있으신 거죠?
지금 짬이면 이렇게 해서 어르고 달래서 넘어갔을 것이다. (실제 지금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 크크크)
그런데 정말, 저 당시에는 말문이 턱, 막혔다.
무엇보다, 상식 이라는 말.
저게 상식이라고?
지가 알고 있는, 지만 느끼는 상식이 아니고?
저 때는 어렸고 (어려 봐야 삼십대 초반이라, 이십 대 중반이었던 원화가와 붙어서 뒹군 거라 나이 값 못한 건 맞지만 크크)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이 너무나 크게 왔기 때문에…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 뭐요 그럼? 5레벨 던젼에서 드래곤이라도 나와서 브레스 라도 쏴 드려야 하나?”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원화가의 말에 갑분싸 됐던 회의실은 그야말로.
얼어붙어 버렸다.
원화 팀장의 표정이 이상해졌고.
내 표정을 보던 레벨 디자이너 D가 어쩔 줄 몰라하기 시작했다.
다른 원화가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분위기만 살폈고 크크.
회의가 어떻게 끝났는지 기억은 잘 안 난다.
하나 확실한 건, 그 배경 원화가는
내가 퇴사하는 날까지 내 욕을 하고 다녔었다는 것.
그걸 내가 다 들을 수 있었다는 것. 왜?
나랑 친했던 배경 원화가가 다 해줬으니까 크크.
이런 상식?과 관련된 논쟁은 아주 많았다.
“아니, XX님. 기획서를 안 보시고 하셨다는 건 좀…”
“응? 아니 공염불씨, 상식적으로 말이 돼? 기획서가 20페이지야. 이걸 언제 다 읽어 보냐고?”
“네? 아, 기획서가 길긴 한데. (20페이지는 아니구요. 열두장에 표지 목차 하면 아홉장 정돈데...) 아 어쨌든 그래서 리뷰도 해 드렸고, 요약본도 써 드렸고, 추가 설명도…”
“아, 모르겠고. 내 상식으로 이런 기획서는 ‘쓰’ ‘레’ ‘기’ 예요. 그러니까 일루 와. 내 옆에 앉아서, 딱! 뭐하고 싶은 지 얘기해요. 해 달라는 데로 해 줄게.”
크크크
아주 좋은 분이었다. 친하게 잘 지냈고. 일도 많이 했다.
능력도 괜찮은 분이었고.
그런데, 말을 참 저런 식으로 했었다.
솔직히 되게 기분이 나빴지만, 그 순간 참고 웃으며 넘기고 일을 하니, 그 유산(?)이 돌아왔다. 주변 프로그래머들도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었고.
하지만 상식이라는 부분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회사는 그랬다. 자신들이 아는 상식과 다른 이들이 아는 상식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인 회사.
“나, 프랑스에서 유학한 사람이거든요? 엔진도 내가 R&D 더 많이 했거든요? D씨보다 더 많이 했다고.”
아트 쪽 선임이었던 분이 한 말.
“눼? 프랑스 유학이요?”
크크크
정말 회의 자리에서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저 선임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텃세를 부리기 시작했었다. 나이도 많았고 경력도 오래 된데다가 자신의 인맥으로 들어온 우군들도 상당 수 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에 더해 같이 지낸 세월의 힘과 같은 직군이라는 부분까지 해서...후우, 정말 회의는 물론이고 업무 논의를 할 때마다 와서 사사건건 시비를 놓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저 선임이 말하는 '상식'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냐? 경력이 없어도, 상식으로 생각해 봐라.
이런 말을 달고 살았다.
"아니, 이게 왜 베리에이션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거 베리친다고 다 될 거 같아요? 모델링이 안 어울리는데?"
"그냥 저 레벨 몬스터 던전에 들어갈, 길 막는 용도의 오브젝트라서요. 안 어울려도 상관없어요. 안 그러면 기믹으로 발주할까요?"
"그건 아니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잘 안 보인다고 중요하지 않다고? 안 어울려도 된다고? 너무 대충하는 거 아니에요?"
빠직. 대충한다고?
하지만 난 폭주하려는 D를 진정시키며 함께 말했다.
"여기 몹 잡고 이렇게 돌아가는데 10초도 안 걸리는 구간입니다. 스토리 적으로도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아요. 그냥 퀘스트 테스크 상 마릿 수 채우는 용도라니까요? 대충이 아니라, 여기는 '그''냥''아''무''거''나' 박아 놔도 되는 구간이라 이 말입니다."
"그럼 아무거나 박아 놓지, 이 석상을 왜 베리에이션 쳐달라고 하냐구요."
"아니, 그래서 애초에 바위로 막아 놨더니 태클 거신 거잖아요?"
그랬다. (사극 해설 톤)
애초에 우리는 이 구간이 뭐 오래 끌 동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D가 기존 오브젝트 중에서 짱 큰 바위로 막아 세팅해 놓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걸 선임이 보고, 말 그대로 '태클'을 건 것이다.
그런데
"그러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거 아니에요? 여기 유적 던전이라면서? 그럼 석상이든 기둥이든 뭐든, 그런 걸로 데코를 해야지, 바위가 갑자기 왜 나오냐고?"
