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꺽 꿀꺽
목을 타고 시원한 생맥주가 넘어간다. 으레 그렇듯 우리가 모였을 때는 이야기가 별로 없다. 가게 근처에 새로 생긴 이자까야의 사장님은 우리에게 시킨 안주의 두배만큼의 서비스를 주셨다. 그것은 일종의 '새로 오픈했으니 잘 부탁한다'라는 메세지와 함께, 몇 가지 이 동네에 대한 정보를 가져가겠노라는 선언이기도 하였다. 더불어, 아 너무 맛있어요 하고 말하지 않고서는 불편한 술자리를 만드는데에도 기여를 하였다. 뭐, 그렇지만 진짜 맛은 괜찮았다. 아주 뛰어나지도 않지만, 충분히 먹을만 한. 그래서 우리들은 조용히 셋이서 일곱개의 안주를 해치우고 18잔의 생맥을 시켰던 것이다.
"그러니까 넌 나쁜 남자네! 여자마음도 모르는 자식 같으니.."
세시간 동안 일곱개의 안주보다도 더 훌륭한 안주거리가 있다면, 그건 사랑에 실패한 사람을 까는 일이라고 느꼈다. 나는 참 비겁한 놈이라고도 생각했다. 으레 사랑하다 잘 안된 사람들이 그러하듯, 혹은 남자들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나간 여자에 대해 왠지 모르게 내가 주도권을 갖고있었다는 뉘앙스로 말을 하지 않는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렇게 으쓱 하며 이야기 하는 나. 그리고 그런 나를 머리 구석에서 쯧쯧 하며 혀를 차는 내가 또 있다. 뭐 어때, 솔직하고 찌질한건 글로 여러번 했으니까 여기서는 좀 그러자고. 라고 생각했다. 쪽팔리기도 하고, 정신승리라도 할까 하는 마음에 말이다.
테이블은 뜨끈뜨끈 달궈졌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에, 몇 마디 대사를 약간 자극적으로, 그리고 몇 마디 대사를 생략함으로 인해서 내가 아닌 두 남자는 신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 여자는 내게 반했고 모든걸 다 주고 싶어했는데 그걸 내가 거절도 아니고 애써 무시했다는 이런 상상을 말이다. 나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래, 이거야. 이 정신승리의 기쁨. 나는 제발 날 그만 까라며 고개를 내저었지만, 진실보다는 훨씬 행복했다. 나쁜남자네, 니 자존심 지키려 했네, 그러면 안되지 같은 꾸지람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나아졌다.
이야기가 끝날때 쯤에는, 나는 한 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는데 그 사람들은 내게 '줘도 못 받는 놈'이라며 낄낄 대었다. 나도 역시 실없이 낄낄 대었다. 뭐 남자들끼리 술자리가 이런게 아닐까. 실패한 놈은 실패한 대로 센 척을, 그걸 들은 놈들은 전문가가 되어 신나게 욕을. 다들 그럴거라며 내심 허세부린 내게 면죄부를 슥 던졌다. 그 쯤 적당히 새로 오픈한 가게 주인분께 잘 되실거라는 인사를 건네고 입발린 칭찬 몇 마디와 감탄사를 남겨둔 채 우리는 가게를 나섰다. 안녕, 잘가, 빙신 같은 인사로 함께 마신 사람들을 보내고 금세 올라온 취기에 집으로 향했다. 마침 적당한 벤치가 있어 앉았다.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다.
"지금 니가 숙이고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넌 고작 열흘 연락 안받았다고, 그 여자는 자존심이 얼마나 상하고 맘이 긁혔겠냐. 넌 그 맘도 안 헤아려주고 그만 두자고 통보하냐? 어휴 이 등신.."
하필 그 날 먹은 욕이 떠오를게 뭐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 한건 다 내 잘못이다. 술자리에서 솔직해 뭐하냐 싶어서, 누구한테도 그 사람과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았다. 어색하기도 하고, 수줍기도 하고. 다 털어내자니 그러면 안될 것 같고. 그래서 익명의 힘을 빌려 여기서만 그 마음을 조금씩 남겨두었다. 이제는 연락을 하지 않는 그 사람과 나의 일을 정확히 아는건 나와 그 사람밖에 없다. 어쩌면 그 사람은 그 주변사람들에게 이 상황을 물어봤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러니까 사실 그 날 썩 괜찮은 안주와 맥주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는 허구란 말이다. 내 정신승리를 위해 내가 짜놓은 판이라고. 근데, 근데 이상하게말이지. 그게 참 믿고싶은 거짓말이 되어버린 거다. 조금만 까딱하면, 그게 진실인 것처럼 믿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그 사람이 내가 당신을 찾아오길 기다린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마냥 전화하길 기다린다고. 진실어린 말에 움직여 줄 테니 빨리 찾아오라고.
