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기간이라 학교가 일찍 끝나던 어느 날, 1P누나가 왜 처음 봤던 날 성직자로 플레이하고 있었는지 비밀이 풀렸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모여 오락실로 향했고, 거기서 3명의 용맹한 용사들이 그들과 함께 했던 성직자의 고군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고블린 전차 앞에 무릎꿇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너무 일찍 모험을 끝내버린 용사들은 각기 뭐라뭐라 1P 누나에게 말한 뒤 셋이서 코인 노래방으로 향했고, 누나는 묵묵히 게임을 계속 하고 있었다.
아 이 사람, 학교 친구들을 꼬셔서 D&D의 용사로 만들려고 시도중이었던 거다. 딱히 끝판 깨기 쉬워서 성직자를 한 게 아니라 친구들이 고블린 전차에 치일 때마다 힐 줄려고... 누나, 이제 와 이야기지만 초심자들 버스태워줄 땐 법사가 젤 쉬운 거 같아요.. 저는 그랬어요..;;
“지금 가면 1P 누나 있으려나?”
“크크크 너 1P 누나 좋아하냐?”
“아니 그냥 잘하니까 같이 하면 좋잖아. 넌 같이 하면 싫냐?”
“아니 나도 좋은데 크크크”
꽤 오래 전이기 때문에 당시 감정이 손에 잡힐 듯 기억나진 않는다. 그래도 한창 이성에게 관심 많던 사춘기 ‘Nerd’ 청소년들에게 우리가 즐겨 하는 게임을 우리보다 잘하는 이성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당시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고, 누군가를 사귀어 본 녀석도 없었으며 그 때문인지 이성에 대한 관심을 보이면 응원하기보다는 전력을 다해 놀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를 포함해 누구도 딱히 티를 내진 않았다, 아니 못했다. 단지 누나는 어째선지 항상 1P에서 플레이한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먼저 시작할 때도 항상 1P를 비워 두었고, 우리가 하고 있을 때 나중에 오면 우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하고선 이어서 하곤 했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뛰어난 용사는 아니어도 나름 검증이 끝난 용사였기 때문인지 성직자, 엘프, 도둑, 드워프.. 그냥 그때 그때 하고 싶은 걸 했다.
누나는 정말 말이 없는 편이었는데 게임을 하다 보면 반드시 의사 소통이 필요한 부분들이 있다. 상자를 연 사람에 맞춰서 템이 나오는 상자라면 공략 상 대충 정해진대로 열지만 - 전사가 열면 큰 포션이 나오는데 법사가 열면 작은 포션이 나온다거나 하는 식 - 장비같은 건 솔직히 공략이랑은 크게 상관없고 재미를 위한 게 많았는데 예를 들면 성직자 개꿀템 모닝 스타 상자는 전사가 열면 간지넘치는 투핸디드 소드가 나온다. 잠깐, 공략이랑 크게 상관 없다곤 했지만 모닝 스타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꼼수도 있으니 공략이랑 상관이 없는 건 아니다. 여하튼 이런 부분이나, 아니면 전설의 검을 성직자의 인챈트 마법으로 풀 지, 점프점프+공격으로 풀 지라거나 타겟 지정으로 힐을 주는 게 아니라 앞에 선 캐릭터에게 힐이 들어가기 때문에 힐 줄 때 상호 합의되지 않으면 의도치 않게 자힐이 되거나.. 아무 말도 없이 해도 크게 상관없긴 하지만 그래도 말을 하면 훨씬 편해지는 부분들이 있는데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누나에게 해야 할 말이 있으면 - 저거 드세요, 전설의 검 풀어도 되죠? 뗏목말고 기차 타실?, 중간용 잡아요? 등 예의 상 파티원의 의사를 물어야 할 이벤트가 있다 - 2P에 앉았던 자의 숙명이자의 의무로 내가 말을 건넸다. 그럴 때도 누나는 대답없이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게 꽤 오랜 기간을 같이 게임을 했지만 우리는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만나면 가볍게 목례하고 그 뿐, 우리는 우리끼리 서로 억제기가 되어 주었고, 누나는 누나대로 우리에게 관심이 1도 없어 보였다. 연애를 몇번 해본 지금 생각하면 웃기긴 하지만 아무튼 그땐 그랬다.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기를 많이 어려워 하던 시절.
