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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0/02/18 19:36:39
Name 아난
Subject [일반] 생태학적 레닌주의를 시도할 때이다 [번역] (수정됨)
다음 웹페이지에 다른 분의 번역글도 있습니다:

http://blog.daum.net/nanomat/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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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time to try out an “ecological Leninism” – Interview with Andreas Malm
“생태학적 레닌주의”를 시도할 때이다 – 안드레아스 말름과의 인터뷰

● 출처: 버소 북스 / 2019년 10월 7일
https://www.versobooks.com/blogs/4450-it-is-time-to-try-out-an-ecological-leninism-interview-with-andreas-malm

● 번역: 정성철 cittaa@gmail.com


Andreas Malm interviewed about Marxist approaches to the climate movement.
기후 운동에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접근하기에 관해 안드레아스 말름과 인터뷰했다.

RP: In Fossil Capital you present numerous arguments to counter the “Anthropocene” theory, which offers an ahistorical “anthropogenic” explanation for global warming. How do you explain the hegemony of this approach in the field of environmental studies?

RP : <화석자본>에서 당신은 지구 온난화에 대한 몰역사적인 “인위개변(人爲改變)”적 설명을 제공하는 “인류세” 이론에 대항하는 많은 논변들을 제기합니다. 당신은 환경연구 분야에서 이 접근법의 헤게모니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Andreas Malm: The discussions of a new geological epoch originate in the natural sciences: in the discoveries that humans have altered the basic functioning of the Earth system to such a degree that their fingerprints are everywhere and their causal impacts exceed those of natural mechanisms. From this insight, scientists have concluded that this is "the age of humans", or the Anthropocene. That in itself is neither strange nor objectionable. The problem appears when the notion of the Anthropocene seeps into social science and political debates and translates as "all this mess is caused by humans in general". This narrative is not only false – in fact, it is SOME humans who have caused mess, as has been demonstrated again and again (e.g., 100 companies are responsible for 70% of CO2 emissions) – it is also a hindrance to action. If the human species is the culprit, there's little we can do about it. If dominant classes and contingent social relations are the problem, then we can attack it at the root. One cannot expect a meteorologist or expert on biogeochemical cycles to understand this. Others should. The hegemony of the apolitical Anthropocene narrative in environmental studies is thus due to a failure to integrate critical perspectives and strategic visions from outside the natural sciences.

안드레아스 말름: 새로운 지질학 시대에 대한 논의는 자연과학에서 - 인간이 지구 시스템의 기본적인 기능을 변화시켜 인간의 지문이 어디에나 있고 인간의 인과적 영향이 자연 메커니즘들의 영향을 초과할 정도로 커졌다는 발견에서 유래했다. 이 통찰로부터, 과학자들은 이것이 “인간 시대”, 또는 인류세라고 결론 지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는 이상하거나 반대할 만하지 않다. 문제는 인류세 개념이 사회과학과 정치적 논쟁에 침투해서 “모든 이 궁지는 일반적으로 인간에 의해 야기된다”로 번역될 때 나타난다. 이 서사는 허위이다. 사실, 여러 번 논증된 것처럼, 궁지를 야기한 것은 일부 인간들이다 (예를 들어 100개 회사가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70%를 차지한다). 이 서사는 행동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한다. 인간 종이 범인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지배적 계급과 우발적인 사회적 관계들이 문제라면, 우리는 그 문제의 뿌리를 공격할 수 있다. 기상학자나 생물지구화학적 순환 전문가들이 이 사실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환경연구에서 몰정치적 인류세 서사의 헤게모니는 그와 같이 자연과학들 외부로부터 결정적 관점들과 전략적 비전들을 통합할 수 없었던 데서 기인한 것이다.

RP: Marxism is the pillar of your alternative approach to the ecological crisis. In a reading guide published in Période you explain that you experienced a “materialist epiphany and realised that literally everything is at stake in the ecological crisis”. Could you tell us more about your itinerary and what led you, as a Marxist, to start working on ecology? To what extent the ecological crisis implies a renewal of Marxism?

