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제 게이모그라피를 반추해보건대, 제 천성은 운영(governance)이었습니다.
가장 몰입해서 했던 게임들:
문명4~5
심시티2000
FM10~12
심지어,
스타를 할 때도 운영형 토스였었죠.
그 와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가장 놀라운 순간은
사치재를 이용해서 시민의 불만도를 떨어뜨리는 문명 고유의 시스템이었습니다.
담배..술..연예인... 모든 종류의 사치재는 근본적으로 시민들을 만족시켜줌으로써 레짐을 공고히 해주는 주요 재재라는 걸 알게 되었죠.
하지만 그게 현실의 반영이라는 걸 체감하기 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국가 전반을 보았을 때, 실제로는 측정이 불가능하겠지만, 시민들이 갖는 불만의 총량이라는 게 아마 있을 겁니다.
이 수치(?)를 국민의 수로 나누면 1인당 불만량이 나올겁니다.
해당 사회의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 따라 1인당 불만량의 임계치가 각각 다를겁니다.
예컨대 1950년대는 왠만큼 불만이 쌓여도 '그래 그냥 견디자' 하고 말았겠지요.
요즘은 임계치가 좀 더 낮을테구요.

레짐은 이 불만량이 임계치 이상 올라가면 유지되기 힘듭니다.
이는 독재정권이든 민주정권이든 뭐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모든 독재정권은 해당 시민의 강려크한 지지를 받고 운영된다고 합니다.
리비아도..히틀러도..이집트도.. 모두 그랬죠.
리비아와 이집트에서 독재가 무너진 이유는... 일부는 SNS라고 말하고, 또 믿고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다름 아닌 곡물가와 실업률의 동반상승으로 빚어진 고도의 시민불만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정권 입장에서는 이 불만을 관리하는 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업무가 됩니다.
그래서, 물가통제와 사치재의 공급이 중요해집니다.



1. 담배.

한국의 담배값은 매우 저렴한 편입니다. 해외에 나가보면, 특히 서구권의 담배값은 정말 높습니다.
물론 대부분 세금 덕분이지요.
일전에 배낭여행을 하면서 흥미로웠던 것들 중 하나가, 현지 한국인 숙소에서 돈이 아닌 담배로 숙박비를 받았다는 겁니다.
배낭여행객들은 면세점에서 담배를 한 보루 씩 들고 나올 수 있으니, 현지 담배값과 면세 담배값 사이의 차액을 노린 소규모 무역(?)인 셈이지요.
또, 우리의 구매력이 태국의 5배라고 하는데요, 태국과 한국의 말보로 값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


2. 소주

공장 출고가가 아마 병당 390원 수준일겁니다. 그나마 수년 전에는 370원 수준이었는데 조금 올랐다더군요.
어떻게 이렇게 쌀 수 있을까요?
먼저 원료... 지금은 안쓰지만 예전엔 폐당밀 등 식용으로 써도 될지 의심스러운 재료들을 발효시켜서 주정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대개 수입산 타피오카나 고구마, 옥수수 등 가격이 낮은 저품질 곡물재료를 써서 발효시키죠.
이걸 몇 번의 처리를 통해 순도 95% 이상의 에탄올로 만듭니다.
이걸 주정이라고 부르죠.
각종 주정 회사에서 만든 이 원재료는... 그 이름이 뭐였더라, 한국주정판매회사? 뭐 그런 희한한 회사가 독점해서 사갑니다.
이 회사의 지분 구조를 보면 우리나라의 온갖 주류 메이져들이 지분을 나눠갖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튼, 이 회사가 다시 각종 주류 메이져들에게 주정을 되팔고,
이 주정에 물을 타고 감미료를 넣어서(아스파탐, 스테비오사이드 등등) 소주가 되는 거죠.
그러니, 우습게도, 참이슬이든 처음처럼이든 뭐가 됐든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물과 감미료 외에는 차이가 없어요. 모두 에탄올에 물타고 설탕 섞은 거니까요.
맛의 차이는 그냥 감미료의 차이입니다.

각설하고, 이런저런 구조로 인해 저품질의 희석에탄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잘 아시다시피, 무수한 한국인이 심적 고통을 견뎌내는데 공헌을 했고, 해왔죠.



3. 로또

기대값이 200원을 밑도는 종이를 천원에 팝니다.
김선달이 식은땀 흘릴 사업이죠.
대동강물은 그래도 마시면 시원하고, 씻고 닦아야 하고, 운반비도 있고, 뭐 값을 치를만한 여러가지 정황이라도 있습니다.
이 종이는 똥도 못닦는 폐지입니다.
1000원을 추면 200원을 돌려주는 종이.
그걸 매주 수백억어치를 팔아치웁니다.
그걸 산 사람들은 희망을 샀다며 자위하지만,
누군가가 그 희망을 팔아서 자신들의 고통과 불만을 '완화'하고 있다는 건 알지 못하죠.







위의 상품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2천원 미만의, 국가에서 (사실상) 독점하거나 혹은 아주 강려크하게 통제하는 제품들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치 과거 동아시아사회에서 차와 소금의 전매가 그러했듯, 세수에 중요하다는 공통점도 있군요.

시민들의 불만 총량을 통제하고, 동시에 세금도 걷고...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참 달콤한 것들이죠.

더 나가자면 경마, 경륜, 경정 등 국가독점도박장들, 혹은 내국인 카지노 등이 있겠습니다.

모두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불만통제와 세수확보.




더 우아하고 더 인간다운 방법으로 공동체를 운영할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아니면 있지만 그것을 적용할 의지가 부족한 걸까요?

서민들은 언제까지 참이슬 한 잔에 디스를 태우며 쓰린 속을 달래고

매주 부질없이 로또를 한 장 씩 사서 토요일 오후 티비 앞에서 손에 땀을 쥐어야 하는 걸까요

그 속을 쓰리게 한 건 보다 큰 규모의 다양한 사회구조 때문일 텐데요.

마치,

냄새를 없애는 게 아니라, 더 독한 향으로 덮어버리는 싸구려 방향제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비오는 날 오전 감회가 있어 주절거려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