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게 고백했을 때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혹감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둘도 없으리만큼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음은 거울을 보지 않고도 어렵잖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얼간이처럼 앉아 있는 내 맞은편에서 그녀는 양손에 얼굴을 묻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 손가락 사이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문득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그러나 나는 그 눈물을 멈추기 위해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다른 친구들의 그것과 달라져 있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했다. 그 시도는 대체로 성공적이었지만 완벽하지는 못했다. 내 눈치가 빨라서는 아니었다. 단지 나와 그녀가 어울리는 시간이 워낙 길었던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니라고 여겼지만 어느 순간엔가 나는 깨달았던 것 같다. 그녀의 태도에서 문득 엿보이곤 하는 그 마음은 분명 진심이라고.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나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의논할 수도 없었다. 나는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친구가 많은 편이었지만 그 무수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일을 토로할 수 있을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인터넷 게시판 따위에 상담하는 것도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의 무게는 나란 보잘것없는 사람이 홀로 감당해내기에는 무척이나 버거웠다. 그리하여 나는 가장 부담이 적고도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즉, 모른 척 하고 넘어갔다.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의도가 너무나 뚜렷했기에 나의 미봉책은 그럭저럭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견디지 못했다.
나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나라고 해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이르는 동안 나는 네 번 연애를 했다. 남들에 비하면 많은 수는 아니지만 딱히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적은 수도 아니다. 두 번은 내가 고백했고 두 번은 고백을 받았다. 폭발하는 화산처럼 격렬하고도 뜨거운 사랑도 있었고,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평온한 사랑도 있었다. 그 중 한 번은 결혼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결혼은 무산되었고, 나는 결국 반강제로 솔로천국 커플지옥을 외치는 독신주의자가 되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사십을 바라보는 처지였다.
그렇게 애정의 격랑을 타고 넘는 동안 그녀는 언제나 내 곁에서 두 발짝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로서. 내가 연애를 시작할 때마다 항상 그녀에게 먼저 그 사실을 알렸고, 그것이 파탄으로 끝났을 때도 가장 먼저 그녀에게 알렸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게 적절한 축하 또는 위로를 건네주곤 했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로서. 그런 만남이 때때로 술주정으로 이어질 때면 나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얼굴을 부비며 그 감읍하기 그지없는 우정에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몹시도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는 그 표정의 정체가 단지 술주정뱅이 친구에게 차마 짜증을 내지 못하는 그녀의 선량함이 표출된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가 맞은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언제부터였어?”
나는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물어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 외에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근 이십 년 전, 고등학교 동아리에서 선후배 사이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보잘것없는 조그만 문학 동아리였고 2학년이 된 나는 어쩌다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새로 들어온 다섯 명의 신입회원 중 그녀가 있었다. 딱히 눈에 띄는 편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오히려 수수하고 조용한 타입이었다. 그러나 몇 달쯤 살펴본 그녀는 겉으로는 조용할지언정 내면에는 자신만의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나는 호감을 느꼈다. 한 학년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곧 단짝 친구가 되었고, 3학년으로 진급한 후에도 나는 여느 3학년과는 달리 동아리에 눌러 붙은 채 그녀와 수다를 떨곤 했다.
“......그래서 대학교도 일부러?”
질문과 동시에 나는 그 질문의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양손으로 감싼 채 수그린 고개를 좀 더 아래로 내렸다 올림으로써 내 추측을 확인해 주었다.
우리의 관계는 대학교에서도 지속되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대학교에 들어왔다. 내가 알기로 명백한 하향지원이었다. 이유를 묻는 내게 그녀는 별 것 아니란 투로 두어 가지 까닭을 주워섬겼다. 4년 전액 장학금.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 기타 등등. 그러나 사실 내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그토록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다시 내 곁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게는 그랬다. 그녀에게는 어떠했을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 번도 입에 물어본 적 없는 담배가 몹시 피우고 싶어졌다. 나는 다리를 떨었고, 손톱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녀의 얼굴은 손에 가려져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문득 나는 그녀의 양손이 희고 연약해 보인다는 사실을, 그리고 손톱이 짧고 단정하게 다듬어져 있다는 알았다. 이십 년이나 친구로 지나면서도 단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어, 음.......”
