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성경 이야기.
오늘은 18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주제로 적는 “소설”입니다.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말이 안 될수도 있지만 너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성경 세계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에 동감을 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2대 바로왕과 이집트 백성들이 왜 이스라엘 민족들을 괴롭혔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분이 댓글에도 남겨주셨는데 사실 이들의 관계는 현대 시대의 이슬람 난민 문제와 꽤나 비슷합니다.
왼쪽을 이집트 & 유럽이라고 생각하고 vs 오른쪽을 당시 이스라엘 민족 & 현대의 이슬람 난민으로 생각하면
선진국 국민 vs 후진국 이방인
이방인을 포용하려고 했음 vs 스스로 고립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본토인과 어울리지 않고 생활.
처음엔 다수였으나 인구가 늘지 않고 저출산 vs 처음엔 소수였으나 인구가 무섭도록 증가.
나라의 기반이 되는 산업에 종사 vs 제대로 된 일은 안하고 마약&범죄류의 지하경제에 종사 (이집트인은 목축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있었음)
이렇게 여기면 당시 2대 바로왕과 이집트 백성들이 이스라엘 민족들을 왜 싫어했는지 알만 하겠죠?
PGR에서도 당시 이슬람 난민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PGR 여론은 당시 난민에 대한 비난에 좀 더 기울기는 했지만 그래도 양쪽 다 참작할 만한 이유는 있었습니다. (물론 결론은 영국 나쁜XX??)
인간 세계에서도 해당 비슷한 상황은 선과 악을 확실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자신에게 이득 되는 방향으로 여론을 이끌어 가는 것이고 그 누구도 그것이 절대 선이고 절대 악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께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 하십니다.
그것은 신앙적으로 옳고 그르게 볼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400년의 시간 안에 이스라엘 인구를 충분히 늘려서 다시 가나안 땅에 복귀하는 것
--> 그것 하나였고 그것만이 성경 세계관에서는
[선]이었습니다.
반대로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은 성경 세계관에서는
[악]입니다.
하지만 2대 바로왕은 핍박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인구가 느는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기적을 보면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는 결국 선을 넘어 이스라엘 모든 남자 신생아를 죽이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들은 대부분 신앙이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이 깊었다면 애초에 요셉이 1대 바로왕에게 알아서 기었던 것처럼, 그들도 2대 바로왕에게 최대한 겸손히 행동했을 것입니다.
흔희들 기독교인들은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면 안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정확히는 그때 그때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면 타협하지 말아야하고, 하나님의 뜻이 다른 곳에 있다면 타협해야 합니다.
지금 이집트 400년 기간의 하나님의 뜻은 = 이스라엘 인구를 늘리고 400년 후에 이집트의 땅을 버리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셉은 1대 바로왕에게 충성하면서
[적절히 타협하며] 이집트 최고의 파트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뒷 세대의 이스라엘 민족들은 살기 좋은 이집트의 고센 땅에 계속 정착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 야곱의 장자 르우벤, 둘째 아들 시므온, 셋째 아들 레위의 족보가 나옵니다.
장자 르우벤과 둘째 시므온의 족보는 A가 B를 낳고, B는 C를 낳고 이런식의 지루한 족보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거에 대비되게 셋째 레위의 족보는 A가 B를 낳았고, A는 137세에 죽었다.
B는 C를 낳았고, B는 133세에 죽었다.
C는 D를 낳았고, C는 137세에 죽었다.
[이런식으로 오직 레위의 족보만 이들이 얼마나 살았고 언제 죽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즉 나머지 아들들은 이집트 고센 땅에 얼마나 머물렀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차피 이곳에서 계속 살거니까요. 근데 처음에 행복하게 고센 땅을 살았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중에 2대 바로왕에게 핍박을 받는 노예생활을 하고 있음에도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아마 지금의 핍박은 잠시이고, 2대 바로왕이 죽으면 다시 행복하게 고센 땅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기대였을 겁니다.
하지만 레위 자손은 유일하게 400년 뒤에 이집트를 떠나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나이를 계산합니다.
언젠가 이들이 산 세월이 다 더해져서 400년의 시간이 차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땅으로 돌아 갈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야곱의 쟁쟁한 12지파 중에서,
특히 축복 받은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에브라임+므낫세)가 모두 이 언약을 주의 깊게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그 언약을 기억하며 신앙생활을 한 것은 저주를 받았던 레위 지파의 후손이었습니다.]그 신앙을 지킨 레위 지파의 한 남자와 레위 지파의 한 여자가 결혼을 해서 아이 셋을 낳습니다.
첫째는 딸 미리암, 둘째는 아들 아론, 그리고 셋째가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렇듯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앞전에 얘기했듯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모세를 갈대 상자에 넣어 나일강에 버립니다.