RP: 마르크스주의는 생태계 위기에 대한 당신의 대안적인 접근방식의 기둥이다. Période에 게재된 독서 가이드에서 당신은 “유물론적 에피파니”를 경험했으며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생태계 위기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당신의 여정에 관해 그리고 무엇이 한 명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당신으로 하여금 생태학 연구를 시작하게 했는지에 관해 조금 더 얘기해 줄 수 있겠는가? 생태계 위기는 어느 정도나 마르크스주의의 갱신을 함축하는가?

AM: My climate action debut was in 1995, at COP1 in Berlin, the very first in the interminable series of UN climate negotiations (I describe this in some detail in my next book). But after that, I had ten years of activism in the Swedish extra-parliamentary ultra-left, during which I held climate and environmental politics in contempt: I considered these issues luxury, hippie, petty-bourgeois distractions from the class struggle, irrelevant to the Palestinians and other peoples in the Middle East – my main preoccupation in those years – beyond the material interests of the exploited masses of the world. I couldn't have been more wrong, obviously. Unfortunately, this is the left's own version of business-as-usual: climate and ecology as somehow less central and harder to identify with than working-class politics, trade unions, social inequalities, anti-racism, feminism or whatever else one is committed too and continues to bang on about. Instead, as Naomi Klein has pointed out, the climate crisis supercharges all of these classical fronts with existential urgency. But strange as it is, there are parts of the left around the world that still stick to business-as-usual and keep climate and ecology a footnote at best. They should be happy that they are generally so powerless; otherwise history would judge them harshly. As for myself, people around me dragged me into full climate awakening in 2005. Since then, I have worked on some other issues – Islamophobia, the far right, Palestine, Iran – but I have found it increasingly difficult to think on something else than ecology, and to avoid refracting everything else through it. Because it really is everything.

AM: 내 기후행동의 개시는 1995년 베를린의 COP1에서였는데, 그것은 일련의 지루하게 긴 유엔 기후변화협상들 (나는 이것을 다음 저서에서 다소간 상세하게 기술할 생각이다) 중 최초의 협상이었다. 그러나 그 후 스웨덴 의회 외부 극좌파 조직에서 10년 동안 활동했으며, 그 기간 동안 기후와 환경정치를 경시했다: 나는 이 쟁점들을 사치스러운 것, 히피적인 것, 계급투쟁으로부터의 소부르주아적 이탈인 것, 중동의 팔레스타인인들과 다른 사람들 - 당시의 나의 주요 관심사 – 과 무관한 것, 세계의 착취받는 민중들의 물질적 이해관심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백히 나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이것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의 좌파 버전이다: 기후와 생태는 노동계급 정치, 노동조합, 사회적 불평등, 반인종주의, 페미니즘 또는 사람들이 헌신하고 계속에서 그 안을 꿍꽝대며 뛰어다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덜 중심적이고 그것들과 합치시키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나오미 클라인이 지적했듯이 기후위기는 이 고전적 전선들 모두를 실존적 긴급성으로 가압(加壓)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좌파 일부는 여느 때와 다름 없이를 고수하고 기후와 생태를 기껏해야 각주로만 처리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반적으로 아주 무력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역사가 그들을 엄중히 심판했을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2005년에 주변 사람들이  기후변화에 대한 완전한 각성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로 나는 어떤 다른 쟁점들 - 이슬람혐오, 극우파, 팔레스타인, 이란 – 에 관련해서도 활동했지만 생태학 외의 다른 것에 생각을 집중하기가,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을 그것을 통해 굴절시키는 것을 피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졌다.

RP: Last year was marked by the massive irruption of the youth on the global warming. We see this movement as characterized by a broad politicisation without real anticapitalist radicalization and by a deep pessimism close to the “collapsologist” theories which call to embrace the catastrophe. How do you perceive theses movements of the youth and which political role can they play?

RP: 작년에는 지구 온난화 문제로 수 많은 청년들이 시위를 벌였다. 우리는 이 운동이 진정한 반자본주의적 과격화를 수반하지 않는 광범위한 정치화와 대참사를 받아들이라는 “붕괴학”적 이론들에 가까운 깊은 비관주의로 특징지어진다고 본다. 당신은 젊은이들의 이 운동들을 어떻게 생각하며 그것들이 어떤 정치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AM: I think it's a bit unfair to say that the young masses on the streets embrace the catastrophe – they are desperate to avert it and not having to spend the rest of their lives walking around burning ruins. The current outpouring of worldwide popular climate anger is the most hopeful thing that has happened ever, on this issue. But due to the general processes of depoliticisation, the levels of ideological sophistication and strategic clarity in these mobilisations can of course be found wanting. But the impulse is there: those kids already raise demands targeting fossil capital – they know that oil, gas and coal companies have to be swept off the planet – and one shouldn't discount the potentials for radicalisation. What will all these kids do in a year or two, if they wake up one morning and realise the capitalist states have still done nothing to end fossil fuels, no matter how much they struck from school and pleaded for their future? There will be dynamite in this generation.  

