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벌써 24번째 이야기가 되었네요.
이번주도 평일에는 시간이 없었는데 오늘 주말을 시작하며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제로 적는 “소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말이 안 될수도 있지만 너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성경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동감을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출애굽을 시작한 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결코
[속인 적]은 없습니다.
다만 그분은 신(GOD)적인 사고방식으로 나약한 인간들의 믿음 없음을 탓하며
[제발 날 좀 믿고 따라오라고] 강조합니다.
반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복이 오고 끝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뜻만을
[믿으며] 불확실한 내일(미래)를 인내하기엔 인간이란 존재는 너무 나약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연히 믿고 복 받는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 이라는 것이 너무 추상적이잖아요?
[믿음]으로 나아가면 결국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가운데서도 물과 양식을 허락해주시겠지만,
그게 언제인지? 어떤 방법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가 없고 그때 가 봐야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과연 내가 그걸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당장 아말렉과의 첫 전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으로 전투에 나아갔고 믿음이 강하면 전투에서 이길 것은 알았습니다.
그런데 강한 믿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구체적인 정답을 몰랐습니다.
시행착오 끝에 지도자 모세가 팔을 들어야 이기고,
팔을 계속 드느라 힘든 모세를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는 믿음을 보여야 이기는 정답을 찾아냈습니다.
하지만 그 정답을 찾아내기까지 많은 전투를 패배했으며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백성들이 믿음으로 쟁취한 영광스러운 승리였겠지만,
나약한 인간들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믿음에 충실하지 못하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공포의 시작이었습니다.
자신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며 행동할지 모르겠지만,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행동이라면?
---> 그 오답 행동으로 인해 바로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백성들은 느낍니다.
믿음만 충실하다면 걱정이 없겠지만 이 믿음이란 것이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존재이니 더 걱정입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공포로 인해 아리쏭한 하나님의 뜻을 찾느니
그냥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응답을 받는 모세에게 집착하며
모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모세에게 판결을 요청하며 하나님의 100% 정답을 기대합니다.
문제는 모세도 결국 사람이며 이때 이미 80살이 넘은 노인이었습니다.
200만명이 넘는 백성들이 매일 매일 사소한 문제부터 중요한 문제까지 모세에게 판결을 요청합니다.
당연합니다. 자기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해서 판단했다가 그게 오답이라서 죽거나 벌 받으면 어떡하라고요?
다들 목숨이 아까우니 자기 목숨 사리고 집요하게 모세에게 하나님의 구체적인 판단을 요청합니다.
이런 살인적인 송사 스케쥴로 인해 모세도 임시방편으로 일단 믿음이 뛰어난 자들을 선발해 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으로 세워 사소한 문제들은 이들에게 재판하게 하고, 자신은 중요한 문제만 재판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아니 애초에 전혀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백부장은 이게 사소한 문제라고 여겨 자기 선에서 판결하고 마무리 지었는데,
알고 보니 매우 큰 문제였고 해결방법도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르다면??
애초에 사소한 문제 or 중요한 문제라는 조건도 추상적이고 결국은 모세가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도 당연히 이런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분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신의 입장에서는
[그냥 헷갈리는 것 있을 때마다 나한테 물어보면 될텐데 그게 그렇게 어렵냐?] 이렇게 생각한건데,
문제는 인류 역사상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대면하여 얘기를 나눌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는 거죠.
때문에 하나님도 더 이상 추상적인 or 애매모한 발언을 안하시고
[최대한 구체적으로 명문화된 지시사항]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더 이상 모세에게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떤 믿음의 생활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을테니 그대로 따라 행동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렇게 모세 율법이 탄생합니다.
그럼 애초에 이렇게 정확한 율법이 있으면 편했을 텐데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태초 이후 모세의 시대가 되어서야 명문화된 율법을 만들려고 했을까요?
사실 명문화된 율법 (즉 성경책)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말씀 = 하나님 or 예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말씀은 sound이고 sound는 눈에 보이지 않고 기록될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녹음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정해진 특정 청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플러스/마이너스 or 좌/우를 모두 갖추신 완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성질이 불같은 사람에게는 온화한 말씀을 내리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불같은 용기의 말씀을 내리고
너무 정만 넘치는 사람에게는 과감히 칼로 엄격하게 판결을 명하는 말씀을 내리고
너무 무자비하게 옳고 그름만 따지는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이웃을 품으라는 말씀을 내립니다.
