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시가 역사상 가장 많은 비난을 받게 되는 군사적 행동을 개시했을 때, 나폴레옹은 수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장군들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낙관적이고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였으며, 저녁이면 브뤼셀에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여러 장성들이 영국군을 과소평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나폴레옹은 이를 나약한 장군들의 두려움 정도로 무시하며 코웃음 쳤다.
전투가 시작도 하기 전부터 나폴레옹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후세의 전지적 시점으로 보자면 나폴레옹은 늦어도 이날 9시에 전투를 시작했어야만 했다. 워털루 전투야말로 시간과의 사투였으며, 단 한 두시간이 세계의 운명을 바꿀만한 중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유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워털루 전투 전날은 그야말로 폭우가 쏟아졌는데, 선더랜드 대학의 기후학자 데니스 휠러의 재현에 따르면 워털루 전투 전 48시간 동안 쏟아진 비는 가히 '묵시록' 같았다고 한다. 전투 당일에는 비가 멈추었지만 필연적으로 메말랐던 땅은 눅눅해지고 물기가 가득찼으며, 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포병대를 운용하는데 큰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다. 현 영국 육군은 워털루 전투 당시 프랑스군이 사용한 대포를 뻘밭이나 다름 없는 지역에서 움직이는 일에 대한 시험을 행한 바 있다. 시험에 참여한 영국군의 대원들은 모두 건장한 남성들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피로를 느껴야만 했다.
어려움은 그 뿐만이 아닌데, 당시의 포병대가 가지는 실제적인 화력의 강력함은 도탄(跳彈) 효과에 있었다. 즉, 대포가 포탄을 쏘아대면 그 포탄은 땅에 튕기며 예측 불허의 움직임을 보이면서 적을 습격하고, 횡대나 종대를 이루고 있는 적은 이에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원리다. 헌데 포탄이 잘 튀기려면 지면이 단단해야 하고, 역으로 지면이 말랑말랑하여 도탄 효과가 약화되면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 어려웠다. 프랑스군은 이미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득을 얻은 사례가 있다. 괴테가 "세계사의 전환점" 이라고 까지 말한 발미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프로이센군은 서로 포격을 맹렬하게 가했지만 당시 땅의 상태로 인해 사상자는 양군의 규모에 비해 경미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보면 프랑스 포병대원들에게 있어 1815년 6월 18일은 최악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부관인 드루오 장군은 포병대가 작전을 제대로 시행하려면 4시간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적어도 4시간은 더 땅이 말라야만 포병대는 움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나폴레옹이 작전을 그날 아침에 곧바로 시행하지 않고 점심이 다 되도록 머뭇거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그럴듯한 이유는 핑계가 되지 못한다. 눅눅해진 땅으로 인해 포병대가 원할하게 기동 할 수 없는 것이 전투의 불안 요소 중 하나라면, 프로이센군의 다가옴은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었던 비교도 되지 않는 위협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궁금한것은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의 접근을 이 날 아침에 눈치 챘냐는 부분이다. 적어도 기미는 있었다. 아침 회의 당시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 보나파르트는 자신의 시종이 웰링턴을 지켜봤는데,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막내 동생을 비웃으며 이 정보를 무시했다.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나폴레옹이 오전에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를 합리화 한다고 치자.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나폴레옹으로서는 이를 기회를 날린 아쉬운 주변의 상황으로 여겨야 하겠지만, 딱히 나폴레옹이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아쉬워 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4시간을 낭비하고도 별로 초조해 하지도 않았다. 이를 영웅적인 대범함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여겨도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나폴레옹의 작전 계획이란 단순하고 무지막지 했다. 웰링턴이 그렇게 유도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웰링턴이 자리 잡은 워털루는 겨우 폭 3마일에 길이가 1.5마일에 불과한 지역으로 양군을 합쳐 도합 18만이 넘는 부대가 컴퓨터 게임처럼 움직이기는 어려운 지형이었다. 따라서 나폴레옹 특유의 측면 기동을 통한 천재적인 공세는 사실상 어려워 보였다. 나폴레옹은 6월 16일 카트르 브라와 리니를 오가면서 모든 시간을 다 보냈던 데를롱의 1군단으로 웰링턴의 좌익을 선제 공격하기로 했다. 데를롱 부대는 전투를 치루지 않았던 만큼 전력이 온전했다.
이런 단순한 전면 전투는 틀림없이 양측 모두에 있어 처참한 살육전이 될 수 밖에 없다. 나폴레옹은 이미 바그람 전투와 보로디노 전투에서 이러한 스타일의 싸움을 하여 익숙해진 참이었다. 나폴레옹은 곧 벌어질 싸움에 대해 거의 관여하지 않았고, 세부적인 계획과 실질적인 지휘를 모두 네이 원수에게 맡겨버렸다. 물론 나폴레옹은 이전에서 보병들의 세부적인 움직임은 수하들에게 맡겨놓곤 했지만, 적어도 이 날에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네이가 그 임무를 담당하지는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곧 증명될 터이지만, 이는 최악의 인선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렇게 기회를 낭비하는 동안, 나폴레옹은 적의 진영을 살피거나 아군의 병력을 사열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 사열 또한 반발을 가져왔다. 곧 이어 벌어질 최대의 격전을 앞두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려던 근위대는 나폴레옹의 갑작스러운 사열 명령으로 부리나케 움직여야 했으며, 여타 장병들은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는 욕설을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 장교는 이런 회고를 남겼다.
"우리가 아는 나폴레옹은 이제 사라져 버린 걸까?"
그러나 이날 오전, 나폴레옹이 취한 최대이자 분명한 실책은 따로 있었다. 오전 10시 경, 그는 휘하 장병들을 거느리고 프로이센군을 정처없이 찾아 헤매던 그루시에게 결전을 앞두고 있으니 돌아오려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 와브르로 진격하여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 프로이센군의 지원을 막아야 하니 당시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고 두둔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이 명령은 오히려 그루시로 하여금 프로이센군을 '웰링턴과 더 가까운 지역으로' 몰아가는 효과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오전에 참모총장 술트는 나폴레옹에게 '그루시의 병력 일부라도 이 쪽으로 돌리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는 제안을 한 바 있었다. 나폴레옹은 그 제안 역시 무시했다.
전투가 시작하려는 이 시점에서부터 나폴레옹은 패배의 씨앗을 여기저기에 뿌려놓은 셈이었다. 실질적인 지휘권을 과감하지만 충동적인 네이에게 맡겨둔 일, 영국군과 싸워본 경험있는 장교들의 의견을 묵살한 일, 프로이센의 지원 가능성을 알면서도 무시한 일, 그루시를 즉각 소환하지 않은 일, 무엇보다 4시간을 낭비한 일 등은 모두 그의 몰락을 초래한 일이었으며, 곧 이어질 전투에서 이 요소들 중 한가지만 바뀌었더라도 워털루에서 끝장나는 것은 나폴레옹이 아닌 웰링턴의 명성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 모든 요인은 전성기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었다. 한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략은 시간과 공간을 활용하는 기술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공간보다 시간이 더욱 중요하다. 공간은 되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전투에서의 패배는 용납할 수 있어도, 단 1분의 낭비는 용납할 수 없다."
1815년 6월 18일의 나폴레옹은 1분이 아닌 4시간을 낭비했다.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 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의 운명을 손아귀에서 흘려 보내고 있었다. 운명은 더 이상 그에게 예속되는 존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