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삼국지 5 ost 화룡진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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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거북배에 쓸 돛베 스물아홉 필을 받았다.(1592년 2월 8일)
겸하여 거북배에서 대포 쏘는 것도 시험했다.(3월 27일)
식사를 한 뒤에 배를 타고 거북배의 지자ㆍ현자포를 쏘았다. 순찰사의 군관 남공(남한)이 살펴보고 갔다.(4월 12일)
이상이 난중일기에서 볼 수 있는 거북선에 대한 기록입니다. 특히 순찰사 휘하 군관이 보고 갔다는 건 이순신이 단독으로 만든 게 아닌 상부에 보고되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임진왜란에서 스타로 떠오른 거북선은 이렇게 등장합니다. 정말 드라마틱하게도 임진왜란 발발 전날에 말이죠.
이충무공전서와 이순신 행장, 기타 시중에 나온 이순신을 다룬 수많은 책들에서 거북선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저 거북선에 대한 몇 가지 논란들만 소개하고 거기서 제 입장이 어떤지만 다뤄보고자 합니다.
1. 여러 논란들
거북선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돌격선이죠. 바깥에서 거북선을 공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드러나는 곳은 노구멍과 포구멍 정도. 럭키샷이라고 하죠? 그런 식의 공격이 아닌 이상 거북선에 피해를 입히기는 어려웠죠. 다만 부산포 해전에서 거북선에서의 피해가 가장 큰 것으로 보아 공간이 좁은 이상 맞으면 피해도 커질 수 있다는 게 드러납니다. 특히 부산포 해전에서는 조선군의 화포가 쓰였으니까요.
거북선은 특히 일본에서 조선 수군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메구라부네. 장님배라는 뜻으로 어떻게 해도 공격할 수 없는 배로 여겨졌죠. 머리에 거북을 단 건(하지만 이순신은 애초에 용머리라고 했습니다.) 거북이든 용이든 나쁜 기운을 쫓는 의미로 쓰였고, 적에게도 이건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특히 등 위에 칼을 박음으로써 백병전을 전개할 수 없다는 건 일본군에게 정말 컸을 겁니다. 거적을 씌워놔서 몰랐다가 뛰어 드니 꽂혀 있는 창칼이 온 몸을 찌르죠.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여과 없이 나오더군요.
그럼... 논란거리를 좀 찾아보겠습니다.
1) 최초가 아니다
태종 때 거북선을 만들어 시험해 봤다는 기록이 있죠. 근데 의외로 여기에 집착하는 사람이 보이더군요. -_-; 최초가 아니라는 게 왜 이순신을 까는 근거로 쓰이는지 의문입니다. 아무튼 최초 아니구요. 화포와 원거리 무기가 장기인 이상 적의 공격을 막으면서 안전하게 공격한다, 이런 개념을 이전에 누가 했다는 게 신기하진 않습니다. 다만 저 거북선이라는 게 후에 제대로 쓰이지 않았죠. 더구나 판옥선이 주력이 된 임진왜란 때와는 형태가 또 달랐을 거구요.
또한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 역시 정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네요. 자세한 건 나대용 얘기하면서 다루겠습니다.
2) 철갑선
제 입장은 "아니다"입니다. 당시 기록에 아예 없거든요. 난중일기, 실록, 이충무공전서 등 어떤 기록에도 철을 둘렀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저 등에 칼침을 꽂았다는 것 밖에는요. 그저 참전 일본 장수들의 기록에서나 "철갑이 아닐까?" 수준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주로 인용되는 게 정한위략인데 이게 사람마다 번역하는 게 다릅니다. "철갑을 둘러서" 혹은 "철갑을 두른 것 같아서" 이런 식이죠. 원문은 못 찾겠네요. 한국에서 철갑선을 처음 주장한 것은 유길준. 하지만 이 사람은 조선 말 사람으로 친일파로 분류되는 사람입니다. 일본 기록을 보고 그렇게 주장했을 거라는 거죠.
난중일기에는 당연히 철 얘기가 나오지 않으며, 이충무공전서, 행장 어디에도 나오지 않고 그저 "등에 철을 둘렀다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무만이 보일 뿐이죠.
애초에 철을 뒤집어 씌워야 될 당위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군에겐 화포가 없었습니다. 그냥 방호력의 기능만 필요하지 그게 미친 듯이 강할 필욘 없었죠.