AM: 나는 거리로 뛰쳐나온 청년들이 대참사를 받아들인다고 말하는 것은 약간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 그들은 그것을 피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의 남은 생을 불타는 폐허를 돌아다니며 보내지 않으려고 필사적이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기후변화를 둘러싸고 분노가 폭발하고 있는 것은 이 쟁점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일어난 것들 중 가장 희망적인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탈정치화 과정으로 인해 이 동원들에서 이데올로기적 정교성과 전략적 명료성의 수준은 물론 부족하다. 그러나 충동은 있다: 그 청년들은 이미 화석자본을 표적으로 해서 요구들을 제기했다 - 그들은 석유, 가스, 석탄 회사들이 지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급진화의 가능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나 자본주의 국가들이 화석연료를 끝장내기 위해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학교에서 얼마나 압박을 당하고 얼마나 앞날을 생각하라는 간청을 받던 간에 그 청년들은 일, 이년 안에 급진적 행동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그 청년들 속에는 다이나마이트가 있는 것 같다.  

RP: Luis Vitale, a Chilean revolutionary explained in 1983 that one of the two major challenges of Marxism was to “give a theoretical and political answer to the ecological crisis, because it is the survival of mankind which is at stake.” Politically, Marxism stays very marginal in the radical ecologist social movements, for the benefit of a kind of “diffuse” anarchism. How do you explain the gap between the relative dynamism of ecological Marxist theories – in Anglo-Saxon countries in particular – and the weakness of the political intervention of Marxists in these movements?

RP: 칠레의 혁명가 루이스 비탈레는 1983년 마르크스주의의 두 가지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생태계 위기에 이론적, 정치적 해답을 주는 것”이며 그래야 하는 이유는 “생태계 위기가 인류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급진 생태학적 사회운동들에서 일종의 “산만한” 아나키즘에 비해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당신은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들 – 특히 영어권의 이론들 – 의 상대적 역동성과 이 운동들에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적 개입의 미약함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AM: Ecological Marxism has a tendency to cripple itself by staying inside academia. It needs to engage with and reach out to the actual movements in the field. Anarchist ideas should be combatted; they will take us nowhere. I think it’s time to start experimenting with things like ecological Leninism or Luxemburgism or Blanquism. But the weakness of Marxism in ecological politics is of course inextricable from its nearly universal weakness at this moment in time (i.e., one symptom of the crisis of humanity, alongside acidification of the oceans and everything else).

AM: 생태 마르크스주의는 학계에 머물러 스스로를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현장의 실제 운동들에 관여하고 도달해야 한다. 무정부주의적 관념들과는 맞서 싸워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아무데로도 인도하지 못할 것이다. 생태학적 레닌주의 또는 룩셈부르크주의 또는 블랑키주의 같은 실험을 시작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러나 생태정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함은 이 시점에서 그것의 거의 보편적인 약함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즉, 이 약함은 대양의 산성화 및 그 밖의 모든 것들과 함께 인류의 위기의 한 증상이다).

RP: In Revolution in a warming world, after mobilising Lenin around the problem of the urgency of the revolution to stop the impending catastrophe », you explain that the climate movement has to be the linchpin “in any alliance drawing in the full spectrum of social movements to take down fossil capital”. Could you explain us more this hegemonic role that you give do the climate movement ? How do you articulate it with the centrality of the re-appropriation of the means of industrial production by the working class to reorganize it rationally and ecologically, which seems a natural axis for a Marxist environmental politics?