다른 이스라엘 민족들과는 달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지만 결국 2대 바로왕의 명령에는 결국 따라야 하는 무력한 어머니였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결과가 나의 아들을 죽이는 일이라니...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엄마 요게벳은 차마 아들이 강 위에서 죽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는지 그 자리를 떠났지만,
그녀의 큰딸 - 미리암은 내 동생 모세가 이렇게 죽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우리 집안은 하나님을 잘 섬겼으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세상 물정을 아는 어미와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게 하나님만 믿는 어린아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미리암의 소원대로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 바로왕의 딸이 목욕하다가 우연히 강 위에 있는 갈대상자 안의 모세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녀는 신(GOD)인 파라오의 딸입니다. 사실상 신이나 다름없는 성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목욕을 하고 있습니다.
목욕은 나체를 어느 정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의 모든 행동 가운데 가장 사적이고 비밀스럽습니다.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목욕을 하고 있다면 그 사생활을 지키기 위해 경비는 매우 삼엄할 것입니다.
혹은 이 목욕이 사적인 목욕인 아닌 종교의식 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비는 더더욱 삼엄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순진하고도 겁이 없는 비천한 노예 미리암이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바로왕의 딸에게 다가가서 좋은 유모를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신의 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몰래 본 것만으로도 죄인데, 당당히 자신을 드러내고 감히 신의 딸에게 말을 거는 상황입니다.
세상 물정 아는 어른은 이런 신앙을 갖기가 힘들 겁니다.
[오직 겁 없는 어린아이 미리암만이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다행히 2대 바로왕의 딸은 미리암을 용서했고,
그녀의 뜻대로 이스라엘 여인을 유모로 들입니다 - 바로 미리암의 엄마이자 모세의 엄마 요게벳 이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젖을 땔 나이가 되자 정식으로 2대 바로왕 딸의 아들로 인정됩니다.
이렇게 모세는 우연 + 미리암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졸지에 이스라엘 민족의 핏줄로 이집트의 왕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모세는 40년 동안 이집트의 왕자로 지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쉽습니다.
사실 이 40년의 시간은 2대 바로왕과 이집트 백성들에게 있는 마지막 회개 기회였습니다.
지금 모세는 왕자의 신분이고, 다른 이스라엘 노예들과는 달리 궁궐에서도 상당한 발언권이 있었을 겁니다.
단순한 왕정 시대의 왕자가 아니고 신(GOD)권과 왕권을 다 가진 절대군주 이집트 파라오의 왕자니까요.
하나님께서는 2대 바로왕이 선을 넘어 아이들을 죽일 때부터 이집트에 내릴 재앙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도구로 모세가 탄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비슷한 스토리가 바로 앞전에 창세기에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7년 흉년으로 이집트를 거의 멸망시킬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로 요셉이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와 흉년 = 재앙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요셉이 1대 바로왕을 설득해서 비록 7년 흉년 재앙은 임했지만,
그 재앙을 잘 대비해 그것을 축복으로 바꾸어 이집트를 최강국으로 만듭니다.
[그런데 왜 모세는 요셉과 같은 길을 갈 수 없었을까요?]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때까지의 하나님의 뜻은 원칙적으로 변함없습니다.
아직까지는 이집트에 재앙을 내린다는 뜻은 없었고, 단순히 아브라함과 야곱에게 약속했던
[400년이 지나고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여 가나안 땅을 주겠다]입니다.
비록 모세의 탄생으로 재앙은 예견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재앙으로 이집트 백성들이 100% 망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요셉때에도 재앙은 있었지만 그것을 이겨냈으니까요.
하나님께서는 가급적 참을 수 있을 때 까지는 참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40년간 이집트에 있는 이 시간이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 예전 요셉은 1대 바로왕과 독대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설득시켰습니다.
[반대로 모세는 2대 바로왕을 독대할 수 있는 기회가 무려 40년이나 있었습니다.]
만약 모세가 2대 바로왕을 설득해서 이스라엘 민족과 이집트 민족이 화해했다면 재앙은 없었을 수도 있고,
설령 재앙이 내리더라도 최소한의 피해로 극복 후 평화롭게 이집트를 나갈 수 있었을 겁니다.
이때까지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성경에 [직접적인 재앙을 내린다는 예언]은 없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2대 바로왕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1대 바로왕을 감동 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철저히 1대 바로왕에게 숙이면서도 하나님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모세도 자신이 이스라엘 핏줄인 것을 숨기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돕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2대 바로왕에게 겸손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가 40살이 되었을 때 - 즉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 들어오고 390년이 지난 어느 날,
모세는 자기 형제인 이스라엘 민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러 갑니다.
[이것 자체가 실수입니다.]
이미 모세는 2대 바로왕에게 있어 눈에 가시입니다.
