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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5/05 13:23:21
Name Eternity
Subject [일반] 소년의 다짐
소년의 다짐


한번은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 대학교 은사이신 현대문학 전공 교수님께 보여드린 일이 있다.  내심 교수님의 칭찬과 호평을 바랐던 기대와 달리 글을 읽으신 교수님의 평은 다소 야박했다. 보내드린 글을 다 읽으셨을 즈음 나눈 첫 통화에서 교수님은 '혹시 전문 작가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 대뜸 물으셨다. 뭐라고 답해야할까 고민하다가, 현재는 많이 부족하지만 미래에는 그렇게 되길 바란다고 답했다. 그러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글에 군더더기가 많고 문장이 간결하지 않다." 글의 전체 분량을 줄이고 문장의 군더더기를 다듬고 문장을 토막쳐내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취미로 글을 쓰는 거라면 모를까, 프로 작가를 목표로 한다면 보다 더 혹독한 연습과 정진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셨다. 그 외에도 뼈가 되고 살이 될 만한 많은 충고를 해주셨지만 그 중 문장에 군더더기가 많다는 첫 조언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 얘길 듣고 이렇게 말씀드렸다. 문장이 간결하지 않고 형용사나 부사 같은 군더더기가 많은 이유는 '나'라는 개인의 성정(性情)과 맞닿아있는 부분인 것 같다고. 즉, 내가 그런 사람인 것 같다고 털어놨다.

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길 좋아하는 설명충(?)이자 누군가로부터 공감과 이해를 받아 외로움을 해소하길 원하는 한겨울의 나무다. 설명하길 좋아하고 내 뜻이 오해받는 걸 극도로 경계하다보니 비슷한 얘기를 중언부언하듯 반복하는 일이 잦고 문장에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자꾸 붙는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성격과 스타일을 넘어, 지나온 내 삶에는 그만큼의 형용사와 부사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결국 글에는 자기 자신이 녹아있는 법이니까.

나는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맞는 것이 두려웠고 누군가를 때리는 것도 싫었다. 타인의 시선 속, 어린 시절의 내가 착한 아이였다면 그건 그만큼 세상에 대한 겁을 품고 움츠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나를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풍족하지 못한 집안환경 때문이었을까? 이유 없이 나는 부끄러웠다. 당당하지 못한 채 주눅들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런 움츠린 성장의 와중에서도 나는 비겁하지 않고 싶었다. 내가 겁 많은 아이란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에 도리어 세상 앞에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린 소년의 유일한 자존심이자 나름의 결기였다. 비록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않았어도 마음까지 비루하고 가난해지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 세파에 부딪쳐가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때로는 스스로 다짐한 원칙을 잊은 채 현실에 적당히 눈감고 세상과 타협할 일들이 점차 늘어갔다. 직장상사 앞에서 원칙을 분명히 바로 세우고, 친한 친구에게 솔직한 직언를 해야 할 상황에도 조용히 회피하고 마음으로 물러서는 순간들이 생겨났다. 나한테 피해만 없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남들에게 겉으로 티내진 않아도 속으로 잔머리와 잔계산이 점점 늘어나는 나를 느꼈다. 성인으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어떤 상황을 마주할 때 그 일의 가치나 목적보다는 그것이 내게 끼치는 이해득실을 재빠르게 먼저 계산했다. 돈을 쓰는 일에서도 겉으론 대범하고 흔쾌한 척 했지만 속으론 항상 내가 쓰는 돈의 액수를 먼저 떠올렸다. 연애에서도 때론 진심보다 얄팍한 계산이 앞서는 나를 어찌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삶의 굽이굽이, 고민의 절벽 앞에서 때로는 비겁과 타협해야 했고 그때마다 내겐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난 내게 '어쩔 수 없었다'고, 살면서 이정도 융통성은 필요하다고, 남들도 다 이 정도는 한다고, 그래도 넌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설득해야했다. 그렇게 나만의 논리를 찾아 스스로를 달래며 되도 않는 위로를 했다.