RP: <온난화 세계에서의 혁명>에서, 임박한 재난을 막기 위한 혁명의 시급성 문제를 중심으로 해서 레닌을 동원한 후 당신은 화석자본을 타도하기 위해 사회운동들의 전체 스펙트럼을 끌어들이는 어떤 동맹에서도 기후운동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당신이 기후운동에 부여하는 이 헤게모니적 역할을 좀 더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 헤게모니적 역할을 노동자 계급에 의한 산업적 생산수단의 재전유의 중심성과 어떻게 결합시키는가? 산업적 생산수단을 합리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재조직하기 위한 그 재전유는 마르크스주의적 환경정치의 자연스러운 축인 것으로 보인다.

AM: I have thought less about this recently than my comrade Matt Huber. You should check out his work.  

AM: 최근 나는 이 문제에 관해 내 동지 매트 허버보다 더 골몰하지 못했다. 당신은 그의 작업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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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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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좋은 생각거리네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의 그 학생 참 인상깊었는데, 시간 날 때 조금씩이라도 공부해봐야겠네요.
20/02/18 20:58
수정 아이콘
인류세 개념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급진 생태학적 사회운동들에서 일종의 “산만한” 아나키즘에 비해 매우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다]

이 부분에 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히는 2000년대부터 '온난화현상'과 '기후운동'에 초점을 맞춘 환경운동이 대세가 되면서, 맑시즘과 생태주의가 거리를 두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국가 단위의 탄소배출 제재는 이미 모든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에게 강요한 것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기후 중심의 생태주의는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라타니 고진은 '온난화 현상'에 주목하는 생태 운동을 비판한 바 있죠.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1) 지역마다 자연 환경이 다르며 따라서 환경 운동도 다원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게 만드는 점, 2) 기후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더 중요한 문제, 즉 원자력발전을 옹호하는 모순을 범한다는 점, 3) 앞서 언급한대로 선진국이나 대기업과 결탁하여 개도국을 제재하는 전략에 포섭된다는 점을 듭니다.

따라서 생태주의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특정한 동물 보호 운동, 특정한 슾지 보호 운동처럼 공통된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 운동입니다. 반면, 글로벌화-일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있습니다. 이는 지구 대기변화와 온도변화에 초점을 두는 운동입니다. 맑시스트들은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에는 동참했지만, 온난화현상에 기초한 생태주의 운동에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죠.
20/02/18 22:19
수정 아이콘
기후변화가 초래할 수 있는 위기는 대파국 수준이고 실제로 대파국이 일어날 경우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공평하게 피해를 당하지는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지구 전체에 걸친 위기이므로 전지구적으로 협화된 대응이 요구됩니다.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라는 것은 우선적이어야 할 이 전지구적 대응과 양립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대응이 위기의 근원인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시 하지 않거나/고 모더니즘에 머물러 있는 한 ('그린 뉴딜', '지구공학, 핵 발전, 탄소 저장 및 다른 기술적 방안들을 기후 변화의 해결책으로 장려하는 생태모더니즘'), 그리고 이미 모든 발전을 끝낸 선진국들이 개도국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강제하는 형태를 취하는 한, 생태사회주의라는 기치를 내걸고 그 대응을 비판하는 이들입니다. 본문에 "생태학적 마르크스주의 이론들 – 특히 영어권의 이론들 – 의 상대적 역동성"이라는 언급이 있는데서 알 수 있듯이 ('상대적'은 '어느쪽이냐 하면 역동적인 편이다'라는 의미죠) 최근 20여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생태학 연구를 마르크스주의(적 정치경제학 비판)와(과) 성공적으로 접목 - 이 접목은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들과 미출간 초고에서 생태사회주의론(적 자본주의 비판)의 기본 아이디어들을 찾는 작업으로까지 진전되었는데, 그 작업의 결정판은 최근 국역되기도 한 사이토 코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입니다 - 시키면서 그 비판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습니다. 인터넷 상으로는 https://climateandcapitalism.com/ 가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론의 집결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학자들 중 한명이 Ian Angus 인데, 다음 글은 이 양반이 마르크스주의적 생태학의 중요 저작들을 추천하는 글입니다.

http://ecosocialistsvancouver.org/article/essential-books-marxism-and-ecology-revised
20/02/18 23:55
수정 아이콘
(수정됨) 추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있을 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몇 가지 의견 차이가 있네요.
말씀하신대로 다양한 자연파괴를 막는 것과 전지구적 규모의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똑같이 중요합니다.

