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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09 19:25:24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악기로 울다.


사람이 만들어낸 건 대체로 명쾌하게 짧은 수명을 지닌다.

작년에 뒈진 내 친구라거나 올 여름에 떠나간 당신의 사랑이라거나 하는 거창한 이야기에서부터 집 앞의 분식집이라거나 군생활을 하는 동안 사라진 단골 술집같이 소소한 이야기까지. 그리고 뭐가 어찌되었던, 짧은 수명을 뒤로한 채 사라지는 것들은 사라짐이 주는 애잔함을 남긴다. 내 삶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고 나도 당비를 낸 것 말고는 별 도움을 못 준 사라진 사회당이라거나 하는 것도 사라질 때는 어쨌건 슬프다. 노인 특유의 상스럽고 질펀한 성적 농담을 수시로 늘어놓았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핏하면 애들을 패곤 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늙은 윤리교사의 부음도 3초에서 5초 정도의 애잔함을 자아낼 수 있는 것 아닌가. 기분에 따라서는 굳이 '사람이 만든 무엇'에 애잔함을 한정할 필요도 없어진다.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 발견한, 내 몸둥아리에 눌려 납짝하게 터진 나방의 사체 같은 것에서도 애잔함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다. 기분에 따라서는 어우야 제기랄 으으 하고 화장실로 튀어갈 수도 있는 일이고, 뭐.


이를테면 밴드 같은 것도 그러하다. 사실 나는 음악에 별다른 취미와 기재가 없는 쪽이라, 밴드의 생태에 대해서는 나방의 생태에 대해 아는 것 이상을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그저 밴드라는 것은 대학가의 바마냥 대체로 명쾌하게 짧은 수명을 가진다는 정도? 그러한 나는 대충 이년쯤 열심히 활동하고, 앨범도 내고, 뮤직비디오도 잘 찍은 밴드가 어떤 생태에서 어떻게 생존한 밴드인 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당신이 몇년 전에 어딘가에서 어떤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서 사랑하다가 올 여름에 헤어지게 된 대사건에 대하여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른다. 간단한 것이다. 내 일이 아니기에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내 일이 아니기에, 나는 애잔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슬픔이나 분노, 좌절이나 절망같은 강렬한 감정이 아닌, 흐릿한 미즈와리와도 같은 애잔함. 기분에 따라 굳이 유쾌할 수도 굳이 불편할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정도의 감정.

그저 그런 정도의 감정을 느낄 만한 일이 있었다. 대충 이년쯤 열심히 활동하고, 앨범도 내고, 뮤직비디오도 찍은 밴드가 해체하고 고별 공연을 했다. 지난 주였다. 마침 나는 공연 날 비번이었다. 마침 그날은 SK의 마지막 홈 경기가 있는 날이었기에 애인은 동생과 야구를 보러 갔다. 함께 일하는 바텐더에게 바를 맡기고 휘적휘적 홍대로 걸어나갔다. 그날의 기분은? 글쎄, 그닥 좋지는 못했던 것 같다. 원래 애인과 같이 가려고 했었는데, 애인은 결국 그녀의 동생이 마구잡이로 예약한 야구장에 가버렸으니 썩 유쾌할 건 없다. 약간의 미안함을 머리에 쌓아 둔 것 같기도 하다. 2년이면 한 번쯤은 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처음 보게 되는 공연이 해체 고별 공연이라니, 제법 미안할 일이기도 하다. 적절한 기대감을 어깨에 걸치기도 했다. 주변의 평을 들어보니 꽤 괜찮다던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공연인데, 좋군. 클럽에 근 두어달, 아니 서너달 만에 가는 건가. 애인에 대한 짜증과 애잔함과 미안함 같은 딱히 유쾌할 건 없는 기분들 사이로 한 웅큼의 기대감에 어깨를 맡기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어깨를 흔들며 걸었다. 날씨도 이만하면 좋고.

공연은 좋았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주절 주절 길게 쓸 건 없다. 그냥 좋았다. 인디밴드들의 꽤 많은 공연들에서 느꼈던 압도적인 미숙함이나 쓸데없는 노이즈도 없고, 밴드라고 쓰고 기타보컬 원맨에 나머지 세션은 거기에 질질 따라가는 무너진 밸런스도 없었다. 기타는 기타대로 좋았고 베이스는 베이스대로 좋았고 드럼은 드럼대로 좋았다. 아는 것에 대해 비유해보라면 밸런스 좋고 화사한 칵테일 같은 느낌. 강렬한 느낌의 술 세 가지가 같은 비율로 섞인, 심플하면서도 화려한, 네그로니 같은 느낌 정도였을까나.