"그러니까 석상 베리에이션을 쳐 달라고 말씀을 드린..."
"아니, 그런데 그 석상이 안 어울린다고!"
끄아아아!!!!!
정말 살의를 꾹꾹 눌러 참으며 간신히 한 마디.
"그럼 어울리는 석상이나 뭐 오브젝트 아무거나 베리에이션 쳐 주시면 안돼요? 그걸로 배치를 하면 될 것 같은데요."
"흠, 여기 크기에 맞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으으으.....
정말 매번 이런 식의 흐름이었다.
일을 할 때마다, 사사건건 이상한 논의들이 오고가고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이다 못해 인신공격에 가까운 날 선 말들이 오가는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었다.
정말 이제까지, 5년 정도의 짧은 경력이었지만 이렇게 힘들게 업무 논의를 진행하면서 일을 했던 적이 없었기에...진짜 거의 매일 D와 술을 퍼마셨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대 환장 파티는 한 쪽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
"눼? T...F....요?"
"네. 이번에 신규로 들어갈 던전에 새 전투 시스템하고 캐릭터가 들어가고 거기에 시나리오 퀘스트도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담당자들만 모아서 TF로 진행하려고 해요."
...
말은 좋았다. 말은.
물론 피엠(PM) 조직의 뜻은 이해가 갔다. 당시에도 지금에도.
오죽 업무 조율이나 논의가 안 됐으면, 이런 식으로 진행을 하려고 할까, 이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이 대환장 파티에 피엠이 낀다고 해서 회의가 매끄럽게 업무가 부드럽게 진행이 될 리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더 문제는....아 물론 내 입장에서.
업무 논의를 이제 '각개격파' 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면 예를 들어.
기존에는 고집 좀 있고 성격있고 아니면 문서 안 읽는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맞춤형으로 직접 업무 진행을 하고
거기에서 나온 결과물을 바탕으로 필요한 아트 리소스는 위에서 이야기한 대환장 파티가 진행이 되더라도 어쨌든 결과물을 뽑아서
두 개를 조립해서 어떻게든 일을 진행하면 됐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 말이 돼요? 뭔 리소스 제작 기간이 그렇게 오래 걸려?"
"원래 그렇거든요? 개발실이야말로 그거 없다고 구현을 못해요?"
"기획대로만 나오면 상관없지! 그런데 맨날 나오는 게 다르잖아요? 발사체 크기나 이펙트 범위 달라지면, 다 안 맞아서 다시 작업해야 하는데?"
"그건 기획이 잘못된 거 잖아요? 왜 우리 탓을 해요?"
"아니, 아니. 기획이 잘못됐다뇨? 우린 애초에 그거 크기 제한둔 거 아니거든요?"
"그게 크기가 문제예요? 지금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예요?" (개발실에게)
"크기는 예를 든거지. 그걸 이해 못해요?"(개발실이 아트에게)
"아니, 기획이 지금 그렇게 이야기 하잖아요? 그럼 뭔 소리예요?" (아트가 기획에게)
"뭐가 뭔 소리예요? 기획이 잘못됐다고 하니까 저희도 예를 든 거잖아요?" (아트가 기획에게)
끄아아아!!!!
결국 결론은 늘, 피엠이 '내가 이슈 사항을 정리해서 메일로 쏠 테니, 거기에 대해 답변을 달아주면 그걸 가지고 기획하고 같이 조율해서 다음 회의 때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겠다' 로 끝났다.
그럼 그거 정리하느라 시간은 시간대로 다 쓰고 업무는 진행이 안 된다.
그 동안 개발은 개발 따로, 아트는 아트 따로 각자 하고 싶은 (다행스럽게도 해당 TF, 그러니까 자기 작업에 맞추긴 하는) 작업물을 진행하는 거고.
그럼 그 다음 회의 때 보면, 결과물은 이상하고 조율한 이야기로 또 난상토론이 벌어지고 결론은 안 나고....
크크크.
이런 회의를 거치면서 꾸역꾸역 일은 어떻게든 진행이 되도록 했는데....당연히 속도도 느리고 결과물도 엉망진창이었다.
그 결과, 타 실 보고 때 우리 피디는 들어가서 개박살 나고 나오고.
한숨은 한숨대로 쉬면서, 이거 조율 못한 기획팀에게 좀 잘 해보라고 압박을 넣었다. (피디가 기획자 출신이라, 문제에 대해서 파악을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당시 경쟁자(?)였던 TD의 눈치로 인해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기획팀 탓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그동안 존재감없이 서포트만 해 주는 줄 알았던 TD가, 이제 슬슬 회의에서 기획을 질책하고 아트를 압박하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피디는 발끈했지만, 성과가 없으니 반박도 제대로 못하고 당하기만 했고.
일하기도 힘든데, 권력 구도 상에서 나오는 이런 피곤한 불협화음에 아주 정신이 없는 나날들이 이어지기 얼마. 어느 날 갑자기 AD가 퇴사를 한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할 즈음.
본격적인 정치 아사리 판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입사한 지 반 년이 조금 넘어간 이후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서막을 알린 것은, 정말 당연스럽게도
기획팀장 BG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