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인과 살림을 합친 뒤에 그동안 부모님 댁에 방치되어 있던 양쪽 책과 짐을 받은 뒤 2번의 이사를 거쳤다. 그러면서 엄청나게 버리고 또 버렸지만 언제나 버릴 책은 계속 나왔다. 이것은 미스테리였다. 이사갈 때마다 난동을 부리던 세 마리 고양이님(a.k.a 캣새퀴들)이 안락하게 노후를 보낼 집(반은 은행 거)에 안착하면서 책장을 거실에 짜넣었다. 좁은 집 거실 하나를 완전 차지한 책장에 뿌듯했다. 이걸로 될 줄 알았지. 당연히 오산이었다. 언젠가 볼 줄 알고 사놓았던 판타지 페이퍼백이 목구멍까지 차고 넘치는 걸 이삿짐 풀어서 책장에 차곡차곡 채워넣으면서 깨달았다. 결국 꽂는 게 아니라 블럭처럼 쌓여 있는 페이퍼백들. 그리고 차마 남들에게 보일 수 없었던 나의 취미생활은 소파로 쓰려고 샀던 이케아 데이베드 밑으로 들어갔다.
정착 후 1년 반이 지난 요즘, 더 이상 사람의 권리인 거실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라이프는 고양이를 키우는 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였다. 집을 합치면서 텔레비전 시청을 위해 산 우리의 소파는 이제 고양이 침대였다. 고양이 세 마리가 19시간을 자면서 뒹굴거리는 털로 뒤덮인 그곳을 보고 취미로 펠트하는 친구가 와서 고양이 털을 모아갈 정도였다. 사람이 누우면 둘 다 알레르기로 눈이 벌겋게 되어 일어나고. 손님이 오면 그 위에 커버를 씌워 가리는 짐이었다. 더 이상 고양이들의 안락한 삶을 위해 사람이 희생할 수 없어, 차라리 저걸 버리고 베란다에 있는 2인용 식탁(2002년에 결혼한 친구 부부가 미국으로 가면서 주고 간 거였다)도 버리고 넓은 식탁을 사서 거실 한가운데 두어서 북카페처럼 꾸미는 거야. 계획안을 물주인 동거인에게 pt했다. 동거인이 소파를 버리는 건 동의하나 식탁 사이즈는 2인이어야 한다고 했다. "왜죠?" "그래야 마작을 칠 수 있으니까요." 이런 니미럴.
결국 둘이 한참 동안 옥신각신한 끝에 확장형 테이블이란 걸 알아보기로 했다. 확장형 테이블은 이케아에서 주로 팔고 있었다. 서울 중심부에서 이케아까지 어떻게 가나 싶을 차, 마침 데이베드를 인수해 주기로 한 친구가 이케아에 동생 애기 침대를 사주러 간다고 해서 그 김에 묻어 갔다. 물건이야 이미 봐뒀기 때문에 쇼핑은 원활했다. 그리고 다음날 가구가 배달되어 왔다.
동거인은 조립을 하다 말고 불을 뿜었다. 이케아 가구 주제에 왜 나사못도 아니고 망치질을 시키는 거냐고, 망치를 내려놓고 잠시 스트라이크를 일으켰다. 완성품 식탁 살 돈이 없으면 그래야 돼요. 그냥 망치질이나 하셔. 나는 망치를 조용히 다시 쥐어주었다. 결국 식탁은 완성되었고 의자 두 개도 조립이 잘되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의자 커버에 pgr하는 주인의 고양이답게 한 놈이 뭔가의 흔적을 남겨놓았지만.
그러나 의외의 복병은 데이베드 밑에서 나왔다. 그 밑에 깔려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내 취미생활이 천하에 공개되게 되었다. 으아아아, 저걸 남부끄럽게 책장에 꽂을 순 없어. 아니 일단 책장에 꽂으려고 해도 꽂을 데가 없었다. 내 서재는 이미 차랑 찻잔이 점령한 지 오래였다. 이제 더 이상 사용 안 하는 물건을 이고지고 사는 게 갑자기 견딜 수가 없어졌다.
책정리를 하기로 결심하고 안 보는 책을 마루에 쌓기 시작했다. 거실 마주보는 벽을 차지한 책장에서 책이 마구 나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베란다에 쌓아놨던 책도 생각이 났다. 이미 고양이 모래 먼지로 덮혀 있는 책을 닦아서 거실에 쌓았다. 약 십 년을 모시고 산 디비디들도 생각났다. 그래 이 참에 버리던가 누구 줘버리던가 하자. 탑처럼 책과 디비디가 쌓이기 시작할 때 내 정신은 혼미해졌다.
지난 십여 년의 치욕의 역사나 다름없었다. 책이나 디비디 다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들춰보지도 않았고 본 적도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게 뻔했다. 더 이상 내가 판타지를 밤새서 읽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인정해야 했다. 30년을 갖고 있던 책은 20년 동안 보지 않았고 앞으로 20년 뒤에도 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미련하게 왜 갖고 있었던 걸까.
어제 나눔을 무사히 끝낸 뒤에 드는 생각은 이제 앞으로 다신 짐 되는 걸 모으지 말자. 하지만 20년 뒤에는 장 2개로 있는 티웨어를 내보내겠지. 똑같은 말을 하면서.... 마오쩌둥 얼굴이 박힌 자사호 같은 걸 사모은 나를 원망하면서.
(사진은 1985년도에 나온 왜 부모님이 사주신지 이해가 안 가는 책 2권. 그리고 왜 그걸 여태 버리지 않았는지 모르는 것도 미스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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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대여점 오픈 한 후.. 지금까지 처분과 구입을 반복하고 있네요. 책들은 겹쳐 들어온 것들 외에는 처분 안 하는데
특히 만화책들은 예전 양산형 학원 폭력물, 스포츠물, 인기는 없는데 완결까지 없는 작품 등등, 아는 미용실에 가져다주고, 식당에 가져다주고..;;
책장 비웠다 싶으면 제가 좋아했던 책들 다시 왕창 사모으면 다시 꽉꽉 차고.. 그러면 이번에는 이거닷~ 해서 성인만화들 처분하고
정리한 후 휑한 책장 보면 짜릿함을 느끼고, 다시 그곳을 꽉꽉 채우면 역시 기분이 아주 푸근합니다.
은근 책이 무게도 그렇고 부피도 만만치 않아서 이렇게 책장이 많아도 살 것은 아직 어마하게 많은 데 항상 부족해서 골치 아프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