공연은 좋았다. 공연자들의 표정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공연 전에는 다들 묘하게 기분이 업된 느낌이었다. 공연 중의 표정은 모르겠다. 최근에 그런 종류의 표정을 본 적이 없어서 어떤 표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지 모르겠다. 밴드를 해 본 적이 없으니 마지막 공연에 임하는 멤버의 자세나 표정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가 없다. 슬픈 표정인가. 그건 아닌데. 물론 슬프기는 할 것 같다. 아주 쓸데 없는 일에서부터 제법 쓸데 있는 일에 이르기까지, 명쾌하게 짧은 수명을 뒤로한 채 사라지는 무엇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슬플 것이다. 과잉된 희열의 표정으로 슬픔을 감추고 있는 건가. 글쎄, 그런 종류의 억지스런 표정 혹은 상황은 중학생이 쓴 소설이나 고등학생이 만든 밴드를 서술하는 데에나 적합할 것이다. 차라리 그냥 별 생각 없고 별 생각 없는 표정을 내비치고 있는 건가, 쪽이 현실적일 수도 있다. 디자이너 의사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그 밴드는 이전에도 음악을 했었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이전에도 연애를 했었고 앞으로도 연애를 할 계획인 당신처럼 말이다. 어쩌면 해체란 과정과 그 부산물인 고별 공연은 관성적이고 권태로운 평온한 작업인 지도 모른다. 현실적이지만 가능성 없는 가설인가. 관성과 권태 속에도 슬픔과 기쁨은 어쨌건 존재하니까. 보다 심플하게, 그저 후련함일지도 모를 일이다. 후련함. 애잔함의 좋은 동반자. 아니 좋은 동반자를 넘어서 애잔함의 스토커일지도 모르는 그런 감정. 뭐, 이것저것 섞여 있을 것이다. 약간의 슬픔도 있을 거고 약간의 평온함도 있을 거고 약간의 희열도 있을 거고. 대충 이것저것 섞인 표정이었을 거다. 이것저것 섞인 목소리였고. 표정의 칵테일. 슬픔을 베이스로 약간의 희열로 쓴 맛을 감추며, 평온으로 장식한다. 들어간 재료들의 각각의 맛에 대해서야 나도 당신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허나 그것들이 특정한 비율로 섞인 저 표정의 맛은 그걸 만들어내고 그리고 즐기고 있는 저들만의 것이겠지. 난 모른다.

적당히 살아온 나는 적당한 수의 '마지막 파티'를 본 기억이 있다. 이 회의를 마지막으로 이 모임을 해산합니다. 이 여행을 마지막으로 이 연애를 해산합니다. 이 모임을 마지막으로... 그때 그때 적당한 슬픔과 평온과 희열과 후련함과 이것저것이 섞인 감정의 칵테일을 마셨다. 나는 술과 손님 앞에서는 나 스스로를 나름대로 좋은 바텐더라고 자부하는 편인데, 삶과 감정들 앞에서는 글쎄올시다. 그닥 딱히 상황에 적합한, 편안한, 유쾌한 그런 종류의 감정을 조주해내진 못한 것 같은 기억인데.

공연자들은 잘 아는 감정들을 알 수 없는 비율로 조주한 표정을 짓고 공연을 시작하고 끝냈다. 공연은 명쾌하게 짧았다. 그리고 그들의 악기는 울고 있었다. 나는 악기마냥 간략한 애잔함을 느끼며 공연자들과 맥주를 몇 잔 마시고 공연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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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보이즈 뮤직비디오. 거리의 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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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공파일
13/10/09 19:41
수정 아이콘
파워트위터리안(?)이셨군요. 트위터하면서 꽤 본 익숙한 아이디였는데 헥스밤님이셨네요. 저번에 쓰신 장어구이집에 대한 글도 재밌게 봤어요.

정말 바로 앞의 예전에는 세상의 사소한 이야기들조차 이렇게까지 호흡이 짧지 않았던 것 같아요. 사회당도 끝나지 않았고 늙은 선생도 계속 애들을 괴롭히고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이 너무 짧고 빨리 끝납니다. 가장 굵직굵직하고 중요한 이야기들조차 전부 뚝뚝 칼 같이 끊어져요. 너무 너무 짧아서 내러티브가 멸망해버린, 그래서 시작인지 끝인지 구별도 안 가는 요즘의 한국 사회입니다.
13/10/09 20:34
수정 아이콘
헥스밤님 글 오랜만에 봅니다. 좋네요.
13/10/09 22:35
수정 아이콘
첫줄에 극히 공감되네요. 추천 한방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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