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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6 10:06
https://pgr21.co.kr/?b=10&n=352921 여기에 본인의 인터넷에서 업적을 인증하는 댓글들이 많은데 한 번 참여해 보세요.
19/05/16 10:08
유비는 이릉 전까지 영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형제가 죽었더라도 그렇게 닥돌하는건 아니죠. 군주는 그럴때 일수록 철저한 복수를 위해 힘을 길렀어야죠.
19/05/16 10:19
그런 의혹이 있기는 하죠. 침상을 같이 썼다는 내용을 가지고 부녀자들이 주로.......
근데 관우가 유부녀를 탐하다 조조와 갈라서게 된 걸 생각하면(?) 유비가 힘으로 제압해서.......
19/05/16 10:19
유비의 본성이 영웅, 군주가 아닌 의협이란걸 증명한 일이었죠. 그런 인물이었기에 그렇게 성공할 수 있었고 그렇게 몰락했던 것이라 봅니다. 후대의 사람으로썬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하구요. 의형제의 복수를 위해 그동안 자신이 쌓은 인생의 전부를 걸다니. 조조보다 유비를 좋아하는 이유, 너무나도 인간적이기 때문에.
19/05/16 10:25
근데 사실 제일 인간적인 건 아마도 유장이겠죠.(...) 유우는 너무 이상주의자고 동오의 덕왕(德王:사실 연의에서 나온 창작이지만) 엄백호는 이름을 중원에 알리기도 전에 손가놈에게 그만.......
개인적으로 유비는 구밀복검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조조처럼 대학살을 저지른 인물은 아니지만 사실 이 사람이 의협이 맞긴 한가? 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더라고요.(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인 적도 많고 배신도 굉장히 많이 때렸고.......)
19/05/16 11:20
의협 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도 쓰이지만 건달이나 패거리에 가까운 뉘앙스로도 쓰이더군요. 의리있는 건달이면 딱 유비죠. 무슨 신의가 있는 건 아니지만 형제들은 잘 챙기는...
19/05/16 10:43
물론 군주에게 어울리는 행동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서 유비라는 인물을 더 좋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으리가 아니라 진정 의리를 위해서 행동한 남자의 로망이라고 할까요.
19/05/16 10:48
철저한 복수라고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릉대전이 워낙 처참한 패배가 되서 그렇지 명분도 있었고 목적성도 뚜렷한 전쟁이였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결코 낮은 전쟁이 아니였어요... 문제는 온갖 전투와 전쟁을 겪은 유비조차 일방적으로 패퇴시킬 수 있을 정도의 전략가가 존재할 거라는 것을 예상못했을 뿐이지.
이릉대전을 반대한 숱한 촉의 신하들이 있긴하지만, 관우의 죽음은 단순히 한 개국공신의 죽음을 넘어서 동맹국이라고 믿었던 나라의 뒤통수 후리기였고 관우가 배반당해서 죽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관우를 죽인 것을 그냥 넘긴다면 이건 유비군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사안이였습니다. 유비의 전략적인 보는 눈과 한중공방전에서 거둔 승리, 관우의 배반과 죽음. 오나라의 뒤통수. 형주를 잃은 점. 여러가지 점들을 고려했을때 그 전쟁은 일어날만 했었고, 실제로 전쟁의 진행도 괜찮아보였습니다. 육손이 없었다면..
19/05/16 10:57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해요. 상황 자체가 나쁜 편은 아니었다고 하나 복수에 눈이 뒤집힌 상태에서는 국가의 명운을 걸고 그런 전쟁을 해서는 안됐다고 생각합니다. 머리를 식히고 준비를해서 냉정하게 처들어 갔다면 육손에게 그렇게 발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19/05/16 11:17
복수에 눈이 뒤집혔다는건 연의적인 해석이라고 보입니다. 복수에 눈이 뒤집혀서 쳐들어갔다기엔 대위전선 방비도 제대로 다 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명운을 걸어야 하는게 맞는게 형주 익주 양쪽에서 공격하는게 촉한의 기본 전략이었고, 형주를 잃으면 후대에 제갈량이 고생했던 것처럼 북벌이 굉장히 힘들어집니다. 거기에 단순히 형주만 취한게 아니라 후방교란도 취했고 유장을 익주목으로 삼는 등 명분을 잔뜩 주고 있었죠. 유엽이 말했던 것처럼 국력을 보여줄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불과 얼마전 위와 전면전에서 승리했고, 그 긴 세월동안 수많은 패배속에서도 어떻게든 수습해서 재기를 하던 유비를 생각하면 미래가 다 갈릴만한 대패를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게 더 예상하기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19/05/16 11:33
전쟁 준비에 일 년하고도 반이 걸렸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한 전쟁이었죠. 이후 군사적 움직임을 보더라도 유비는 신중하게 움직였고 갖가지 기책과 속임수를 사용하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 연의처럼 마구잡이로 나섰다가 방심해서 패퇴한 건 아니에요. 단지육손의 군사적 역량이 유비보다 나았기에 그 사달이 났다고 봅니다.