즉 그때 그때마다 청자의 상황을 잘 파악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 방식입니다.
반대로 이게 글로 작성되면 불특정 다수가 그 글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문구인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를
하나님께서 Sound 말씀으로 선포 하실때는 분명히 그 듣는 청자의 상황을 살펴보고
지금 이 말씀을 내릴 때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내릴겁니다.
하지만 이게 글로 작성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or 원하시지 않던 그 말씀을 모든 사람이
[볼 수 있습니다.]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 불같은 용기의 말씀만 읽는다면?
--->
[이교도를 무자비하게 죽이는 광신도가 됩니다]
정만 넘치는 사람이 사랑으로 이웃을 품으라는 말씀만 읽는다면?
--->
[사탄까지도 사랑하다가 결국 유혹에 넘어가 타락한 신앙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으로 읽을 수 있는 율법 = 성경책의 위험성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존재가 바로 이런 성경 문구를 편향대게 해석해 이단과 사이비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들도 성경을 매우 사랑하고 성경을 인용합니다.
다만 좌우의 하나님 말씀이 아는 그중에 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인용해 이단 & 사이비 교리를 만듭니다.
즉 애초에 율법 = 성경책만 없더라도 이단&사이비는 상당수 줄어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런 심각한 위험성이 있더라도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 인간들의 나약한 신앙 상태를 확인한 후 결국 명문화된 율법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율법이 단점도 있지만 어쨌든 나약한 백성들에게 눈에 보이는 확실한 존재가 필요했고,
또 잘만 사용하면 추상적인 sound 말씀보다는 훨씬 정확하게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장점도 있었습니다.
율법을 선포할 장소는 하나님의 산이라 불리던 성스러운 호렙산 = 시내산으로 정했습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광야에 있던 모세를 처음 부르시고 출애굽 임무를 내렸던 그 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율법의 위험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시내산에서 정말 과할 정도의 조심성을 보입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모세는
[1차]로 시내산을 올라갑니다.
시내산 정상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마음이 있는지”를 묻습니다.
시내산에 내려간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 한번 그들의 의사를 묻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모세는
[2차]로 시내산을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계명을 받기 전 백성들을 3일간 성결하게 하고, 그들의 옷을 빨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절대로 모세 외에는 시내산에 들어오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들어오면 죽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내려왔고, 백성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합니다.
셋째 날이 되자 하나님께서 드디어 시내산에
[강림] 하십니다.
이때의 시내산은 연기가 자욱하고 산에 불이 있고..... 자체 자연 BGM으로 나팔소리가 크게 울립니다.
이때 모세는
[3차로] 시내산을 올라갑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백성들에게 절대로 시내산을 올라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전에 이미 말씀하셨잖아요. 경계병을 세워 절대로 올라오지 말라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삼]” 이라고 답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한번 더 모세에게 백성들이 절대로 시내산을 올라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들에게
[시각적 &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상 처음 있는 상황입니다.
백성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편향되게 보일수 있는 단점을 가진 시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장면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실제 모습까지는 절대로 보이려고 하지 않는 --> 시각적으로 보여 지는 것을 극단적으로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는 다시 산을 내려가... (많이 왔다갔자 하죠?) 백성들에게 절대로 하나님의 실제 모습을 볼 생각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이제 거룩한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하나님께서는
이때 온 백성들에게 그 유명한
[십계명]을 하늘에서 음성으로 내리십니다.
이 십계명은 모세만 들은 것이 아니고 모든 백성들이 산 밑에서 들었습니다.
1.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2. 우상 만들지 말라
3.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4. 안식일을 지켜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도둑질 하지 말라
9.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이웃의 집, 모든 소유를 탐내지 말라
이 십계명을 선포하실 때 하늘에서는 천둥소리와 번개와 나팔 소리, 그리고 시내산은 연기가 가득 찼습니다.
아직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마치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이 끝이 아니라, 십계명은 단순 요약본이고, 이제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명을 선포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십계명만 들었을 뿐인데, 이미 하나님의 음성에 극도의 공포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 모세에게
[“추가 계명은 당신 혼자 산 위에 올라가서 들은 다음에 우리한테 알려주세요. 하나님이 우리한테 직접 말씀하지 못하게 해주세요. 우리는 이런 말씀 계속 듣다가 죽을까 겁납니다”]
물론 상상해보면 공포스러운 상황이긴 합니다.
연기로 가득 찬 산에 자연이 만든 자체 효과음으로 천둥&나팔소리가 크게 울리고, 번개가 계속 내리친다면?