김경진, 김병륜님(신재호, 번동아제)님 등도 거북선에 대해서 철갑선이라는 기록이 없다는 데에는 동의하시는 듯 합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부정할 순 없어서 여러 방면으로 가능성을 찾아 보고 있으시더군요. 철갑선이라고 하지만 이 철갑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서양의 선박도 해전이 진행되면서 일부분에 철을 덧대기는 했거든요. 근대에 등장한 서양의 장갑함도 철만 두른 게 있고 경제성 때문인지 급속과 목재를 같이 쓴 복합함의 모습도 보입니다. "철갑선"이라는 사실에 집중하다가 이런 정의도 확실히 세우지 않은 듯 합니다. 따라서 "철로 덮으면 그 무게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철갑선이 아니라는 주장도 설득력은 적긴 합니다.
"일본이 자기들이 진 걸 변명하기 위해 철갑선이라는 걸 강조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뭐 이에 대한 건 그냥 개인 판단에 맡기기로 하죠. 저는 철갑선 설은 부정합니다. 거북선의 의의는 세계 최초로 실전에 쓰인 장갑함이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일본에도 철갑선에 대한 기록은 있습니다. 오다노부나가가 해전에 강한 모리 수군과 맞서기 위해 휘하 구키 요시다카(임진왜란 때 온 그 인물 맞습니다)에게 철갑선을 건조하게 한 거죠. 오오아다케후네, 대안택선이라 불립니다. 이게 크게 활약을 하긴 했지만 철갑선 여부는 일본 내부에서도 의문시 되고 있으며, 이후 쓰이지 않은 걸로 봐서 기동성은 없다고 봐도 될 겁니다. 멍텅구리 배(자체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라는 의견도 있더군요. 뭐 대항해시대나 신장의 야망에 신나게 등장하긴 하지만요.
3) 2층? 3층?
거북선이 몇 층인가가 사실 거북선 논쟁에서 가장 큰 쟁점입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구조가 달라지니까요. 2층이라면 (갑판 밑이 1층입니다) 격군과 화포가 같이 있는 구조가 됩니다. 3층일 경우 판옥선 위에 그냥 껍데기를 씌웠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북선에 대한 그림들을 좀 동원해 보죠.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두 가지 형태의 거북선입니다. 각기 "통제영 거북선" "전라좌수영 거북선"이라 불리죠. 이 중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비슷하다고 하는 게 통제영 거북선입니다.
둘 사이의 차이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통제영 거북선은 거북머리가 그냥 앞에 살짝 튀어나온 형태로 불멸의 이순신에도 쓰였으며, "나왔다 들어갔다 할 수 있지 않았나"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거북의 머리를 통해 현자 총통을 쏘았다"고 한다면 머리 형태는 이랬을 겁니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우리가 흔히 아는 거북선의 형태입니다. "머리를 통해 유황 연기를 내뿜어 적을 혼란시켰다"고 한다면 이런 형태겠죠.
이 중 통제영 거북선은 노와 포구멍이 거의 같은 곳에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라좌수영 거북선이야 보는 것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수 있고, 1700~1800년대의 물건으로 보이기 때문에 뒤로 미뤄둬야겠군요. 임란 후에 판옥선도 대형화돼서 최고 600명까지 탔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임란 당시와 비교하기에는 맞지 않습니다.
2층과 3층설에 따른 거북선의 구조입니다.
2층설은 이런 통제영 거북선의 그림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형태를 보면 아무리 봐도 3층은 어렵다는 거죠.
3층설은 격군과 화포가 같이 있는 환경에서 전투는 어렵다는 걸 들고 있습니다. 특히 화포 발사 후 연기 문제가 특히 크겠죠.
동제영 거북선에는 지붕 주변에 구멍이 있는데, 이를 포혈, 포구멍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2층설에 따르면 이건 말이 안 되죠. 그렇다고 구조를 보면 3층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 때문에 나온 게 반 3층, 혹은 2.5층 설입니다.
소설 임진왜란 부록에 보면, 당시 간재 이덕홍이 선조에게 올린보고서가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지붕에는 창과 칼을 꼽고, 머리에는 쇠뇌를 장착했으며, 허리에는 작은 판옥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 사수가 옆으로 난 구멍으로 사격할 수 있으며, 그 아래로 배의 중심부(선심)에 총통과 대형 도끼를 탑재하여 혹은 대포를 발사하고 혹은 부딪혀 싸울 수 있다"고 하네요.