19/05/16 11:40
개인적으로는 그냥 육손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육손이 유비보다 역량에서 앞선다기엔 유비가 그동안 보여준게 너무 많고, 육손 또한 이릉 이후에 크게 활약한 부분이 있는지는 좀 미지수라서요. 무엇보다 합비에서 육손이 아무것도 못보여준 걸 생각하면(여기서 육손이 한 일이라고는 작전 시도하다 걸려서 아무것도 못해보고 퇴각하기 & 민간인 약탈이 전부라.......), 화공이란 기책이 운 좋게 잘 맞아떨어졌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19/05/16 12:36
에이, 그러면 한중에서 유비에게 처발린 조조는 뭐가 됩니까.(...)
솔직히 유비는 능력에 비해 운이 너무 없던 케이스죠. 전술 레벨에서는 유비가 삼국지 원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략의 부재와 겹겹이 들이친 불운으로 그만.......
19/05/16 12:47
혼돈 님// 원래 산불이라는 게 예방도 힘들고 막기도 어려운 거라.......
물론 화공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건 유비의 실책이 맞죠.(특히 유비가 박망파에서 화공을 써서 조인을 개박살냈던 걸 생각하면 더.......) 근데 그 전까지 계속 박살내고 다녔던 걸 보면 멘탈이 나갔다기보다는 계속 이겨서 방심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19/05/16 12:42
조건달을 적벽과 한중에서 연달아 박살내고, 익주에서는 적진에 고립된 상황에서 오히려 적의 수도까지 진격해 간 유비의 뛰어난 군사적 역량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릉은... 흑흑
19/05/16 10:45
관우가 죽은게 219년이고 이릉이 221년이니까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남방의 반란군과 오나라를 같은 수준으로 볼 수는 없기는 하죠.
19/05/16 10:27
삼국지 인물은 거의 1800년전 인물이죠. 코에이에서 조조와 비슷하게 만드는 노부나가는 500년도 안 됬고.
서기 3800년에 지금 시대 사람중 몇명이나 기억될까요.
19/05/16 11:22
정말 시대가 흘러도 사람들이 계속 반복하여 기억하고, 널리 알려지는 시기가 있는것 같습니다.
유럽에서도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시절은 지금까지도 세세하게 알려지고 기억되고 분석되고 있자나요. 중국은 그게 삼국지 시대가 되겠죠. 우리 나라는 언제일까요? 그나마 삼국통일 무렵 정도?
19/05/16 14:40
왕건의 통일 시기일 것 같아요.
실제로도 짧은 기간과 영웅들의 등장, 태조 왕건이라는 드라마가 삼국지연의 격으로 역사+허구 조합된 이야기였던 데다 왕건이 마치 유비 같이 그려지기도 했고요. 특히 기억될만한 장면들도 좀 있고. 이를테면, 수달이가 죽었으....
19/05/16 10:30
나무위키 보는데 제갈량 북벌 부문에 제가 피쟐에 쓴 예상과 표현이 그대로 있네요. 그냥 복붙 수준인데 나무위키 사관 중 한명이 피쟐에 있는 듯
19/05/16 10:32
좀 옛날글이긴 하지만 실제로 가정에 다녀오신 분이 올리신 여행기가 있네요.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zKF&articleno=7164663&categoryId=265665®dt=20130424080000&totalcnt=285
19/05/16 11:21
앗 저도 찾아보고 있었는데 크크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FzKF&articleno=7164881&categoryId=265665®dt=20130423080000 같은블로그 요 포스팅에 찾아가는 방법이 좀 더 자세히 있네요.
19/05/16 12:13
아, 혹시 남중 지방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한 10년 쯤 전에 가지고 있던 걸 분실했는데(...정확히는 사료명을) 그 지역에선 맹획이 제갈량을 칠종칠금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
19/05/16 11:27
제갈량이 제일 대단한건 국력 차이가 그렇게 났는데 공세 일변도를 취하면서도 자신의 사후에도 유지될정도로 생산력을 끌어올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05/16 13:33
요샌 모르겠지만
예전 엔하위키시절 토론방은 삼국지 커뮤사람들의 엄청난 토론이 있었죠. 거기서 삼국지갤러리 사람들도 많이 봤죠. 현재 커뮤니티에서 원소 재평가는 그때 삼갤 원소빠들의 논리가 그대로 엔하위키가면서 그게 나무위키로 이어지면서 이게 퍼져간거기도하죠. 아니면 원소 재평가의 사실과 논리들이 하나같이 칼라에라도 연결된건지 전뇌회된건지 다 똑같을리가 없는지라 크크크.
