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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9/03/27 14:49:43
Name yisiot
Subject [일반] 일하다 말고 아무말
일하다 작은 트러블을 겪었습니다. 카운터파트가 저와 성별이 다른 분이었는데, ‘저 성별은 역시 저래서 문제야’라고 생각하게 되더군요. 이것이 편견일까 생각해보았는데, 과연 저와 같은 성별인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저 성별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 xx가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요. 당시 상황에서 발생한 ‘저래서’가 제가 상대 성별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더 ‘저 성별’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있습니다만.

사실 ‘편견’이나 ‘범주화’라는 것은 생물의 본능이나 인지적 한계로 발생하는 것입니다. 독초를 먹고 죽을 고비를 넘긴 동물이 ‘아, 이렇게 생긴 풀은 먹으면 안되겠다’가 아니라 ‘똑같이 생겼지만 이 풀은 아까 그 풀은 아니고 다른 풀이니까 독이 없을지도 몰라’했다면 유전자를 남길 수 없었겠죠. 그러니까 편견이나 범주화 그 자체가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 특히 그게 무슨 절대악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성숙한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불특정 다수의 생판 타인에게 “있는 그대로의 유니크한 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넌 혐오주의자”라고 협박하는 거니까요. 그런 건 가족 간에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 ‘인간 혐오’가 유행하기 좋은 콘텐츠인 것 같긴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인간에게 이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완할 방법을 찾는 게 맞겠죠.

A라는 사람과 트러블이 있다고 했을 때 A가 나와 동성인 경우, 그를 성별로 범주화하면 나와의 차이점, 나와 트러블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 xx가 문제’가 되는 건데, 상대가 나와 다른 범주에 속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 부분으로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 만약에 제가 미국에 살았는데 타 인종과 문제가 생겼다면 ‘xx인은 저래서 문제’라고 생각했을테고, 한국이라도 지역갈등이 중요한 이전 세대였다면 ‘xx도 사람들은 저래서 문제’라고 생각했겠죠. — 그렇게 보면 유난히 균질적인 요즘의 한국 사회에서 성별 갈등과 ‘어디든 꼭 있는 미친놈’에 대한 공포가 강한 것은 필연적인 일처럼 느껴집니다. 경제적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언제나 트러블이 생기는 것도 당연한 것 같고요. (악역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경쟁이라고 적어놓고 보니 생각났는데, 586 세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경쟁과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NL 특유의 민족주의를 통해 이어져 내려온 유교적 전통 때문인 것 같은데(공자가 꿈꾼 이상향은 결국 수렵채집=원시공산제 사회라는 학자들이 많죠), 엄연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특히 집단의 정신 건강에 해롭죠. 그렇다고 그 반대편에서 안전장치를 풀면 가장 먼저 쓸려나갈 분들이 ‘최저임금제 때문에 내 삶이 팍팍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위태로워 보이긴 합니다만…

저도 어린 시절에는 생판 모르는 남의 공장에 몇시간씩 버스 타고 가서 해고 반대 밤샘 집회 같은 데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직장 생활을 해보니 해고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라는 게 있더군요. 인정상 여유 있는 조직이라면 딱 0인분만 하는 사람은 그냥 데리고 가 줬으면 싶고, 그런 리던던시도 급변하는 세계에서 필요할 때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만… 사람이란 게 마이너스 5인분을 하면 했지 딱 0인분만 하는 경우는 없더군요. 제 경험상 본인이 1인분을 못하는 사람은 1인분 이상 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발목잡고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비교되니까요. 경쟁이니까요.

전 직장에서는 부장급 이하 한 팀 전체가 윗사람 비위 맞추는 능력 하나로 업계 전반적으로 정착된지 오래인 신규 표준을 적용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사용하는 낙후된 절차에 맞추기 위해서 다른 부서에서 어댑션 비용이 발생하는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겠는데, 교육 지원도 해주겠다며 표준 도입을 요구하던 다른 부서장을 처자식도 있는 사람들의 커리어를 위협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천하의 몹쓸 놈으로 만드는 건 못 봐주겠더군요.