다만 무엇이 우선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관해서는, 저는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생태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다원화된 생태주의 운동이라고 생각하고요. 진정한 의미의 생태주의란 인간중심성을 타파하고, 다른 종의 생명권까지 보전하려는 도덕적 이성에 기초한 운동이겠죠.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은 실상 인간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운동이고, 물론 이러한 목표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한 의미의 생태주의가 아닐 뿐더러, 인간중심적이기 때문에 간과하기 어려운 갈등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맑시즘의 중심 의제는 계급 혁명 또는 자본가 게급의 타파인데,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들에는 다양한 계급의 이익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의제와 상충하기도 하기도 합니다.

예컨대 언급하신 사이트에서 참으로 역설적인 기사들을 보게 됩니다.
[https://climateandcapitalism.com/2020/02/11/climate-change-emissions-and-the-fat-tail-risk] 같은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지원하는 것은 'JP모건 체이스'와 같은 국제 자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경제학자들을 고용하고, 그들을 통해 사측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하고 있죠.

맑시즘이 생태주의와 성공적으로 접목했다면, 그 중심 의제는 무엇인지, 운동의 방법은 무엇인지 매우 궁금해지네요. 가라타니 고진의 경우 핵심은 모든 생명이 의존하는 원천으로서 수원(水原)을 보호하는 것이었습니다. 수질에 따라, 수원지의 지질학적 특성과 서식하는 동물에 따라 환경운동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주된 골자였지요.
20/02/19 02:49
수정 아이콘
지금과 같은 추세의 기후변화는 인간종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생물종들에게도 큰 재앙을 초래합니다. 현재 지구상의 상당수의 생물종들이 당면한 재앙 중 그 재앙보다 더 큰것은 없습니다. 물론 일부 생물종은 변화되어 가는 기후조건 아래서 더 번성할 수도 있고 장기적으로 지구에는 새로운 기후에 적응한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기 동안 수많은 인간개체들과 생물개체들의 생의 질이 확 떨어지게 되고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하게 됩니다. 따라서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은 실상 인간의 생존을 우선시하는 운동'이라는 주장은 넌센스일 뿐입니다.

기후변화에 기초한 운동이 생태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운동이라면 그 운동에 전인류의 이익이 아주 단순하게 걸려 있습니다. 자본가 계급과 그들을 서포트하는 국가 및 이데올로그들이 자본의 논리에 따라 그 사실을 부인하고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상충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상충이 없다면 왜 운동이 필요한가요? 모든 근본적 사회운동은 언제나 더 진실을 보고 더 정의를 추구하고 그래서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키려는 세력과 수구반동세력 사이의 상충이라는 형태를 취합니다.

일부 자본주의 기업들이 기후변화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고 해도 하나의 전체로서의 자본주의와 그것을 서포트하는 국가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 문제의식이 그 기업을 생태사회주의 운동의 동반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의 문제의식은 아주 단순합니다. 생태계에 파국적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은 기후변화 추세는 자연적 사이클도 인간본성의 불가피한 귀결도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온 세계 탓이라는 것이고 따라서 전지구적인 생태사회주의 체제가 건설되지 않으면 그 파국적 결과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 대다수의 관련 학자들은 2050년까지 평균기온 2도 상승은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는 것으로 보고 그 이상으로 상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물론 막기 위한 아무런 근본적인 전지구적 대책도 실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상황을 마르크스주의적 생태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 저는 모릅니다. 누구도 타개할 수 없고 파국적 위기를 겪으면서 인류 문명 자체가 퇴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 인류 대다수는 현재보다 삶의 질이 확연히 떨어지게 되는 피해를 보게되는 와중에도 적응할 자원을 확보한 어떤 소수는 큰 손해는 안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생명이 의존하는 원천으로서의 수원' 운운은 여러 자연적 힘들/요소들의 역동적 상호작용의 특정 형태를 통해서만 생태계가 생물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형태로 재생산된다는 단순한 사실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곳적 얘기의 울림을 갖고 있습니다. 게다가
수원을 보호하는 것은 현재의 전지구적 기후변화 추세를 전지구적 대첵을 세워 저지하는 것과 전혀 상충되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의 주범인 대기 중 이산환탄소 농도의 증대로 인한 대양의 산성화는 수원 오염의 가장 대표적이자 가장 대규모적인 사례입니다.
20/02/19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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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됨) 전인류의 이익이라든가 전지구적이라는 단어가 이데올로기적이고 환상이라는 겁니다 온난화는 어떤 지역이나 어떤 특정 종에게 멸종을 초래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지구 역사상 생명 대량 멸종을 초래한 것은 빙하기지 온난화가 아닙니다 이것은 화석증거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최근의 환경운동은 온난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이것은 특정 지역을 위한 전세계의 호혜라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합니다
20/02/28 18:00
수정 아이콘
기후변화는 어떤 지역에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후변화는 지구 전체에, 따라서 지구 생태계 전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간단히 얘기해 대다수의 생명을 서포트 하는 자연력/요소들이 오염되고 약화됩니다. 이 오염과 약화가 오히려 번성의 조건이 되는 생물종은 많지 않습니다. 인류는 그 생물종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즉 자본가들을 포함해서 기후변화로 지금보다 더 삶의 질이 나아지는 이들은 없습니다. 따라서 기후변화는 최소한만 말해도 문자 그대로 전인류의 이익이 걸려있는 보편적 사안입니다. 물론 최대한은 수많은 생물종들이 멸종되고 수많은 생물종들의 삶의 질이 악화된다는 것입니다.