그 공포를 이겨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결국 모세는 또다시
[4차]로 산에 올라 하나님의 추가 구체적인 계명을 들으러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이 씁쓸합니다.
백성들의 믿음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직접 음성으로 명확한 개명을 내렸고, 또한 자신의 영광도 직접 보였는데 그 결과는?
---> 백성들의 공포심만 더 키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실망스러운 상황을 보며 백성들에게 “앞에 말한 계명들 중에 특히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의 우상은 = 부처의 불상 같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형상화한 신상]을 말합니다.
아니 다른 신을 섬긴다는 것도 아니고 왜 하나님을 형상화해서 예배하는 것도 싫어하는 건가?
다시 강조하면
[시각적인] 형상은 결국 편향된 신앙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만드는 우상, 신상은 대부분 온화하거나 인자한 사랑스러운 모습의 형상이 많습니다.
하지만 신상 중에 보면 사람이 바로 죽을 것만 같은 공포스럽고 혐오스러운 모습의 신상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신이기도 하지만, 위에 보이듯이 백성들이 그 음성을 듣다보면 죽을 것만 같은 공포를 느끼는 무서운 분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은 때로는 백성들에게 사랑의 모습도 보여야하고,
때로는 백성들에게 죽음의 저승사자 같은 공포의 모습도 보여야 하지만,
우상&신상을 만들면 딱 그 하나의 모습만 강조되며 그것으로 인해 백성들의 신앙은 한쪽으로 치우쳐서 극단적인 길로 빠지게 됩니다.
한편 모세는 이런 상황속에서 혼자
[4차] 등산을 해서 하나님의 추가 계명을 듣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모세는 곧
[5차] 등산을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모세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세, 아론, 그리고 70명의 장로들도 함께 올라갑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느끼며 산에서 식사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모세는 운명의
[6차] 등산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이 직접 적으신 십계명 돌판을 주겠다고 하시며 모세 혼자 산에 다시 올라오라고 명령합니다.
모세는 이번
[6차] 등산에서 이전의 5번의 등산과는 뭔가 다른 느낌을 받습니다.
그래서 70인의 장로들에게 혹시나 문제 있으면 아론과 상의해서 해결하라고 부탁하며 자신은
[6차] 등산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6차] 등산 때 성경에서 묘사된 모세의 등산 장명이 의미심장합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시니라
산 위의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 자손의 눈에 맹렬한 불 같이 보였고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즉 백성들이 보기에 모세는 이런 불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전 5번의 등산은 그냥 평범한 등산이었지만, 이번에는 누가 봐도 위험한 불속으로 입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전 5번의 등산은 모세가 매우 빠른 일정으로 올라갔다 내려왔지만,
이번
[6차] 등산은 모세가 위험하게 입산하더니 몇 일이 지나도록 내려오질 않았습니다.
백성들은 이 급작스러운 사태에 매우 불안했지만 그래도
[믿음]으로 모세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집트 10가지 재앙을 모두 목격했고, 홍해 기적도 체험했으며,
광야에서 물이 나오는 기적,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무려 40일간이나 기다립니다.
[성경속의 이야기는 언제나 똑같은 문제입니다.]
미래 일의 정확한 시간과 결과를 알고 있다면 인내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순종일 뿐이지 믿음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종말의 정확한 날짜를 알고 있다면?] 믿음에서 탈락하는 기독교인은 아무도 없을겁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종말의 정확한 날짜를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미래에 탈락하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모세가 이전 5번의 등산과는 달리 6번째 등산에서 무리하게 입산하다 갑자기 행방 불명 되었으며 40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습니다.
모세가 만약
[6차] 등산 전에 백성들에게
“이번 등산은 40일 걸릴수도 있음” or "이번 입산에서 나 죽을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하삼“
이렇게 말했다면 백성들은 당황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그 출애굽을 이끈 위대한 지도자 - 모세가 갑자기 행방불명 되자 백성들은 동요합니다.
백성들만 동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름 모세가 믿고 뒤를 맡겼던 모세의 형
[아론]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은 받고 싶고,
그런데 뭔가 추상적이고 아리쏭한 하나님의 말씀과 권능은 무섭고,
그래서 눈에 확실히 보이는 모세만 의지해서 하나님의 정답을 알아내서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갑자기 모세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죽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모세를 대신할 눈에 보이는 확실한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모세의 형 아론은 최악의 판단을 내립니다.
다음 시간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