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별로 유행하는 '갬성'이 분명히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2000년대 중후반은 '투 머치(Too Much)'의 시대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IMF 경제 위기와 새로운 천 년이 온다는 두려움이 겹쳐 암울함과 음침함이 가득했던 '세기말 감성'이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지배합니다. 이후 시간이 흐르며 경제 위기의 여파가 어느정도 해소되고, 2002년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며 전 국민에게 긍정적인 기운이 다시 샘솟기 시작합니다. 인터넷의 대중화가 완료되고, '싸이월드'로 대표되는 초창기 소셜 미디어의 시대가 열리면서 사람들이 자신만의 감정과 개성을 마구 표출합니다.
도대체 노래방이 왜 저렇게 생겼는지 의아한 세기말 노래방
세기말 감성이 워낙 암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작용 탓인지, 2000년대 중후반은 뭐든지 '과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패션에서는 심플함이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남자가 멋을 부릴 때는 지금 기준으로는 하나만 착용해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페도라와 선글라스부터 이니셜 목걸이, 귀걸이, 부츠컷 청바지, 정장 구두 등을 모두 조합하여 입습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외출 시 옷의 색상은 무조건 화려한 원색 계열을 레이어드해서 입습니다.
이른바 '싸이 감성'이라 불렸던 감성들도 비범합니다. 힙합 프로듀서 코드 쿤스트가 말했던 것 처럼 이 시절은 '모두가 예술가이자, 시인' 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미니홈피에는 지금 기준으로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허세 가득한 문구들이 가득합니다. 가요계에선 감정을 쥐어 짜내는 소몰이 창법이 유행하고, 드라마식 뮤직 비디오에는 항상 애절한 비극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남성은 거칠고 불친절한 면이 있어도 내 여자에게는 한없이 따뜻하면서 한 여자밖에 모르는 허세 가득한 마초적인 이미지가, 여성은 엉뚱한 귀여움과 대비되는 섹시함까지 갖춘 사차원적인 이미지가 유행하였습니다.
'마눌', '남푠'이 넘쳐났던 이 세대가 훗날 저출산 시대의 주역이 될 줄이야...
이러한 당시의 감성들은 2010년대가 되면서 '중2병', '관심 종자'로 공격을 받으면서 점차 잊혀진 트렌드의 길을 걷습니다. 또한 대세 SNS가 자신만의 '감정 표현'에 최적화되어 있는 싸이월드에서 자신만의 '경험 표현'에 최적화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으로 바뀐 점도 2000년대 중후반 감성 소멸에 큰 역할을 합니다. 짤을 즐기는 유행도 지나치게 무겁고 오그라드는 '감성짤' 보다는 가볍게 즐기고 금방 잊혀지는 밈을 소비하는 트렌드로 바뀝니다.
구독자 수 157만 명의 개그 유튜브 채널인 『피식대학Psick Univ』의 '05학번이즈백' 컨텐츠는 당시의 2000년대 중후반의 감성과 유행을 충실히 표현하여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 시절 20대를 보냈던 세대에겐 추억 팔이와 공감을, 그보다 더 젊은 세대에게는 당혹스러운 당시의 촌스러움과 홀로 2020년대를 살고 있는 '민수'와 냉동된 듯한 캐릭터들의 괴리감에서 웃을을 얻습니다.
'05학번이즈백'의 주인공들. 좌측부터 정구, 재혁, 용남. 패션이 비범합니다.
'05학번이즈히어'는 '05학번이즈백'의 후속작 입니다. 주인공인 용남, 재혁, 정구는 2000년대 중후반 당시 껄렁껄렁하면서 나름 잘 나갔던 20대 청년에서, '신도시 아재들'로 진화합니다. 새로운 시리즈에서도 고증은 완벽합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당시 기준으로 최첨단 패션 아이템들만 골라 장착했던 이들은 현재는 201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스냅백과 깃을 세운 피케티, 그리고 조거 팬츠와 색동 나이키 운동화의 조합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이들에게 최신 트렌드의 곡과 춤들은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에스파'를 안다고 말은 하지만 딱히 취향은 아닌 듯한 어색함이 묻어 나옵니다. 예전엔 서울 한복판의 핫 플레이스들을 밤새 누비며 새로 생긴 가게들에만 갔었지만, 지금은 서울 교외의 '신도시'로 밀려나 언제든지 집에 빠르게 귀가할 수 있는 동네 호프집과 대형 아울렛 매장이 이들의 주요 스팟입니다. 과거엔 거침 없고 겁 없었던 청춘이었지만, 지금은 현실의 쓴 맛을 이리저리 맛보며 다들 묘하게 기가 죽은 듯한 모습입니다.
이처럼 '05학번이즈백'과 '05학번이즈히어' 모두 과거와 현재에 주변 어딘가에서 본 듯 한 인물들의 정확한 묘사가 공통점 입니다. 개인적으로 느끼는 두 시리즈의 다른 결을 꼽자면 '05학번이즈백'은 감성 추억 팔이에 비중을 둔 개그물이라면, '05학번이즈히어'는 특히 현재의 30대 후반~40대 정도라면 공감할 수 있는 공감 다큐의 면모를 더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05학번이즈백'에서 젊은 20대 청춘이었던 이들은 '간지'와 '최신 유행'이라는 공통된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서로 사소한 이야기 만으로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으며, 과한 감정 표출로 때로는 거칠게 싸우기도 하지만 또 금새 화해하기도 합니다. '신도시 아재들'이 된 이들은 '자영업자', '월급쟁이', '정체모를 사업가'로 각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요한 관심사는 각자의 먹고 사는 생계로 바뀌었으며, 당연히 직종이 달라 서로의 밥벌이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에 중간에 대화가 뚝뚝 끊기며 서로 자신의 폰만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대화의 주제에 따라 관심이 없는 사람은 겉도는 모습을 보입니다. 자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돌싱'인 정구가 겉돌며, 골프나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용남과 재혁은 큰 관심이 없습니다.
이처럼 공통된 관심사가 거의 없다보니 이야기는 결국 주식, 부동산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과거엔 주제에 대해 의견이 다르면 피 터지게 싸웠을 테지만, 이제는 뭐하러 굳이 서로 불편한 부분들을 건드리나 싶습니다. 용남과 재혁이 정치 이야기로 과열되자 정구가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라고 다그치니 금새 화제가 전환됩니다. 이처럼 '05학번이즈히어'는 현실 30대 중후반~40대 들이라면 친구들을 만났을 때 20대 때와는 묘하게 다른 어색함을 제대로 묘사한 것이 특징입니다.
만나서 대화보다는 자신의 관심사가 나오는 폰 화면을 쳐다보는 용남과 재혁
'05학번이즈백'과 '05학번이즈히어'가 결합하면 비로소 청춘의 빛이 완벽하게 표현됩니다. 불안했던 20대 시절을 보내고, 내 밥벌이와 안락한 가정, 각종 소유물들을 가진 연령대로 넘어왔지만 20대의 반짝임은 점차 희미해져 갑니다. 작은 것에도 재미와 감동을 느꼈던 20대를 벗어나니 웬만한 일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큰 감흥이 더 이상 없는 칙칙한 상태가 됩니다. 이처럼 금새 식상해질 수 있는 한계가 있었던 추억 팔이 개그물에서 30대 이상의 세대들의 삶에 대한 애환과 길지도 짧지도 않는 지나간 세월에 대한 뭉클함을 아우르는 현실 다큐 컨텐츠로 새롭게 생명력을 불어넣은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와 같이 두 시리즈의 성격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05학번이즈백'을 시청하지 않은 분들이라도 '05학번이즈히어'를 무난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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