2대 바로왕이 자신의 뜻 = 곧 신의 뜻으로 죽이려고 했던 이스라엘 아이였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의 손자가 된 케이스입니다.
어떻게든 작은 기회만 있으면 모세를 죽이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데 왕자의 높은 신분으로 자신의 친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보러 간다니요?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지만 단순한 노예가 아닙니다.
이집트 백성들과 비슷한 인구를 지닌 200만명의 민족입니다.
왕의 핍박을 받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아이가 자기 민족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킨다는 스토리는 너무나도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실제로 이때 200만명의 자신의 친족을 이끌어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적으로 봐도 모세의 이 행동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요셉은 1대 바로왕의 절대 신임을 받는 와중에서도 조금의 의심도 받지 않기 위해 말과 행동을 조심했습니다.
모세는 요셉보다도 훨씬 조심했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처세술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거기서 더 큰 실수를 합니다.
그곳에서 이집트 관리인이 이스라엘 노예를 괴롭히는 것을 본겁니다.
모세는 그것을 봐도 모른 척 했어야 했습니다.
이집트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성경적으로 [죄 or 악]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세상적인 권력 다툼에서 진 패배자의 아픔일 뿐입니다.
하지만 모세는 순간 열 받아 아무도 안 보고 있을 때 그 이집트 관리인을 죽이고 땅에 묻습니다.
모세가 정말 당당했다면 정식으로 재판을 열어 이집트 관리인을 벌했으면 됩니다.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고 충분히 그런 권한이 있으며,
설령 이집트 관리인의 죄가 없더라도 그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겁니다.
하지만 모세는 몰래 이집트 관리인을 죽입니다.
모세도 괜히 자기가 이스라엘 노예들 편들 든다는 의심을 받기는 싫었던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라는 그 살인 사건은 다음 날이 되니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2대 바로왕은 기회를 잡았다 싶어 바로 모세를 죽이려고 했고, 모세는 급히 먼 동쪽 미디안 땅으로 도망갑니다.
이렇듯 모세의 40년간의 기회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모세는 이 40년간 한번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다가 결국 실패하였습니다.]
저는 성경을 악인의 입장에서 많이 보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40년의 기회를 놓친 이집트가 너무나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이 안타까운 감정이 -> [모세를 원망하는 감정으로 번져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결국 선을 넘는 잘못을 한 것은 이집트인들과 2대 바로왕이고,
비록 모세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 전도하지 못했다고 한들 결국 죄의 대가는 죄를 저지른 사람이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내가 훗날 모세의 위치에 오를 기회가 생긴다면... 40살 모세와 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야지 라는 생각은 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첫 40년 인생과 함께한 2대 바로왕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만 한다면 회개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교만하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신(GOD)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인구를 억제시키는데도 성공했고, 마지막 화근인 모세도 쫓아냈습니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만족하며 안정적인 이집트 왕권을 3대 바로왕에게 물려줍니다.
이렇게 최고 비극의 왕 = 3대 바로왕이 탄생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2대 바로왕이 죽으면 평화의 시대가 올거라 헛된 기대를 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3대 바로왕이 등극하고도 자신들의 환경에 변화가 없자 그때부터야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의 인내는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집트에게 [재앙]을 내리겠다고 선포합니다.
이제 그분의 분노의 10가지 재앙은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이 10가지 재앙의 진짜 무서운 점은 재앙 그 자체의 잔인함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도 주지 않고 대놓고 죽도록 팬다는 것입니다.
2대 바로왕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3대 바로왕에게 회개할 기회도 안주십니다.
아니 더 잔인하게... 3대 바로왕이 재앙에 지쳐서 포기할려고 마음을 먹더라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바로왕을 더 부추겨 3대 바로왕이 계속 잘못된 선택을 하게 강제로 만듭니다.
[뭔가 이상하지요? 사람이 회개하려고 마음먹어도 하나님께서 그 회개를 막아버리고 강제로 잘못을 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일어난다면 정말 무섭고도 잔인한 형벌일 겁니다.]
즉 3대 바로왕이 암만 올바르게 살아볼려고 마음먹는다고 해도, 그냥 죽도록 쳐맞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10가지 재앙의 진짜 무서운 점이었고,
3대 바로왕에게 최고의 이집트를 물려주려고 했던 2대 바로왕은 결과적으로 최악의 이집트를 물려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성경 세계관에서는 사람이 회개하고 싶다고 회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 자체가 인간적인 교만한 마음이고 회개조차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성경 세계관에서 회개에는 때가 있습니다.
그 때의 기회를 놓치면 평생 죽도록 쳐맞습니다.
그런데 죽도록 쳐맞는 것 까지는 맞는데 그래도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는 꼭 한번 더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3대 바로왕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의 이야기 - 모세 믿음의 성장과정과 10가지 재앙, 그리고 이집트의 멸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