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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08/11/05 03:57:24
Name 나무이야기
Subject [일반] 지젝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
1953년 7월 브레히트(Brecht)는 시위하는 노동자들을 해산하기 위해 스탈린 가(街)로 줄지어 향하고 있던 소련 탱크부대 옆을 지나면서 손을 흔들어 환호했고, 그날 밤 늦게 일기장에는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공산당에 가입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고 적었다(그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이는 브레히트가 그 잔인한 분쟁이 풍요로운 미래를 가져오리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도, 그런 희망을 내세워 그런 분쟁을 묵인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그렇게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던 가혹한 폭력이 어떤 진정성의 징표로 비춰졌고 또 그에 대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알랭 바디우가 20세기의 주요 특징과 동일시했던 "실재의 열망"에 해당하는 한 가지 모범적 사례가 아닐까? 19세기가 유토피아적이거나 “과학적인” 기획과 이상들을 꿈꾸고 미래를 설계했다면, 그와는 반대로 20세기가 겨냥한 것은 사물 자체가 나타나도록 하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갈망을 직접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20세기를 규정하는 궁극적 경험은 실재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다. 이때 실재는 일상의 사회적 현실에 대립하는 것이고, 이런 실재는 환멸을 낳는 현실의 층위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에 해당하는 극단적 폭력 안에서 경험된다.
일찍이 에른스트 융어(Ernst Juenger)는 일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일대일로 맞붙어 싸우는 육박전을 본래적이고 진정한 상호주관적 만남으로 찬미한 바 있다. 즉 진정성은 난폭한 위반의 행위에 있는 것이고, 라캉의 실재--안티고네가 도시 공동체의 질서를 어길 때 마주하게 된 사물(Thing) 자체--에서부터 바타이유적인 과도성에 이르는 많은 개념들이 이를 표현하고 있다. 성욕과 섹스의 영역에서 이런 “실재의 열망”을 담고 있는 아이콘은 오시마(Oshima)의 「감각의 제국」이다. 이 1970년대의 일본 컬트 무비에서 두 연인의 성애관계는 죽음에까지 이르는 상호 고문으로 과격화되고 있다. 실재의 열망을 표현하는 궁극의 형상(形象)은 극도로 노골적인 포르노 웹사이트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가령 여자 성기의 안쪽을 들여다보는 장면, 게다가 진입 중의 남자 성기의 머리에 설치된 소형 카메라의 눈으로 들여다보는 장면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지점에서는 어떤 전회가 일어난다. 욕망의 대상이 너무 가까이 다가오게 되면, 성적 매혹은 구토로 전환된다. 고기 덩어리의 실재 앞에서 구토하게 되는 것이다.
"실재의 열망"이 사회적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善意의 봉사”에 대립한다면, 그런 열망의 또 다른 형태는 쿠바혁명에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쿠바에서는 포기 승인장 자체가 혁명적 사건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경험'부과되고 있는데, 이는 정신분석에서 거세의 논리라 불리는 것에 해당한다. 쿠바의 정치-이데올로기적 정체성 전체는 충실한 거세(fidelity to castration)에 기초하고 있다(그러므로 지도자의 이름이 피델 카스트로 Fidel Castro라는 것은 하등 놀라운 일이 아니다!). 혁명적 사건의 이면에서 사회적 생활은 점점 더 무력증에 빠져들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나라 전체는 썪어가는 낡은 건물들과 더불어 잔뜩 찌푸리게 된다. 이는 혁명적 사건이 어떤 새로운 질서의 급작한 수립에 의해 "배반"을 당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혁명적 사건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 실증적인 사회적 환경의 수준에서 그런 동결현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또 이른바 근본주의적 테러라는 것도 역시 실재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1970년대 초반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독일에서 신좌파 학생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그 뒤를 이어 나오는 것들 중의 하나가 RAF 테러리즘(가령 바더-마인호프Bader-Meinhoff “갱” 등등)이었다. 이 테러리즘이 밑에 깔고 있던 전제에 따르면, 학생운동의 실패는 대중이 소비주의적이고 반-정치적인 환경에 너무 깊이 빠져 있고 그래서 정상적인 정치교육이나 의식화 작업을 통해 대중을 일깨운다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입증해 주었다. 이데올로기적 마비상태와 소비주의적 최면상태 등에서 잠자고 있는 대중을 흔들어 깨우기 위해서는 훨씬 더 폭력적인 개입이 있어야 하고, 가령 슈퍼마켓의 폭파 같은 직접적이고 난폭한 개입을 통해서만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 있음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물론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오늘날의 근본주의적 테러도 똑같은 논리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테러의 목적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고 마비상태에 잠들어 있는 서방 시민들을 일깨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슬라보예 지젝 강의 중 혁명과 열망,열정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선거가 어제 오늘 있었고 오바마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 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젝의 실제적 열망과 가상의 열망을 이해하기는 다소 어렵고 복잡한 면있지만
나름 통찰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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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rabbit
08/11/05 07:45
수정 아이콘
"다소" 어려우셨군요.
지젝이 쉽다고 하는 선배의 말을 듣고 한권 사서 봤지요.
어렵더군요.
그냥 그 선배가 똑똑하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ㅠㅠ
Carpe Diem
08/11/05 10:05
수정 아이콘
제 교양책 중에 영화 매트릭스를 철학적으로 해석해 쓴 책이 있는데 그 저자분들 중 한분이군요...
안그래도 철학이라 어려운데.. 덕분에 수업시간은 항상 무슨 내용인지 이해 못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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