그에 따라 김경진님은 이 기록에서 나오는 소판옥, 선심의 차이를 "반 3층"의 근거로 삼으시더군요. 이 판옥의 형태가 어떻든 이 위에서는 대형 총통 대신 승차 총통이나 활 같은 소형 무기를 썼으며, 2층에서 대형 화포를 썼을 거라는 거죠. 이럴 경우 모든 의문점이 해결되기는 합니다.
반 3층의 구조는 이렇게 두 가지로 가정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따라서 이 반 3층의 높이가 달라지긴 합니다.
김병륜(번동아재)님은 당시 수군 고문서를 찾아보다가 거북선의 크기에 대한 기록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이것이 3층은커녕 반 3층보다 어려운 크기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면에서 3층 구조는 "싸우기 쉬우니까"라는 당위성을 내세운 주장이라는 것이 이 분들의 주장이더군요.
글쎄요. 실물 유물이 발견돼 봐야 알겠죠. 사료 상으로 어느 쪽이든 "확신"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합니다.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승정원 일기에 "거북선이 몇 층인가?" 하는 질문이 있다고 하는데 정확히 그 대답하는 부분이 훼손되었다고 하는군요. 뭘까요 이건.
4) 거북선을 찾을 수 있을까?
거북선을 바다에서 건져 보려는 시도야 있었습니다. 하지만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목선의 경우 수명이 다 되면 해체되며, 전투 중에도 가라앉기보다는 불태우는 게 많습니다. 특히 칠천량해전의 경우 거북선이 가라앉았을 가능성은 엄청나게 적습니다.-_-; 거기에 불 탔을 경우 그 원형을 찾기는 정말 힘들죠. 그렇게 건진 건 별황자총통 같은 해전에 맞춘 화포들 뿐이었습니다.
거북선은 딱히 신기한 무기가 아니라 임란 후에도 계속 조선 수군에 쓰였습니다. 아마 일본에 합병되는 과정에서 없어졌을 것인데, 그에 대한 확실한 기록이 없는 게 아쉽네요. 아마 그 형태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이어질 듯 합니다.
2. 거북선
임란 당시 거북선은 세 척이라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좌수영에 두 척, 이억기가 그에 맞춰 한 척 만들어서 세 척이라는 거죠. 2, 3차 출동에 큰 활약을 하긴 했지만 그 이후의 거북선의 활약은 찾기 어렵습니다.
일단 적들이 해전을 피하면서 돌격선의 필요성이 적어졌습니다. 오히려 원거리 포격에 유리한 판옥선이 더 유용해졌죠. 거북선의 구조상 대형 총통을 놓기는 어려웠고, 놓았더라도 밀폐된 환경에서 사각을 높여서 먼 사거리를 내기는 어려웠죠.
거기다 장수들도 거북선을 기피했습니다. 수급을 벨 수 없거든요. 돌격선으로 마구 찌르고 다녔지만 한 곳에 진득히 머무르기는 어려웠죠. 들어오기 힘든만큼 나가기도 힘드니까요. 때문에 거북선의 선장은 권력이 없는 사람들이 맡았다고 합니다. 일단 주요 장수들 중에 거북선 선장이 된 사람은 없습니다.
거북선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1594년에 판옥선과 함께 목재를 운반했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등장에 비하면 쓸쓸한 마무리죠. 후에 칠천량 해전까지도 해전에 투입되긴 했겠지만 그 이후 투입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적이 숨어 버린 이상 돌격선이 활약한 곳은 적었던 듯 합니다.
다만 일본에서는 그 충격이 너무나도 컸던지 명량해전의 패배가 조선의 13척이 모두 거북선이라서 패했다는 식의 기록이 남아 있으며, 목해선이라는 이름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쳐부순다는 가부키가 있었다고 합니다.
행장에도 명량해전 때 거북선이 투입됐다고 돼 있긴 한다더군요. 일단 김경진님은 개조 자체가 어렵진 않았을테니 가능성은 있다고 하십니다.