타협은 수월하고 편했다. 눈 한번 슬쩍 감고 잠시 고개 돌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만큼의 분칠과 치장이 필요했다. 치장과 분칠 속 맨얼굴을 마주하지 않기 위해선 갈수록 더 진한 분칠과 가면이 필요했다. 변명의 친구는 또 다른 변명이었다. 꼭 어떤 거대하고 대단한 위선을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소한 회피와 눈앞의 편리를 위해선 더 많은 내적논리와 해명을 덕지덕지 끌어와야 했다. 경극(京劇) 무대 위의 배우처럼, 혓바닥이 길어진 아귀처럼 어느새 내 삶의 그늘도 점점 그렇게 짙어졌다. 이렇듯 변명으로 가리워진 모습 속에서 내 삶은 점점 형용사와 부사로 점철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내 글에 대한 교수님의 짧은 지적은 그렇게 내 삶의 긴 궤적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나는 떠올렸다. 그 시절, 겁먹은 소년이 살고 싶었던 비겁하지 않은 삶에 대해. 그 녀석이 살고 싶었던 비루하고 가난하지 않은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소년은 누구보다 당당하고 싶었다. 겁이 많았기에, 오히려 비겁하고 싶지 않았다. 유불리와 이해득실을 떠나 누구에게든 할 말을 떳떳하게 하고 싶었고, 누군가가 내민 손을 뿌리치지 않고 먼저 끌어안고 싶었다. 유약한 아이가 이 모진 세상을 꿋꿋이 헤쳐 나가기 위해선 거짓 없는 따뜻한 태도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다. 그렇게 소년은 당당하고 싶었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나는 더욱 뻔뻔해져갔다. 뻔뻔함과 당당함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회, 뻔뻔함을 당당함으로 착각하는 사회 속에, 그렇게 자연스레 스며들어갔다. 7년차 직장인이 된 현재의 나는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론 어느 정도 풍족해졌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지금의 내가 과연 지난날에 비해 가난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앞에 놓인 천박한 풍요 앞에, 세상을 향한 소년의 투쟁은 얼마나 빛이 바랬나. 모질고 뻔뻔한 세상 속에서, 당당하게 살고 싶던 그 마음.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는 형용사나 부사 없이 살아가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렇게 글을 쓰고 싶다. 물론 아예 주어와 서술어만으로 글을 쓸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노력하고 싶다. 꾸밈없이 글을 쓰고 싶고 그 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적어도 내 글보다 못난 사람으로 살고 싶진 않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 언젠가 다시 교수님께 글을 보여드렸을 때, 어떤 대단한 칭찬보다도 "문장에 군더더기가 많이 줄었다."라는 평을 듣는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마냥 행복할 것 같다. 아니, '마냥'이라는 부사는 빼자.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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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미나리좋아해
17/05/05 14:45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고 보니 내가 어떤 문장을 쓰는지 생각하게 된다.
글을 자주 쓰지 않건만, 나는 호흡이 길고 수사가 많은 문장을 무의식적으로 쓰곤 한다. 그것은 여러 접속사와 쉼표로 구성되어 있곤 했다.
어쩌면 법대 출신인 탓일지 모르나, 본문처럼 문장이 자신의 성정이나 삶과 연계되어 있다면(나는 이에 적잖이 공감한다) 아마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도 같다.
나는 내 생각과 느낌을 '온전히' '그대로' 전달하기를 원하곤 했다. 누군들 그러하겠지만, 나는 그런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쉼표와 수사가 가득한 그 문장들은 그런 내 성정의 표현이다. 일반적으론 내 생각에 대한 자신이고,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을 원하는 마음이지만, 동시에 겉도는 대화와 반복을 싫어하는 마음이며, 어쩌면 타인에 대한 이해의 강요요, 나아가 자신에 대한 일종의 자만일 지도 모른다. 돌이켜보건대, 지금보다 더 철없던 시절에는 저 말미의 것이 더 컸던 것도 같다. 이제는 다소 줄었다지만, 저 표현이 남은 만큼 아직도 잔재하고 있는 지 모를 일이다.

글쓴이처럼 나 역시 글을 담백하게 쓰고 싶어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이제 그것이 내 글솜씨의 부족이 아니라, 내가 성정을 잘 갈고 닦지 못 했음에 기인함을 알겠다.
나 역시 담백한 글을 써야겠다.
마스터충달
17/05/05 15:56
수정 아이콘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저도 혓바닥이 긴 걸 싫어합니다. 그리고 뭐든 넘치는 걸 모자란 것보다 싫어합니다. 담백한 글로 신화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17/05/05 16:31
수정 아이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서도 주어와 동사만으로 부사가 구현할 것을 독자의 머리속에서 구현하도록 하게 하라..라고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랍니까.. 그런 의미에서 쿤데라를 참 좋아합니다. 쿤데라가 부사를 쓴다는 건 아니고, 그의 소설은 굉장히 사변적이지만 군더더기라는 느낌은 안들거든요, 특유의 유머 감각 때문인지 몰라도. 참 그런 내공이 부러워요
사악군
17/05/06 14:35
수정 아이콘
전 Eternity님 글을 좋아합니다. 과한 꾸밈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솔직담백한 인성이 글에도 드러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프로작가'로서 어떤가는 제가 평가할 깜냥이 안됩니다만 서점의 책들 좀 보다보면.. Eternity님께서 자신감없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조금 뻔뻔해지셔도 될 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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