기후변화로서의 온난화 역시 지구역사상 대량멸종을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입니다. 대규모 화산폭발도 흔히 대량멸종을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로 거론되는데 화산폭발로 인한 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의 증가가 온난화를 야기했기 때문입니다. 자세한 것은 위키백과의 대량절멸 항목을 검색해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최근의 환경운동은 온난화라는 표현보다는 기후변화라는 표현을 더 즐겨 씁니다. 기후변화는 작게는 전인류의 이익을 위하고 크게는 생물종 다양성의 보존을 위해서 모든 나라들이 저마다의 책임과 능력에 맞추어 전지구적으로 공조해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패트와매트
20/02/18 22:02
수정 아이콘
제가 저사람들만큼 생태주의나 환경보호에 대해서든 맑스레닌주의든 알지는 못하겠지만 자기네들의 케케묵은 혁명담론에 요즘 핫한 기후변화를 끼얹는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네들 사상이 마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결하는데 필수적인 만능열쇠인 양 기후변화와 관련된 사람들의 폭발력을 어떻게든 이미 힘을 잃은 구좌파적 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해 엮어보려는 불순한 의도로 해석하자면 제가 너무 삐뚤어진걸까요
20/02/18 22:34
수정 아이콘
(수정됨) 케케묵었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 아주 좋은 표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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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생태정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함은 이 시점에서 그것의 거의 보편적인 약함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즉, 이 약함은 대양의 산성화 및 그 밖의 모든 것들과 함께 인류의 위기의 한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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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것이 힘을 못쓰는 것 만큼 위급한 상황이 어디 있겠습니까? 바른데 왜 힘을 못쓰느냐구요? 바르면 대중을 장악할 수 밖에 없다는 법칙이라도 있나요? 진실/진리가 승리한다는 법칙은 인간 세상에 없습니다. 어떤 생각이 진리/진실을 담고 있는지 여부와 그 생각이 대중을 사로잡아 실천에 옮겨졌는지 여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보장하는 주의주장이 아닙니다. 그 실천의 가능한 형식을 지적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는 주의주장이죠.

