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186번 훈련병과 188번 훈련병 사이에 끼어 자다 코고는 소리에 깬 2주차쯤의 심야였다. 다리를 내 배에 올린 186번을 뻥 차버리고, 친히 내 모포를 뺏아간 188번의 품에서 모포를 탈취한 뒤에 가만히 앉아 푹 하고 한숨을 쉬었다. 불침번도 아닌데 잠에서 깨는 일은 유쾌하지 못했다.
문득 방금까지 꾼 꿈이 떠올랐다. 익숙한 서초동 사거리에서 웃고있는 남녀의 모습과, 그것을 멀리서 보고있는 나. 그저 그 장면 하나만이 머리에 남아있었다. 어째서? 라는 의문을 갖기전에 갑자기 몰려드는 알 수 없는 마음들이 있었다. 훈련소 입소날, 몇 개월이나 멀어져있던 사람에게 말을 걸어 어색한 인사와 애매한 거리를 다시 만든 채 들어온 이 장소. 모두가 잠든 그 밤에 난 홀로 어떤 이상한 기분을 맞이했다. 그것은 일종의 회한이나 후회같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논리적인 것이었다. '왜?'라는 질문은 불침번이 내게 라이트를 비추며 왜 안자냐고 묻고나서도 끊이지 않았다.
나는 왜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가
나는 왜 그 사람을 아쉬워 하는가
나는 왜 그 사람에게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이라거나 호감과는 또 다른 것이었다. 왜라고 끊임없이 묻는 나는 그것에 명확한 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나 질문이 이어지고 동 트는 새벽녘이 가까워질수록 드는 마음은, 무언가 비뚤어져 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었다.
나는 애정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거는 기대나 칭찬에 너무나 목말라해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기대나 칭찬, 타인의 사랑이 부족하기만 했던 기간은 너무나 길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그런것에 메말라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주는 약간의 마음씀씀이에도 나는 크게 울컥이고는 했다. 그 사람은 내게 몇 안되는 그런 사람이었고, 나는 그런 사람에게 언제나 매달리고는 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관심을 쏟아준다는 것에 대한 행복과 감사는 그런 감정에 대한 갈증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묘한 심리였다. 감정에 대한 부정과, 욕망에 대한 긍정이 뒤섞이며 벌어지는 마음 속 설전. 그것은 그녀가 내 속에서 가지고 있던 위치를 여러번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내가 더 이상 남에게 감정구걸을 하고싶어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군사훈련의 성과라거나, 단체생활의 여파같은 것과는 달랐다. 정말 나는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던 매일에서 그날 새벽, 딱딱한 침상과 얇은 모포사이에 앉아 더 이상 고개숙여 걷고싶지 않다는 욕망이 찾아온 것이다.
훈련소 수료식이 끝나고 난 지금, 난 아직 아무 말도 건네고 있지 않다.
어느새 훌쩍 지나간 시간을 재어보니 짧지가 않았다.
비단 그 사람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묘한 심리가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결핍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던 견디는 삶이
결핍이 있다 하더라도 열등하지 않다고 이해하는 삶이 되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조금 더 나 자신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육체적으로 고되었지만 참 재밌고 보람있었던 훈련소과정에서
어쩌면 정말 마음에 큰 씨앗 하나를 품어온것이 아닌가 하는 기대에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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