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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04 15:53:09
Name 유리별
Subject [일반] 인생 최대의 난제
당장 내일아침 길가에고인 물이 얼어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이 차가운 가을입니다. 어찌나 바람이 부는지 창문을 뚫어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됩니다. 바람소리가 마치 폭주족 오토바이 몰고 가는 소리 같네요.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유리별입니다.

더위에 손도 못쓰고 녹아버리는 얼음마냥 올 여름은 흐느적거리며 간신히 지냈습니다. 지구가 미쳐버린 건 아닐지 의심스러울 만큼 힘든 여름을 보냈더니 올 해 여름이 있긴 있었나 뭘 하고 살았나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은 순식간에 잊는 기억력 덕분입니다. 나쁜 일은 쉽게 잊어 그런 일이 있었는가 싶은 건 참 좋습니다. 좋았던 기억, 남기고 싶은 행복했던 기억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부작용만 없으면 참 좋을 텐데 역시 신은 공평하게 하나를 주면 하나를 뺏으십니다. (빈느님은 예외입니다. 그분은 사람이 아니니까요 :)

낡은 아파트단지의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루 종일 바라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곱게 물든 아름다운 가을이 찬란합니다. 햇살이 내리면 훨씬 예쁠 텐데 가을비를 내릴까말까 고민하는 하늘 덕에 오늘은 가을빛이 기운이 없습니다. 바람에 뺨맞아가며 남들 다 쉬고 노는 주말에 출근하는 것도 억울한데, 데이트하러 나와서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다투는 커플 덕에 더 심술이 돋습니다. 여기 이렇게 출근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랑하러 나왔으면 눈꼴시게 붙어 다니면서 약이나 올릴 것이지 무슨 여유가 넘쳐흘러 저리 싸우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남자에게는 여자가, 여자에게는 남자가 인생 최대의 난제인가 봅니다. 도무지 정복이 되질 않습니다. 머리를 쥐어뜯어도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이나 원망스럽지는 않을 만큼 눈앞의 저 사람이 어려운가 봅니다.

아니, 실은 스스로가 어려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입힌 상처가 얼마나 아프고 깊은지 있는 힘껏 드러내 보이는 저 사람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톤의 어떤 목소리로 사과를 해야 비늘처럼 돋아난 마음을 잠재울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고 내 잘못을 하나하나 꺼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도 조금은 밉습니다. 말을 잊은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함부로 말했다간 이 긴장되고 민감한 순간 상대가 또 어떤 식으로 받아들일지도 계산이 되질 않습니다. 차라리 소리 지르고 화를 내고 서로를 할퀴면 쉬우련만, 저 두 사람은 그래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가 봅니다. 아마도 최대한 상대에게 상처를 적게 입히면서,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을 고르느라 저리 노려보고 있는 것이겠죠. 마음을 가다듬으려 애쓰느라 손도 떨리고 말입니다. 저건 어떻게 해야 잘 마무리가 될까요? 그런 방법이 있기는 있을까요?

역시, 그냥 눈꼴시게 붙어 다니는 쪽이 맘 편히 얄미워할 수 있어 낫습니다. 고민해봤자 답도 안 나오고 영 꼴보기싫어 잠시 머무르던 시선을 거두고 가던 길을 재촉합니다. 과연.. 뭐라고 말했어야 했을까요. 뭐라고 사과해야 했을까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어렵기만 합니다. 입술에서 말이 떨어지자마자 떨리던 눈동자에 상처가 패이던 모습을 잊을 수는 있을까요. 말을 고르고 고르다 결국 포기를 담은 그 깊은 한숨을 지울 수는 있을까요.

망할 가을이 너무 따뜻해서 저리 여유가 생기나봅니다. 확 더 추워지면 서로 싸울 틈도 없이 딱 붙어 다니겠죠. 견디기 힘들만큼 더운 여름을 보내서 올 겨울은 아주 많이 추울 거라고 합니다. 지금 인생최대의 난제를 붙잡고 끙끙 고민하시는 분들 건승을 빕니다. 전 겨울맞이 손난로나 준비하고 옷 한 겹 더 챙겨 입고 그냥 난제고 뭐고 없이 한가롭고 홀가분하게 지낼 랍니다. 이불 둘러쓰고 귤 까먹으며 따뜻한 방에 앉아 롤이나 한판 땡기면 훌륭하게 휴일을 지낼 수 있는데, 뭐 하러 추운 날씨 뚫어가며 나가서 딱 붙어서 달달 떨고 다니나요.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신다면 기분 탓입니다. 귤이랑 고구마랑 따끈한 방에 이불!! 그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겨울준비 다들 잘 되어 가시나요? 가을이 왔으니, 종종 찾아뵙고 싶습니다.




- 유리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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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04 16:25
수정 아이콘
모르겠어요.. 왜 이제서야 그 사람이 많이 힘들었을거란 생각이 드는지..
더욱 미안한건 점점 잊혀진다는거에요. 그래서 결국 똑같은 잘못을 다시 저지를거 같아서 조마조마하기도 해요.
그래서 유리별님 말대로 차라리 소리치고 화내고 푸는게 더 나았을 수도 있었겠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12/11/04 16:46
수정 아이콘
이번 여름 정말 더웠는데. 올해도 겨울이 오면 여름이 그리울까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연애는 참 어렵습니다. 한쪽이 부처가 되어야하는게 연애인가봐요. 말로 안되는게 참 많아요. 대화도 사실 마음을 받는거지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는건 차지하는 비중이 적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에효... 왜 갈수록 부처가 되가고 있는건지.
사티레브
12/11/04 16:47
수정 아이콘
그런 사이였다면 계산보단 충동하는 진심으로 다가갔어야 했는데
왜 할말이 있었는데 못하고 그냥 끝난건지 의문나는 인생의 한 점들이 떠오르네요

패딩을 입을 때가 오고있어요
라리사리켈메v
12/11/04 17:36
수정 아이콘
어버버버버버...
이거구나
눈시BBbr
12/11/04 17:45
수정 아이콘
맨날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를 반복하는 커플을 변신합체로봇이라고 놀렸었죠. 놀렸다기보단 짜증냈다고 해야 되나. 심심하면 불려와서 들어주고 걱정해줬는데 나중에 보니 또 화기애애하고 -_-; 그러다가도 내 앞에서 또 싸우고 말이죠. 전국 곳곳에서 싸웠던 추억들을 아로새겨놓고 그걸 얘기하면서 또 싸우고, 그러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건 또 그들의 방식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뭐 그들 입장에서는 진지하겠죠. 그 때 당시도, 나중에 그 일을 회상할 때도요
정말 모르겠어요 orz
그래도 싸우기보단 염장 지르는 게 보기 좋긴 해요
12/11/04 18:23
수정 아이콘
유리별님 오랜만에 자게에서 뵙는 것 같네요. 댓글부터 달고 감상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려요
Mooderni
12/11/04 18:35
수정 아이콘
무언가 가슴에 담은 말들을 제대로 하지 못한채 끝난
지난 9월의 이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게
왜인지는 잘모르겠지만 하나의 위로가 되는 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글 부탁드려요~
천진희
12/11/04 22:58
수정 아이콘
역시 겨울엔 따뜻한 이불 속에서 귤을 까먹으며 옆에 만화책을 쌓아놓고, 롤을 하는 게 최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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