나는 입을 열었고, 주저했다. 그리고 말했다.
“며칠만 시간을 줄래?”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아마도 그녀가 예상한 답변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기대한 답변은 더더욱 아니었으리라. 그러나 내게는 그것이 최상의 답이었다. 그녀의 침묵을 동의로 알아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고, 나는 술값을 치른 후 밖으로 나갔다. 달아오른 얼굴에 와 닿는 초여름 밤의 공기는 의외로 차가웠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형광등 빛이 눈부셔 나는 눈을 끔뻑였다. 시선의 한쪽에 십자가가 들어왔다. 나는 멍하니 그곳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생각해 보면 십자가에 딱히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모태신앙이면서도 나는 생각날 때마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성당에 가는 것이 전부인 얼치기 가톨릭 신자였다. 어려서부터 집에 십자가가 걸려 있는 일이 익숙하였기에 독립한 후에도 당연한 듯 십자가를 걸어놓았다. 그건 신앙의 상징이라기보다는 단지 장식용 액세서리 정도의 의미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침대에 누워 난생 처음으로 그 십자가의 무게를 느꼈다. 하느님. 나는 생각했다. 제가 어찌하면 좋을까요. 물론 십자가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눈을 감으며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단 한 번도 연애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나는 나의 무신경함에 진저리칠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알지 못했을까. 어째서 그 일에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어째서 나는 그녀가 언제까지나 오롯이 나의 친구로서 그곳에 서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처음부터.’
그녀의 대답을 떠올리며 나는 까무룩 잠들었다.
나는 약속장소에 삼십 분 일찍 도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먼저 와 있었다.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으며 다가갔다. 그녀는 걸어오는 나를 보며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었다. 얼굴의 화장기는 옅었고 머리는 아무런 장식 없이 뒤로 묶었을 뿐이었다. 톤이 낮은 색 셔츠와 검은 바지는 차분해 보였지만 칙칙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그녀의 옷차림을 이렇게 눈여겨 본 적이 없었음을 상기하며 나는 의자를 당긴 후 자리에 앉았다.
“뭐 마실래?”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를 내려 노력했지만 내 목구멍에서는 억양이 괴상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한 후에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이번에는 비교적 들어줄 만한 목소리였다. 나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를, 그녀는 콜롬비아 원두의 드립 커피를 선택했다. 내가 커피보다 술을 훨씬 선호했기에 우리의 만남은 대체로 카페보다는 술집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달지 않은 커피 따위는 구정물 취급하는 사람이었다. 콜롬비아 원두커피를 주문하는 내 목소리는 스스로 듣기에도 생경했다. 주문한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계속해서 계산대 주위를 맴돌며 준비해 온 대사를 되새겼다.
마침내 나는 양손에 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리고 한손에 든 잔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 잔을 받아들었고, 그 순간 며칠이나 준비하고 연습한 나의 대사는 순식간에 내 뇌리에서 증발하고 말았다. 나는 당황을 감추기 위해 급히 빨대로 커피를 빨아들였고 곧장 사례가 걸려 한동안 쿨룩거려야 했다. 괜찮냐고 묻는 그녀에게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내밀어준 손수건에서는 어렴풋한 향수 냄새가 났다. 나는 그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친 후 마침내 운을 뗐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그녀의 얼굴에 마치 흐린 날처럼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나는 또다시 당황했고 재차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은 도망칠 데가 없었다. 결국 나는 말했다.
“한 번 해 보지 뭐.”
그녀는 명백히 당황했다. 생각지 못한 답변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내 대답이 너무나 요령부득이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나는 급히 설명을 주워섬겼다.