그러니까, 잘 정리하는 와중에 전화가 하고 싶어진 거다. 상황에 대한 인식이 헝클어지는, 오로지 취한 자의 특권인 취중진담을 해 보고저 전화를 꺼낸것이다. 주변에 한 번 털어내 보지 못한 이야기의 파편을 던진 것 만으로도, 그렇게 내게 유리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가지고 들은 말 만으로도 무언가 바뀔 거 같다는 기대가 드는 것이다. 때마침 달도 크고 보름달이다. 날씨도 좋고, 가로등 사이에 비친 떨어져가는 벚꽃잎도 좋다. 그래서 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전화를 하지 못했다. 전화기를 꺼내 그 사람을 찾으니까, 내가 정신승리를 한 것이 진실은 아니라는 걸 강하게 알게 되더라. 우리의 기록은 연락리스트에도 이제 올라오지 않을만큼 먼 곳에 있었다. 그게 당신과 내가 있는 거리임을 알았다.
여자에게도, 친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하니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그건 온전히 내 안에서만 계속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할 따름이다. 그 사람에 대해서는 나만 알고 있다. 가만히 담아두고 있다. 그 사람이 내게 당신만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거라며 수줍게 웃었던 것 처럼, 나도 여전히 당신이 내게 해준 이야기들을 가만히 담아두고 있다. 아직 좀 아쉬운 것이다. 못내 그리운 것이다. 당신을 술자리에서 난도질 하고 그 다음의 발걸음을 내밀기에는, 당신과 나는 너무 평화로웠던것 같다. 그래서 아직도 당신은 내게 비밀스럽다. 청춘의 한켠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칼같이 자르는게 상냥한 것이라던 당신의 말이 생각난다. 그건 상냥한게 아니야- 당신도 결국 허세덩어리 바보였다. 우린 참 끼리끼리 만나서, 끼리끼리 이렇게 찔찔대고 있겠거니. 하니 풋 하고 웃음이 난다. 많이 닮았던 당신이니까 아마 비슷하게 어디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그러고 있겠지 싶다. 우리 할머니라면 이랬을 것이다. 참 여러가지다, 여러가지여. 망할년놈들이 참 여러가지여!
그래서 허세투성이 남자놈은 쓸 데가 없다. 술자리에서 자신의 사랑을, 혹은 실패담을, 그 외의 것들을 마치 내가 다 그 상황들에 통달했던 사람처럼 말하는 놈은 바보다. 솔직하게 아프다고, 아직도 슬프다고, 그딴 허세를 다 걷어낸 채로 치부를 죄다 테이블 위에 끄집어 내어서는. 미친놈 마냥 그 사람이 생각난다고 생각난다고 같은 말을 술에 취해 몇 번이고 반복하다가, 이내 야, 한잔 더 하고 힘내 임마! 하는 말을 듣는놈이야 말로 좋은 놈이다. 근데 난 그럴 수가 없다. 이렇게 정신승리라도 하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의 조언대로 소설에서라도 그 사람과 다시 만나도 보고, 느껴온 마음들을 죄다 쏟아내 보고, 비슷한 감정을 노래한 노래들에 빠져도 봤지만. 그래, 결국 아직도 현실에서 나에게 그 사람이란 그런 것들로 사라지지 않을 사람인 것이다. 정말로 허세를 부리지 않고서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 하게 된다면 그걸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믿고싶은 말을 듣기 위해서 난 비겁한 허세를 부렸다.
이 글을 읽을 리 없을 당신도 좀 비겁해 질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좀 나쁜놈이 되어있겠지 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잊지 않아준다면 감사할 뿐이다. 당신도 나도 서로 남들에게 허세밖에 부릴 줄 모르니까, 다음에 우리 둘 사이에는 이제 그러지 말자. 상냥하긴 개뿔- 하면서 감자탕에 소주나 말아서, 그렇게 얌전 떨거 없이 이 사이에 들깨가루 고춧가루 끼어가며 떠들자. 뭐 어떠냐, 난 당신이 좋다. 이제까지 너무 조심스러웠던게 화가 날 정도로 후회되니까, 다음에는 변한 내게 당황하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어차피 조심스럽게 하려고 했던 사랑은 한 번 실패했으니, 이제는 그냥 비비적대며 좋은거 나쁜거 투닥거리며 앵앵대고 왁왁거리며, 그렇게 만나자고 말하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