마르크스주의는 케케묵은 자본주의 비판이기도 합니다. 생태학적 대파국의 잠재력이 돌이킬 수 없는 선 바로 앞까지 커진 현실에서 자본주의와 그 대파국의 잠재력 사이의 관계를 눈여겨 못보고 그 관계를 눈여겨 볼 수 있는 이론과 대안적 사회론을 제시해온 유일무이한 주의주장을 중학교 반공 교과서나 조선일보 수준의 논리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내팽개친다면 참으로 딱한 일입니다.
DownTeamisDown
20/02/19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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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의 아이러니 같은건 기후변화에 대한 운동으로 개도국을 제재한다는 안좋은점도 있지만
기후변화를 못막으면 가장 피해가 큰것도 개도국이라는게...
기후온란화가 되면 어쩌면 캐나다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이득이 더 클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본것 같거든요..
maritimel
20/02/19 08:06
수정 아이콘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저 (사회?)철학 분야의 특유의 표현을 전 잘 이해하기가 어렵더라구요. 「그러나 생태정치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약함은 이 시점에서 그것의 거의 보편적인 약함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자신이 성공적으로 실천에 옮겨질 수 있음을 보장하는 주의주장이 아닙니다. 그 실천의 가능한 형식을 지적하고 그 실천을 촉구하는 주의주장이죠.」
이런 표현들 말이죠...
제가 무식하고 머리가 나쁜걸까요.아니면 스타일 문젤까요? 전공은 나름대로 사회과학 쪽으로 나왔는데 전 오히려 수학 물리학은 억지로 꾸역꾸역 따라가다 보면 결국 명확하게 다가와도, 저런 문장표현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더라구요. 쓰시는 분은 분명 명확히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턴데 제 뇌가 그걸 재조립하지 못하는 느낌이 듭니다. 어찌어찌 이해해도 계속 하기도 힘들고..독해 노하우 같은게 있나요?
아루에
20/02/19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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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번역
2. 외국 개념의 도입
3. 1. 2.로 얻어낸 개념을 충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무분별한 적용
4. 3.의 현학적인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줄 알고 일단 모방
5. 외국 학자와 생경한 외국말 자체에 권위를 부여해 2를 가속화하는 내재적인 오리엔탈리즘
6. 합의된 개념 정의 및 이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 규약의 부재(말의 정의 자체를 애초에 진영에 따라 다르게 해버림)
20/02/19 13:43
수정 아이콘
어려운 낱말도 없고 문법적으로 복잡하지도 않은 문장들이 잘 이해가 안 된다면 본인의 독해력이 미발달되어 있는 것이죠. 잘 쓴 신문기사 같은 문체의 글만 읽어서는 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의 한계가 뻔하니 신경을 쓰셔야 할것입니다.
20/02/19 09:44
수정 아이콘
마르크스주의와 생태주의가 결합될 수 없다고 보는 인식은 흔히 마르크스를 경제성장과 생산력에 긍정적으로 평가한 프로메테우스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오독을 비판해온 폴 버킷, 존 벨라미 포스터 등의 학자들이 있죠. 이들은 마르크스의 저작 내에 이미 생태주의적 요소가 충분히 깃들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물질대사의 균열'이라는 개념이지요. 마르크스주의가 단순히 '혁명'을 외치는 주의주의에 그치는 것 때문에 19~20세기를 혁명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만은 아닙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자본론을 집필할 시기부터 당시 발전한 '농화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자연과학에 심취하고 있었습니다. '물질대사'란 개념이 자연과학으로부터 도입한 개념입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근대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분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도시와 시골이 분리되었습니다. 시골에는 자본주의적 토양의 착취로 인해 지력이 고갈되고, 도시에는 토지로 되돌아가지 못한 인간의 분변과 폐기물에 쌓여 지독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죠. 이와 같은 인간과 자연간의 물질대사에 균열을 일으키는 생산양식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이 마르크스 생태주의의 큰 의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댓글에서도 언급하신 사이토 고헤이의 근작은 앞선 저자들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자본론 자체를 정치경제학 비판을 넘어서는 생태학적 저작으로 길어올립니다. 생태주의에 마르크스주의를 끼얹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마르크스는 생태적이었고 이것의 전환은 단순히 개인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생산관계를 변혁시켜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20/02/28 19:11
수정 아이콘
좋은 댓글 감사드립니다. 인터넷 상에서는 전문영역이 아님에도 무리하게 논쟁하려고 시도하곤 합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맑스주의가 근본적으로 생태주의적이다라는 생각은 2000년대에 등장한 맑스주의의 생태학적 전회로 이해하겠습니다. 작금의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발상의 전환 같습니다.

사이토 고헤이(추선영 역)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두번째테제, 2020)
존 벨라미 포스터(김민정, 황정규 역) - 마르크스의 생태학 (인가사랑, 2016)

이 글에 제시된 몇 가지 레퍼런스를 정리해봅니다. 위와 같이 번역된 책들이 있고, 기타 제임스 오코너, 폴 버킷과 같은 생태 맑시스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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