이상이 거북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글쎄요... 임란 이후에도 거북선이 계속 만들어진 것으로 봐서 분명 실전에 유용했을 겁니다. 이후 나대용은 거북선을 소형화시켜서 창선을 만들죠. 원거리 싸움에 유리한 조선 수군의 방침 상 거북선은 정말 괜찮은 배였을 겁니다. 하지만 그만큼 단점도 존재했고, 장점을 발휘하기엔 제대로 된 적을 만날 수 없었던 듯 하네요.
3. 수군의 영웅들
1) 정운
임란 당시 녹도만호에 임명돼 있었습니다. 임란 발발 직후 장수들이 모였을 때 신호가 머뭇거리자 "영남이고 호남이고 다 우리 땅인데 당연히 도와야 된다"면서 강경론을 주장하죠. 출동 당시 후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이 많이 의지했던 장수로 보입니다만... 부산포 해전에서 안타깝게 전사하죠.
이순신은 이를 슬퍼하며 이전에 전사한 전 녹도만호 이대원의 사당에 배향해 주기를 청 합니다. 그를 얼마나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죠.
다음은 그 중 일부입니다.
[녹도 만호 정 운은 맡은 직책에 정성을 다하였고, 겸하여 담략이 있어서 서로 의논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변이 일어난 이래 의기를 일으켜 나라를 위해서 제몸을 잊고 조금도 마음을 놓지 않고 변방을 지키는 일에 힘쓰기를 오히려 전보다 배나 더하므로 신이 믿는 사람은 오직 정 운 등 2ㆍ3명이었습니다. 세 번 승첩시에는 언제나 앞장서서 나갔으며, 이번 부산 싸움에서도, 몸을 던져 죽음을 잊고 먼저 적의 소굴에 돌입하였습니다. 하루종일 교전하면서도 어찌나 자주 힘을 다하여 할을 쏘았던지 적들이 감히 움직이지를 못하였는 바, 이는 정 운의 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돌아나올 무렵에 그는 철환을 맞아 전사하였는바, 그 늠름한 기운과 순결한 정신이 쓸쓸히 아주 없어져서 뒤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못한다면 참으로 뼈아픈 일입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야 "이순신은 소극적이었고 정운은 적극적이어서 원균이랑 더 친했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가요. 난중일기에도 정운을 불러서 얘기하는 부분이 있고 당시 있던 다른 장수들과 함께 "다 같이 분통해 하는 것을 보아 다들 의사라 할 만하다"고 평가했었습니다.
2) 권준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문과 출신으로(-_-;) 임란 당시 순천 부사였습니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책사 스타일로 나오듯 뭔가 다른 면모가 있었던 모양입니다만... 사천 해전에서 활로 적장을 쏘기도 하는 등의 활약을 보입니다.
당시 전라좌수영의 중심은 순천부였고 권준의 역할은 그만큼 컸을 것입니다. 전투에서야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 보급을 담당하는 건 순천부의 영향이 컸으니까요.
원균에 이어 경상우수사가 될 정도로 공을 인정받았고, 이순신이 파직되자 역시 사직합니다. 97년 2월 나주목사가 되었다가 칠천량해전 후 충청수사가 되었습니다. 이후 선무공신 3등으로 올랐습니다.
3) 배흥립
임진왜란 당시 흥양 현감으로 있었으며 역시 이순신이 아끼던 무장입니다. 임란 당시 전부장으로 큰 공을 세웠고, 이전 글에 썼듯 한산도 대첩에서 16급의 수급을 베며 맹활약합니다.
96년 장흥부사가 되었다가 정유재란 당시 조방장으로 참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 칠천량에서 원균이 도망가고 이억기, 최호가 전사하자 홀로 적의 진격을 저지시켰다고 하는데 이건 가문 기록인 듯 합니다. 칠천량 당시에는 감기로 인해 참전을 못 했다고 하는군요.
이후 반전이 있는데... 명량 해전에 참전했지만 초반에 다른 배들과 같이 뒤로 물러납니다. -_-; 그래도 일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순신이 버티자 다른 배들과 함께 다시 와서 지원한 걸로 보이며 후에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등의 자리에 오릅니다.
김완과 묶이는 경우가 많은데 둘 다 임란 당시의 맹장으로 평가할 수 있으며 정유재란 때도 몇 안 남은 수군 고참 장수로서 활약한 것으로 보입니다.