19/05/16 16:09
이릉대전이야기가 나와서 적자면 전 이릉대전이야말로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입장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전투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오나라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전투였고 대승을 거두며 형주를 완전히 굳히고 촉을 패퇴시켰지만 반대로 그 정도가 너무 심각해서 촉나라의 국력이 말그대로 개박살나고 위나라만 한중공방전 패배이후 회복할 시간을 얻게되죠.
차라리 촉이 전쟁에서 졌더라도 그 정도가 일반 전투의 패배 수준이였다면? 뭐 이건 if 의 문제니까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오나라 입장에서도 촉의 군대를 전멸에 가깝게 패퇴시킨게 결국엔 득이라고 볼 수 없게 됬죠. 촉의 군대가 좀 살아서 위나라를 공격하게끔 만들었어야했는데.... 뭐 물론 손권의 성향이나 오나라의 역량을 따져보면 위나라고 자시고 형주 탈환하고 촉을 잡아먹는게 위나라 공격하는 거보다 득이다 라고 생각했을 것같지만요.
19/05/16 16:11
유비의 유언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구른 장군의 것이라기보단 평생을 사고에 바친 철학자의 유언 같습니다.
죽기 전에 얻은 깨달음인지 그의 굴곡 넘치던 인생사에서 나온 유언인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평생 유념하며 살만한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잘보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생각의 깊이도 남달랐던 것 같아요.
19/05/16 19:57
개인적으로 6번때문에 제갈량이 당대에 인정받고 후대에도 길이남는 위인이 된 거 같아 아이러니합니다...
그리고 유선은 우리 생각보다 아둔하지 않죠.. 정사 평도 그렇고.. 실제로 제갈량 사후에도 나름 잘 이끌어갔구요. 25년동안? 이였나.. 물론 말년 손제리화 되긴 했지만 그건 뭐...
19/05/17 00:31
삼국지와 글곰님 유비하니 생각나는 건데 제 역사인식을 바꾼 것이 '토크멘터리 전쟁사'였다면(특히 임용한 교수님, 다른 영상들도 포함해서) 그에 대한 지지대(?) 중 하나가 글곰님의 '형주공방전'이었습니다. 단순하게 형주공방전을 '관우가 무리하게 공격하다 오나라 뒤통수에 형주 뺐기고 말아먹음'으로 생각했었는데 다양한 관점 '과연 관우 혼자 그랬을까?' '익양대치로 형주 반 떼준 상황에서 위나라가 수도 옮길만큼 군대 양성한 관우 쩔지 않음?' 등등을 알 수 있었거든요. 역사에선 하나의 사실만이 아니라 그외 여러 정황상황을 봐야하는 걸 바보처럼 이제 알았습니다.
해서 한 번 글곰님 의견을 들어보고 싶은게 바로 유비까들이 말하는 '배신의 아이콘 유비, 공손찬도 배신하고 버림'에 관한 것입니다. 저 정도까진 아니지만 언젠가 즐겨 보던 스트리머가 삼국지에 대한 컨텐츠를 하다가 '유비가 별볼일 없는 자신을 받아준 공손찬을 손절하고 좀더 미래가 밝아보이는 원소로 갈아타는 인성'이라고 말한 걸 들으면서 꺼림칙했거든요. 유비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그런지는 몰라도요. 제가 생각하기엔 공손찬이 명망있던 황족인 유우를 죽임으로써 유비가 공손찬에 대한 마음이 떠난게 아닌지. 나름 인의를 중시하던 인물이었으니까요. 또한 단순히 라인 갈아타서 서주에 정착했다고 보기엔 호족의 세력이 강하던 시절이었으니 어느정도 능력을 보여주어 서주 호족들에게도 인정받은 게 아닌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05/17 15:36
사실 당대에도 몇몇 사람들이 귀 큰 놈은 믿을 수 없다고 까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비는 언제나 환영받는 쪽이었지, 배척받는 존재가 아니었어요. 서주에서는 호족들이 먼저 나서서 유비를 주목을 추대했고, 조조에게 가자 무려 좌장군이라는 높은 벼슬을 받도록 해 주었고, 원소에게 가자 원담이 성 밖으로 한참을 나와 마중하였고, 유표에게 가자 병력을 붙여 주면서까지 발붙일 곳을 마련해 주었고, 유장에게 가자 거의 세기말 구세주에 가까운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건대 적어도 당대 사람들에게 유비는 매우 인격이 뛰어나 존경받는 인물이었거나 혹은 능력이 대단해서 이용가치가 높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둘 다거나요.
덧붙여, 유비가 대 놓고 조조와 유장을 배신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공손찬/여포/원소는 참작의 여지가 많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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