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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2/09 19:17:51
Name Hazelnut
Subject [일반]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긴다.
12월 어느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차에 시동을 키고 히터를 틀어놓고선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하나 태운다.

취업난 속에서도 대학을 졸업한지 3개월도 되지 않아 직장을 찾은 것은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지만 여전히 아침에 나를 감싸는 공기는 잠을 깨우지 못한다. 오늘은 상사가 무슨 얼토당토 않는 이유로 날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무능하며 무식한데다 눈치도 없는 패배자로 만들까 하는 불안감은 나의 출근길을 불쾌하게 만든다.


'내가 이래서 담배를 못 끊지'


스트레스 때문인가? 차 유리창에 반사되어 비춰지는 내 피부가 부쩍 건조해진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나를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던 여드름은 이제 날 괴롭히지 않지만, 없애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깊히 박혀버린 흉터와 자국들은 나의 찌질하고 소심했던 과거를 비웃는다. 그래도 난 떳떳하게 4년제 대학도 졸업했고, 가족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고, 아픈 곳도 없고, 직장도 다니면서 돈도 버는데 걱정할 때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깟 여드름 흉터따위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겠지.


'아씨 막히겠네. 슬슬 출발해야겠다.'


마지막으로 남은 담배 한모금을 깊히 빨아들이고 나 자신에게 힘내라고 말하려는 듯 차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난 충격과 함께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떨어트리고 나의 얼굴을 좀 더 가까이 관찰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24년동안 내가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긴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눈주름이라고?"


나는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계속해서 유리창을 보며 웃었다. 사라지지 않는다. 조금의 눈웃음에도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친형과 사촌누나에게 눈주름에 대해 이야기하자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너 원래 웃을 때 눈주름 생겨. 몰랐어?"


배신당한 기분이다. 왜 말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언제부터? 왜? 나 왜 눈주름 생긴거야?"


나의 한층 신경질적이고 쏘아붙이는 언성 때문에 형이 인상을 찌푸리고 대답한다.


"옛날부터 멍청아. 그리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눈주름이 뭐. 너 설마 니가 늙어서 생긴거라고 생각하냐?"




사실 그랬다. 어딜가나 동안이라는 소리도 듣고, 어렸을 때랑 외모가 변한게 없다는 가족들과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난 계속 어릴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앞으로 최소한 10년은 어려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눈주름 때문에 더이상 동안이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게 계속 신경쓰였던 것이다.


"...늙어서 생기는거 아니야?"

"주둥이 봉인시키고 가서 일이나 해라."


그날 나는 무슨 일을 했고, 상사가 나에게 무슨 말로 모욕감을 주었으며, 동료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루종일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기는 나의 모습만이 머리를 휘젓고 있을 뿐이었다. 여자들이 싫어하면 어쩌지? 웃으면 늙어보이니까 사람들이 나보고 웃지 말라고 하면 어떡하지? 눈은 가만히 있고 입만 웃는 연습을 해볼까? 아니야 그건 웃는게 아니잖아.

핸드폰을 꺼내들고 내 10년 친구인 김군에게 카톡을 보냈다.


"어이"
"왜"
"나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긴다"
"어쩌라고"
"너도 알고 있었지?"
"그게 뭐가 중요한데"
"알고 있었냐고"
"이응이응 나 일해야돼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이럴수가. 왜 다들 비밀로 한거지? 내가 상처받을까봐 그랬나? 안되겠어. 엄마는 설마 모른척하지 않으셨겠지? 집으로 가자마자 누군가 현관문을 거칠고 열고 들어오는 소리에 엄마가 부엌에서 뛰쳐나오셨다. 그리고 나인 것을 확인하고는 왔냐는 말 한마디와 함께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엄마에게 다가가 물었다.


"엄마, 나 웃을 때 눈주름 생겨"

"뭐?"

"웃을 때 눈주름 생긴다고. 봐봐"


내가 표정을 짓고 눈주름이 느껴지는 곳에 손가락을 갖다대고 얼굴을 감싸자 엄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신다.


"상사가 또 지랄하든? 왜 그래?"

"나 왜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기는거지?"

"왜긴 왜야 니가 아빠 닮았으니까 그렇지. 니 아빠도 젊었을 때부터 웃을 때 눈주름 있었어."


엥? 아빠가 웃을 때 눈주름이 생기신다고? 처음듣는 이야기고 그려지지 않는 모습이다. 내 기억으로 아빠는 웃으실 때 눈주름이 생기지 않는다. 엄마는 아직도 내가 눈치없는 멍청이라고 생각하시는건가? 그런 뻔한 선의의 거짓말로 내가 위로가 될거라고 생각하시는건가? 난 믿지 못하겠으니 엄마에게 아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밥 해야되니까 귀찮게 하지 말라고 성을 내셨지만 내가 계속해서 요구하자 한숨을 쉬고는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사진 한장을 툭 던지시고는 다시 부엌으로 가셨다.


사진의 날짜는 아빠가 24살임을 알려주는 시간이었고, 그 사진에는 아빠와 엄마가 행복한 웃음을 짓는 다정한 모습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눈가에는 나와 똑같은 주름이 자리잡고 있었다.










아빠한테 물려받은거였구나. 그렇지. 내가 늙어보일리가 없지. 난 아직 충분히 어려보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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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09 19:40
수정 아이콘
따뜻하고 재미있는 발견이네요.
12/12/11 10:31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흐흐. 역시 주름은 입가랑 눈주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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