4) 어영담
임란 당시 광양 현감으로 경상도 출신에 여도 만호 때의 경험을 통해 물길에 밝았다고 합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유인을 맡은 함대를 어영담이 이끈 것으로 보이며, 비리에 휘말려 광양 현감직에서 잘렸을 때 이순신이 그가 유임해 주기를 바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이 때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순신이 "죄도 아닌 일에 걸리어" "백성들이 마치 부모를 잃어 버린 것 같은데"라고 한 것으로 보아 정말 잘 못 해서 파직된 건 아닌 듯 하며 이 장계에서 어영담에 대한 칭찬이 자자합니다.
후에 조방장으로 임명되어 2차 당항포 해전을 지휘했습니다만... 94년 전염병이 돌 때 안타깝게도 병사합니다.
그런데 한국역대 인물 종합정보 시스템에서는 정유재란 때도 활약한 것으로 나오네요. 뭐죠 이거 ( ..) 아무튼 그가 선무공신에 오르지 못 한 것을 백성들이 안타깝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5) 이순신
방답 첨사로 이순신과는 동명이인입니다.
이름도 비슷한만큼 상당히 꼿꼿하고 강직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목 베는 것 대신에 적선 깨는 것을 1등 공신으로 삼겠다"는 방침을 제대로 따른 유일한 인물로 장계에서 특히 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산도 대첩 때 다른 장수의 경우 10급이 넘는 목을 베면서도 적 한 척을 잡는 정도였는데 이순신은 목은 4개밖에 못 베었지만 3척을 깨뜨렸다고 하죠.
하지만 조정에서는 수급으로 공을 따졌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당상관에 올랐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상이 제대로 내려지지 않았고, 이순신이 직접 장계로 다시 건의할 정도였습니다.
그게 통했는지 임진년 이후 충청수사에 오르는 등 상당한 승진을 하며 이 때 군율을 지나치게 적용한다며 탄핵 당해서 고령진첨사로 강등되기도 합니다. -_-;
정유재란 이후 이순신의 추천으로 경상우수사에 임명되었고 명량해전 이후 흥양에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오르기도 합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이 전사한 이후 수군을 수습했다고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이후 이순신의 뒤를 이어 통제사에천거됩니다.
... 이순신이 이순신을 이순신신이 이순신을... 후에 선무공신 3등에 오르고 무의공이라는 시호를 받습니다. 충무공 이순신과 구분하기 위해 무의공 이순신, 입부(호) 이순신, 방답첨사 이순신으로 부르죠.
권준, 어영담, 정운, 이순신, 배흥립은 "믿는 바가 있어 서로 같이 죽기를 기약하고서 모든 일을 같이 의논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는 바"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이순신이 믿었던 이들이었습니다.
6) 김완
사도 첨사로서 임진왜란 때 맹활약했지만 평가는 좀 박했죠. 임란 전에 각 관포를 검사했을 때 김완만 성적이 안 좋았거든요. 거기다 제대로 조사 안 하고 허위 보고 한 듯 하네요. -_-; 그 때문인지 수사 바로 밑인 첨사였는데도 척후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래도 용맹만은 확실해서 한산도 대첩에서 왜장과 일기토를 벌여서 이겼다고 하죠.
칠천량 해전 때 조방장으로 유군을 통솔하면서 선봉에 있었는데 적에게 배를 뺏기고 물에 빠져서 포로가 됩니다. 이 때 김완이 진술한 "해소실기"가 칠천량 해전의 전말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죠. 일본으로 압송됐다가 탈출해 귀국하는 엄청난 일을 벌였으며 함안군수가 되었지만 해소실기에서 원균을 신나게 까면서 중용되지 못 한 듯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칠천량 해전 때 적과 맞서 싸운 정말 몇 안 되는 조선 장수인 거죠.
7) 나대용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공식 기록에서 그건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어디서 나온 건지 궁금하네요.
임란 당시 훈련원 봉사로 별다른 직책이 없었고, 이순신의 심복 중 하나였는데도 딱히 승진을 못 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후 판옥선의 최소 인원이 125명이라는 걸 밝힌 사람이고 거북선을 작게 만든, 배에 창을 꽂았다는 창선을 개발했습니다. 하지만 시험용으로밖에 못 쓴 듯 하네요. 후에는 해추선이라는 쾌속선을 발명했습니다. 아마 이런 것 때문에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게 아닐까 싶네요.
