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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23 11:24:18
Name 글곰
Subject [일반] (시와 시) 절정,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수정됨)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작스레 떠올라서 한 번 끄적여 봅니다. 이럴 때나 가끔씩 국문학과 나온 걸 티내는 거지요.
   (그런데 나는 시 수업은 하나도 안 듣고 고전문학만 팠는데......)




  이육사의 '절정(絶頂)'이라는 시는 모두들 알고 계실 겁니다. 요즘 교과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90년대 후반의 교과서에는 실려 있었던 시거든요. 분량도 짧고 그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일단 먼저 감상하고 가시죠.

절정(絶頂) -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 시는 1940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육사가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을 때 쓴 시라고 하죠. 시대적 배경은 일제의 식민통치가 몹시도 가혹하던 때입니다. 매운 계절, 채찍, 서릿발 칼날 등 어휘들만 보아도 몸서리가 쳐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습니다. 강철로 된 무지개. '차갑고 딱딱한' 강철과 '따스하고 이상향적인' 무지개라는 두 단어를 나란히 놓음으로써 이육사는 그 어떤 고난과 좌절에도 굴하지 않고 무지갯빛 미래를 꿈꿀 것이라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이육사란 양반이 참 대단한 양반이다, 하는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그는 고작 사십 년의 생애 동안 무려 열일곱 번이나 투옥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그보다 열일곱 살 어린 문학청년이 있었습니다. [절정]이 발표되었을 때 스무 살이었던 그는 이 시를 읽고 가슴에 새겨두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온 독립. 그러나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내부적인 충돌 사이에서 우리나라는 절반으로 갈라졌고 결국 한국전쟁을 통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이 때 서울에 살던 이 청년은 피난조차 가지 못한 채 북한에 붙들려 강제로 징집되었고, 그곳에서 탈출하였지만 이번에는 인민군 출신이라는 이유로 남한에게 체포되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풀려나니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린 상태였죠. 이 때 이미 청년을 벗어나 삼십대에 접어든 이 시인의 이름은 김수영입니다.


  이후 이승만 독재 체재와 4.19혁명, 그리고 뒤이은 5.16 군사 쿠데타까지 그는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현실과 싸워 왔죠. 이육사처럼 직접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문인(文人)으로서 자신의 시를 통해 치열하게 현실과 싸웠습니다. [풀], [폭포]. [눈]처럼 유명한(=교과서에 나오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그가 끊임없이 민주화의 열망을 꿈꾸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조소했습니다. 그건 어쩌면, 이육사처럼 직접 현실과 투쟁하지 못하고 다만 뒤에서 글로만 지원사격하는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육사는 일제에 붙들려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오히려 강철로 된 무지개를 노래하였던 고고한 지사(志士)였지만, 김수영은 포로수용소에서 거즈를 개어 정리하던 소시민일 따름었습니다.


  물론 소시민이었다 하여 그가 비판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너도 나도 우리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소시민일 뿐이죠. 그렇기에 이육사 같은 양반이야말로 정말 대단한 것이고요. 하지만 김수영은 그런 자신을 감내하지 못합니다. 어느 날, 그는 자탄합니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여기 나오는 [절정]이 위에서 언급한 이육사의 시 [절정]이라는 건 다만 저의 근거 없는 주장일 뿐입니다. 김수영이 독립투사인 이육사를 존경했고 동시에 그와 대비되는 소시민인 자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도 저만의 주장일 뿐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사실이라 믿습니다. 왜나면 아래의 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육사처럼 거대한 악과 맞서 싸우지 못하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자화상에 가까운 그의 시.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에 남긴 작품이자, 제가 생각하는 김수영 인생 최고의 걸작입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뭇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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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애
17/11/23 11:29
수정 아이콘
와... 좋은 글 소개 감사합니다.
17/11/23 11:3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김연아
17/11/23 11:42
수정 아이콘
이육사의 절정은.... 진짜 핵간지 폭발이죠.....

김수영은, 그렇지만, 이런 시도 썼습니다.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단 세 문장이지만, 김수영의 생에 대한 심정이 절절히 드러난달까요.
재밌는 것은 여기서 은유적으로 표현된 자기 반성이, 시간이 지나서 쓴 본문의 시에서 오히려 더 직설적이고 강한 어조로 드러난 다는 겁니다.
그는 오히려 더 젊어졌던 걸까요? 아님 더 지혜로워졌던 걸까요? 아님 오히려 그럴 더 강하게 몰아부칠 만큼 세상이 더 X같아졌던 걸까요?
크르르르
17/11/23 11:44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명문이죠. 수많은 패러디가 있지만
얼마 전 유병재 패러디가 인상에 남아 퍼옵니다.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어느 여자 연예인이 속옷을 입지 않고 SNS에 사진을 올렸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한조 위도우만 고르는 우리 편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독재자에게
친일파에게는 못하고 배달부에게
발포책임자에게는 못하고 일사봉공, 견마지로의 자세로 충성을 맹세한 일본군 장교의 딸에게도 못하고
걸그룹 기획사 사장에게 팀명이 구리다고 팀명 때문에 팀명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걸그룹 팀명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고란고란
17/11/23 11:46
수정 아이콘
본문의 시들을 외우지는 못하지만,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보고 나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그 때 배운 수많은 시들 중에 제목이나마 기억하는 것들은 몇 안되고, 그 중에서 저 두 시에 대한 수업은 좀 기억이 있거든요. 원래 강렬한 시들이긴 하지만요.
-안군-
17/11/23 14:03
수정 아이콘
이육사님의 '절정'과 비교해서 읽어보니, 김수영 시인의 시가 더 절절히 와 닿네요.
저 역시도 여기서 키워질이나 하고, 촛불혁명때도 한쪽 귀퉁이에서 초를 들고 서 있었을 뿐, 그것도 잠시뿐...
괜시리 찡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마스터충달
17/11/23 16:09
수정 아이콘
저 거대한 시인도 자신이 작다고 한탄인데
나는 뭐가 잘났다고 이리 살고 있는지...
은때까치
17/11/23 17:38
수정 아이콘
와..... 소름끼치는 글입니다.
좋은 시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TheLasid
17/11/23 19:26
수정 아이콘
작음이 허물이 아니면 좋으련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는 참 어렵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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