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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28 13:00
당연히 사대부들도 자기 자식들 저 수준까진 아니어도 엄청 공부하라고 갈궜을텐데...
진짜 저 정성으로 학문의 범주만 넓혔어도...
20/06/28 14:14
정작 저 시대에 학문 범주를 넓힌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책 한권 100차례 외우기보다는 열권 10차례 외우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굳이 비유로 따지자면 수학의 정석(지금이야 안 쓰지만...) 100번 읽고 문제풀 시간에 다른 책에 나오는 기출문제 더 풀어봐라 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20/06/28 14:21
그리고 아예 유학만 배운것도 아닙니다. 육예라는 선비가 익혀야 할 여섯가지 과목 중에 수학도 들어가 있고.. 궁술 같은 것도 기본교양이었죠. 외국 농법이나 기술서,역법 같은 거 들여오는 것도 다 사대부들이 한거고요.
20/06/28 14:25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전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힘을 쏟은 것도 사실이니까요.
실학자로 꼽히는 박제가의 수레론 같은 걸 보면, 결국 당대 유학자들이 잡저로 불리는 다방면에 대한 독서와 지식이 얼마나 부족했는가가 잘 드러납니다. 괜히 당대에 정조 임금이 현실을 모르고 이론만 읊는 학자들이 많다고 깐게 아니죠. 그렇게 말한 정조 임금조차도 문체반정 같은걸 보면 진짜배기 개혁군주로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걸 보여주고요...
20/06/28 14:42
뭐 서양도 다빈치 같은 소수의 천재들 아닌 이상 다들 자기 분야만 잘했죠.. 그리고 양반들이 과학 공부나 연구를 했어도 그게 기술발전으로 이어질까는 회의적인게.. 흔히 과학과 기술발전이 연계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실제로 연계되서 발전하기 시작한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부터 시작된 일입니다. 그전엔 기술자들의 경험이나 시행착오가 기술 발전 시켰지 과학자들의 과학 이론이 기술 발전 시킨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양반들이 과학 했어도 과학만 발전했을겁니다. 상업 경제나 수공업이 발달 안한 조선에선 기술이 발전 안했겠죠.
20/06/28 15:01
과학 이론까지라고 보기는 힘든 기술자들의 실적과 경험조차 제대로 발전하기 힘든게 조선의 학문 체계였습니다. 서양에서도 상인이나 기술자들이 천시받기야 했지만, 사농공상으로 경전에 박아놓은 수준은 아니었잖습니까. 하다못해 이론적 측면에서도 성리학 외의 다른 학문은 같은 유학의 범주조차 사문난적이니 이단이니 하면서 막아버렸고요. 제가 예시를 든 박제가의 수레론이 무슨 엄청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서양 과학기술의 발달사는 그렇게 잘 모르겠어서 말씀하시는 19세기 말~20세기 초에 과학 연구가 실생활과 연계되었다 하시는 것의 진위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토양이 부족하면 그만한 발전이 나올 수 있을까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기초가 된 뉴턴의 학설은 이미 17세기에 나왔잖습니까. 본격적인 지동설도 아니고 그와 관련한 가능성을 언급한 (그조차도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18세기 중후반 실학자 홍대용의 학설이 그나마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학문 중에서 '근대적인 과학 이론이나 그 단초라도 되는' 정도입니다. 물론 조선조 학자들이 남긴 기록들은 그 양적 측면에서는 말도 안되게 어마어마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얼마나 실용적이었나에 대해서는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죠. 제가 학문의 창의성과 의외성을 중시하는 편이기도 합니다만, 실제로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조선의 학자들이 그러한 업적을 남겼는지조차 잘 모른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20/06/28 15:30
서양과 다르게 경험 축적이 힘들었던건 학문체계보단 인쇄술 탓이 크다고 봅니다. 금속활자를 사용하려면 한글이던 한자던 활자가 수천자 필요한데..그러면 비용 때문에 아무나 인쇄하긴 어렵죠. 그래서 조선에선 계속 목판활자와 금속활자가 혼용되었죠. 금속활자는 주로 관에서 사용됐고... 민간에선 목판을 많이 썼죠.
20/06/28 16:20
인쇄술 문제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데... 서양에서도 결국 인쇄에서 가장 많이 찍어낸 건 경전인 성경이라고 하죠. 학문의 다양성에 일조는 할 수 있어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긴 어려울 겁니다.
인쇄술은 딱히 기술의 문제라기보단 말씀하신 상업적 비용의 문제가 더 크다고 봐야 할겁니다. 고려시대 직지심체요절(이 이름이 맞던가..?)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다 이런 얘기 흔히 나오는데, 결국 그게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은 기술력 자체보다는 그렇게 찍어낸 책을 사들일 만한 수요나 시장체제가 있는가 하는 것이고... 그걸 또 거슬러올라가면 상업을 천시한 사회 풍조와 다시 연결될 수도 있죠. 물론 조선에서 왜 그렇게 학문체계가 꽉 막혀 있었는가? 이걸 따져보면 한국의 지형 문제, 상대적으로 덜 심각했거나 혹은 아직 기술력이 부족하여 농업 위주로 장려할 필요가 있었던 산업의 문제 등등 온갖 사항들과 연결됩니다만... 쌀이 없어 당장 굶어죽을 판인데 그걸 거래하면서 이익을 내고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한다고!?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저런 학문 풍조가 유지되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싶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한 노력을 조금만 더 방향을 틀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죠. 유년 시절에 수천년 전 고대에 이미 만들어진 사서삼경 위주로만 학문을 때려박으면, 평생 세상을 보는 눈이 그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요. 성리학이 아직 그렇게 강고하지 않았던 조선 초기에 세종과 같은 명군이 나온 것도 이런 이치 하에서는 당연하다 싶구요.
20/06/28 15:02
정작 세종의 세자 기간은 태종이 바로 선위 해버리는 바람에 두달 밖에 되지 않았죠....세종대왕 보다는 문종이나 정조가 더 적합해보여요
20/06/28 16:23
오히려 왕이 아닌 왕자들은 나중에 의심사는 일이 없도록 저런 것보단 예술 같은 잡기를 배우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세종의 다재다능함도 그 영향이 아닐까 합니다
20/06/28 13:09
사냥을 즐겨 하고 배움을 멀리 하였다고 기록된 왕자도 사실은 현대인으로 치면 공시생급 공부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20/06/28 14:18
전국에서 뽑힌 성리학 마스터들과 비비려면 저 정도는 오히려 부족했을 수도 있습니다..ㅜㅜ 재능러 세자 세손들은 유딩 초딩 때 금방 마스터하기도 했죠 크크
20/06/28 15:13
의외로 저거 다 꼬박꼬박 지킨 세자 몇 없습니다. 성종 정도? 그 성종도 연산군이 세자 시절에 저렇게 가르치려고 하니까 지나치게 공부시키지 말라고 말렷죠.
20/06/28 16:00
근데 글 다시 보니 저거 지킬수 있었던 세자 자체가 거의 없네요.
문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정조? 이중에도 연산군은 안했을거같고, 제대로는 문종-인종-정조정도 했을거같음. 그리고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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