세상을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저는 기업에 ‘정규직 완전 폐지’를 선물로 주고, 대신 세금을 올려서 ‘전 국민의 무조건 최저 생계 보장’을 실현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해고가 살인’이 아니게 만드는 거죠. 누구든지(건강한 20대 청년 포함) 전혀 일하지 않아도 생계비가 나오는 나라 중 하나가 독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 그대로 ‘최저 생계 보장’이 될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한다고 합니다. 공무원들이 계좌를 들춰보거나 불시에 집에 쳐들어와서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이 있으면 압류하거나 자격을 박탈한다죠.

기분도 가라앉힐 겸 주저리주저리 적어 보았습니다. 그럼 다시 일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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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27 15:07
수정 아이콘
데이터를 다루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인공지능이 무서운 이유는 왜가 없어서죠. 데이터와 목표가 있으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문제는 우리의 데이터중 대부분은 엄청난 편향이 있어요. 하지만 기계는 왜를 생각하지 않아요. 왜 그런 편향이 생겼을까 고려하지 않고 그 편향을 이용해서 목표를 이루려고 하죠. 결국 인공지능이 내리는 판단은 A성별이고 B지역에서 살고 나이대가 C이고 등등등 하는 애들은 이것을 할 확률이 몇 프로라고 판단할 뿐이니까요. 그것에 인과나 성악따위는 없죠. 문제는 이 데이터라는 것이 인간세상의 샘플 같은 것이라 온갖 바이어스를 다 가지고 있죠. 예를 들어 B지역이 목표를 이룰 확률이 높은 이유는 사실 어떤 악행(불법, 편법, 노동착취 등)으로 인한 결과이지만 기계가 신경쓰지는 않죠.
물론 학습을 어떻게 시키느냐에 따라서 왜도 심어 줄 수 있고 여러가지 제약을 줄 수도 있는데 그럼 그게 결국 인공지능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요... 결국 사람이 다 하나하나 지시해야하면 인공지능이 아니잖아 라는 느낌이죠.
앞으로는 보이는 분야에서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이런 문제가 더 많이 생길 것 같아요. 사실 기계 뿐 아니라 사람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하는 것 같을 때도 있고요. 저는 그래서 앞으로 인문 분야, 특히 철학, 순수 과학 등 학문의 역할이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방향성이 중요한 시대가 될 것 같아요.
19/03/27 23:09
수정 아이콘
뜬금 없는 글에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비관적인 성격이라 '무서운 빅데이터님은 인문 철학 과학의 역할 같은 것 신경도 쓰지 않고 싹 밀어버리실 거야'라는 생각을 해버리는 편입니다만... 아무래도 세상은 제 생각보다는 조금 더 이성적인 곳인 것 같더라고요. 좋은 밤 되시길요.
19/03/27 16:44
수정 아이콘
좋은 글, 댓글 잘 읽었습니다!
19/03/27 23:09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훌게이
19/03/27 16:47
수정 아이콘
저도 요즘 비슷한 생각입니다. 길게 쓰고 싶은데 바쁜 와중에 월도중이라..
극단적이지만 비정규직 없애는 것보다 정규직 없애고 전국민의 계약직화(!!)가 더 행복한 사회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전제조건이 많죠. 직무급제 같은게 도입되어야 되고 성과평가가 공정하고 적정하게 이루어져야되고
본문처럼 최저한의 안전장치도 있어서 경쟁탈락자도 포기하지말고 계속하여 경쟁할 유인은 줄 수 있어야겠고
여러모로 능력만큼, 노력한만큼 돈 벌어먹고 살 수 있는 환경이 먼저 만들어져야 가능한 일이겠죠.
19/03/27 23:13
수정 아이콘
사람들이 너무 수동적이 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요즘은 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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