그러한 관계의 평형이 깨진 건 고등학교때였다. 그림쟁이였던 한 친구가 동인이란델 들었는데, 그 동인이 우연히도 1P누나 이하 고블린 전차에 전멸하던 용사 일행의 동인이었다고 한다. 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는데 쉽게 말하면 모여서 그림 그리고 관련 행사를 하면 행사에 동인지같은 것을 내고 하는 그런 그룹이었던 것 같다. 당시 가장 조숙했던 친구(?)였기에 우리는 정말 우연이냐고, 노린 거 아니냐고, 역시 누나 좋아할 줄 알았다고, 우리는 열심히 우리 본연의 역할인 억제기 역할을 수행했다. 다만 그 친구는 1P누나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다른 누나랑 썸을 타게 됐다. 그러면서 나에게 혹시 만나보고 싶으면 말하라고,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지만 나는 무심한 듯 시크하게 됐다고 했다. 왜 그랬을까.
언젠가부터 가던 오락실의 주인이 바뀌었다. 어쩐지, 한동안 싱글벙글 웃으며 오락실에 오는 어린 친구들에게 200원 300원씩 손에 쥐어주던 게 이걸 위한 포석이었나. 한동안은 오락실에 어린 친구들이 꽤 많이 붐볐고, 새 주인은 장사가 잘되는 줄 알고 오락실을 매입한 모양이다. 주인이 바뀌고 샘솟던 꽁돈이 사라지자 손님은 다시 줄었고,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결국 나의 수능보다도 앞서 오락실은 서예 학원으로 바뀌어 버렸다.
대학을 서울 쪽으로 오고, 고향 친구들과의 연락이 서로 뜸해질 즈음, 지금같은 명절 어느땐가 내려와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과 술한잔 걸치다 뜬금없이 1P누나가 화제에 올랐다. 누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은 하지 않고 모 한국 만화 작가의 어시스턴트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너 그 때 1P누나 좋아하지 않았냐?”
“뭔 개소리고. 그러는 니는 누나 동인까지 찾아가가 뭐햇는데?”
“야 진짜 구라 안치고 우연이었다니까?”
“그건 그렇고 어차피 같은 서울에 있을건데, 얼굴이나 한번 봐라. 내 연락처 줄게”
“됐다 치아라”
음. 왜 그랬을까(2). 사실 만나서 굳이 꼭 사귀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만나서 옛날 이야기도 나누고, 타지 생활 외로움에 정겨운 고향 사투리 하나 얹을 수도 있었다. 다만 친구들 중 가장 느렸던 탓인지 난 그때까지도 남녀가 연락을 하면 반드시 좋아해야만 연락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땐 대부분의 대학 새내기가 그러하듯 캠퍼스에 이미 좋아하던 이성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대학 새내기가 그러하듯 난 잘 안됐고, 군대를 가게 되었다.
군대를 전역하고 아직 자취방이 생기기 전, 고향집에서 백수처럼 지내고 있을 때였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 어디서 전시회를 하는데 어차피 집에서 백수처럼 처박혀 있을거면 같이 가자는 것이다. 맞다, 어차피 집에서 백수처럼 처박혀 있을건데 무료 전시회를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친구와 함께 전시회로 갔는데... 아뿔싸, 방심했다. 또 만났다.
누나는 행사에 기모노 코스프레를 하고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를 보고 여느 때처럼 가볍게 미소지으며 목례를 했다. 친구는 손을 흔들며 누나쪽으로 다가갔지만 나는 왠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담배 핑계를 대고선 전시회장을 나와버렸다.
누나를 본 건 그 때 그 기모노 코스프레가 마지막이었다. 심지어 난 아직도 그녀의 이름도 모른다. (아마도 친구를 통해 한 번쯤은 들었던 것 같지만.) 다만 그림 그릴 때의 닉네임 정도는 알고, 당시 어시스턴트 하던 만화의 후기에서 자신의 어시스턴트 생활을 짤막한 사컷 만화처럼 그려둔 것에서 만나볼 수 있었다. 본업은 그림쟁이지만 여전히 게임을 좋아하고, 월급의 절반을 콘솔에 때려박는다는 누나의 자캐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아마 기모노 코스프레 당시에도 솔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게임을 좋아하는 남자들의 이상형은 대개 같이 게임을 좋아하는 여자니까. 물론 귀염상이기도 했고.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한 인생을, 아니 게임라이프를 즐기고 있길. Bravo, Your Game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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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정말 유머 게시판 디앤디를 보고 추억 한켠을 꺼내 본 건데 생각해보니 이런 구성에 저런 절단 신공이면 임신 8개월이나 옆에서 내 비타를 하고 있어야 할 전개 같긴 하네요. 불행히도 그런 결말은 아니고 저는 혼자 상경하면서 패드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물론 솔로는 아니지만요.)
해피한 결말이 아니라 많은 분들을 실망시켜 드려서 죄송합니다(_ _)
좋은 추석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