“아니 그러니까 뭐, 나는 어차피 지금 애인도 없고, 그러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르고......”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나는 내 멍청함과 우둔함을 한탄했다. 그런 뜻이 아닌데. 하지만 앞선 말을 수습하고자 다른 말을 꺼낼수록 내 말은 더욱더 꼬여갔다.
“물론, 그야 놀라긴 했지만, 세상이 변하기도 했고, 네가 좋다면 그게 나름 좋은 경험일지도 모르고......”
결국 나는 양손으로 내 주둥이를 움켜잡았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헛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의 멍청한 모습을 그녀는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았고 나는 그녀의 얼빠진 표정을 지켜보며 입술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시 후,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 웃음과 동시에 나는 가슴에 내려앉아 있는 바위의 무게가 약간쯤 덜어졌음을 느꼈다. 나는 웃음을 멈춘 후 입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긴장이 풀린 덕분인지 비로소 헛소리 대신 멀쩡하고 조리 있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알다시피 나는 애인도 많이 사귀어 봤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랑은 다른 것 같아. 딱히 별다른 감정을 느껴본 적도 없고. 하지만 뭐랄까, 원래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건 아니잖아?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빠는 일요일 저녁마다 내일 회사 가기 싫다고 노래를 불렀어. 하지만 월요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했지. 오히려 월요일에는 길이 막힌다면서 더 일찍 나갔어. 어쩌면 가족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겠지. 하지만 나는 의무감이라기보다는,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아빠가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 물론 그렇다고 내가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겠다는 건 아냐. 내가 무슨 예수님도 아니고. 그게 싫은 일은 아니더라도 좀 당황스러운 일인 건 확실하지.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내게 해 준 일들을 생각해 보면 뭐랄까, 나도 최소한 한 번쯤 노력은 해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 물론 네 번이나 연애해 본 경험으로 미루어보자면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참 많더라고. 그래도 내 생각은, 일단 해 본 후에 정 안 되면 그건 그 때 가서 재고해 봐도 된다는 거야. 내 말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솔직히 모르겠어. 하지만 나는 더 이상은 잘 설명할 자신이 없어. 그저 이게 내 결론이고 대답이야. 한 번 해 보겠다는 거.”
그녀는 울었다. 이번에는 얼굴을 감싸지 않고, 앉은 채 나를 응시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뺨을 타고 턱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커피잔 안으로 퐁당퐁당 떨어졌다. 카페 아르바이트생이 우리를 힐금거렸다. 손님들 중 두엇은 아예 노골적으로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신경 쓰지 않았기에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보았고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뿐이었다.
카페를 나왔을 때 이미 날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어색하게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주저하다 곧 내 손을 살짝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은 따스했고 살짝 촉촉했다. 그 동안 수천 번이나 잡아왔던 손인데도 불구하고 생경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러나 결코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살짝 속삭였다.
“고마워, 언니.”
뭘 그런 걸 가지고. 나는 그렇게 말하려는 듯 어깨만 으쓱였다. 입을 열었다가는 난데없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기에.
집으로 돌아와 나는 한참 동안이나 의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휴대전화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두 번 울리자 어머니가 받았다. 나는 인사치레는 죄다 생략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엄마. 그 성경 구절 중에 희망 소망 사랑 어쩌고 하는 거 있잖아. 그게 어떤 구절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신자인 나와는 달리 매주 꾸준히 성당에 나가는 엄마의 대답은 신속 정확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 13장 13절. 그런데 네가 웬일이냐? 성경 말씀을 다 물어보고. 이제 성당에 나갈 생각이 든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냐.”
나는 허공에다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그 구절이 생각나서.”
“뜬금없긴.”
엄마가 말했다. 그러나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것이 내게는 작으나마 위로가 되었다. 나는 전화를 끊은 후 멍하니 십자가를 쳐다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있다, 스스로 정신이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마침내 소리를 내어 말을 걸었다.
“그런 거죠? 높은 데 있는 양반.”
아무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대답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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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는 아닙니다. 제목은 넥스트의 노래에서 따 왔음을 밝혀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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