8) 이운룡
이순신이 "나의 후계"라고 말했다는 걸로 유명한 사람이죠. 출처가 뭔지는 모르겠지만요.
이순신이 북방에 있을 때 그를 보좌한 군관이었다고 하며, 임란 당시 옥포 만호였습니다. 원균이 도망가려고 하자 도움을 청하자고 하며 이를 말렸다고 합니다. 배가 한 척밖에 없었다 하지만 많은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이며 96년에 이순신의 천거로 경상좌수사에 오릅니다. 이후 선무공신 3등에 오르기도 하며 1605년 통제사의 자리에 오르기도 합니다.
9) 우치적
너무 많으니 우치적까지만 하기로 하죠. - -; 우치적이 특이한 것이, 임란 당시 20대 정도로 만호직에 오를 인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가문 기록에는 그가 의병장 출신이라고 하는 것 등으로 보아 경상우수영이 붕괴될 때 의병을 일으켜 도왔거나 그냥 군관 수준이던 것을 영등포의 가장으로 앉혀서 만호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한 거죠.
이운룡과 함께 경상우수군 중에서 큰 활약을 했고, 96년 순천부사직에 오릅니다.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갔다가 이순신에게 갔는데, 이 때 무슨 대화를 했을지 모르겠네요. 원균의 지원을 크게 받은 장수로 순천부사에 오른 것 역시 이순신 견제용이었을텐데요.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영남을 강조했지만 이순신-원균 사이에서 치인 장수로 치면 우치적만한 장수가 더 낫지 않을까 싶네요.
사실 장수로만 따지면 끝이 없습니다. 돌격장으로 거북선에 탄 걸로 유명한 이언량이 있으며(그만큼 힘이 없었다는 얘기지만 - -;) 이순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원균에게 맨날 당하면서 이순신에게 의지했던 이영남이 있습니다. 원균과 함께 목 베기를 잘 해서 선무공신 3등에 오른 기효근도 있죠. -_-;
그 외에도 정유재란 수군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경상우수사 배설, 거제현령 안위 등이 있습니다만... 이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루겠습니다. 그저 이순신은 혼자 싸운 게 아니라는 것, 그와 함께 싸운 장수들의 열전을 조금씩 다뤄 보았다고 생각해 주시면 될 거 같구요.
여기서 중요한 게 가문 기록을 너무 믿으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운룡이 한산도 대첩 때 유인책을 처음 주장했고 실행했다고 하는 거나 나대용이 거북선을 만들었다는 것, 기타 여러 가지 전공에서 허구가 많이 드러나죠. 김경진님의 말을 빌리면 한산도 대첩에서 열 명이 넘는 장수들이 각기 유인작전을 벌였고 각기 백 척씩 깨뜨렸다 (...) 는 결론이 나온다는군요. 당장 위에 적은 내용에서도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있으니까요. 어영담이 노량해전에서 나왔다는 건 대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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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뭔가 급히 쓴 느낌이 나네요. 휴... -_-; 뭐 쉬어가는 느낌이라고 생각해 보죠.
거북선에 대해 썼지만 좀 아쉽다는 느낌이 나네요. 뭐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북선이 활약할 환경은 2, 3차 출동밖에 없었고, 그 이후에는 활약할 기회가 없었고, 정유재란 때는 정말 있었는지 확신하기 힘듭니다. 그 능력을 100% 활용할 배경이 없었던 거죠. 그래도 그것만으로 충격이 엄청나서 지금도 임진왜란의 아이콘 중 하나가 거북선입니다.
후... 요즘 야구 보기 정말 짜증나네요. 롯데가 당연히 우승할 수 있는 전력이니 전임 감독이 한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우승 전력 가지고 4위밖에 못 했다, "대충 대충" 했다는 욕들... 그렇게 전임 감독 욕 하면서 우승하러 왔다는 신임 감독. 전임 감독을 신나게 까던 롯데 구단과 언론들은 신임 감독은 아무리 못 해도 쉴드 치기에만 급급하고, 신임 감독은 선수들을 욕 하면서 핑계를 돌리기에만 바쁘네요. 그런 가운데 롯데 선수들만 죽어 나갑니다. 그저... 어이 없네요. 올해 결과는 과연 어떨까요?
... 다음 글과 관련 있을지도요. 다음 글의 제목은 원흉元兇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