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던전 앤 드래곤을 접했던 건 초등학교 6학년 때로 기억한다.
시장통 건물 2층에 들어선 오락실은 언제나 붐볐고 한 판에 100원 하던 시절 실력만 충분히 뒷받침된다면 100원으로 1시간 이상을 떼울 수 있는 아주 멋진 게임이었기 때문에 다른 게임에 비해 그렇게 붐비던 오락실에서도 유난히 더 사람이 몰렸던 게임이었다. 나도 호기심에 시도해 봤지만 첫 스테이지 고블린 전차를 격파하지도 못하고 패배. 그렇게 하루 500원씩 받던 용돈의 20%를 날리고 나니 다시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차라리 땅따먹기나 1945를 더 오래 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 오락실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1명 있었는데 나이는 내 또래에 매우 중성적인 외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숏컷헤어에 뽀얀 얼굴, 까만 눈동자. 그 사람은 어떤 직업으로든 굉장히 잘했고, 그 사람이 게임을 하고 있으면 그 주변은 구경꾼들로 늘 인산인해였다. 나도 몇 번 얼핏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었지만 얼마 안 지나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는 그 당시에는 전혀 생각을 못했었다.
내가 다시 던전 앤 드래곤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중학교3학년 정도부터로 기억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사람 많고 붐비는 오락실이 아니라 아파트 단지 근처 어디든 있을 법한, 1층은 비디오 대여점이 들어서고 3층은 피아노 교습소가 있는 3층짜리 자그마한 상가 건물의 2층에 들어선 오락실이 우리 무리의 아지트가 되었고 그 당시 오락실은 어른의 사정으로 찾아 보기 힘들었던 던전 앤 드래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삼국지 컨셉의 게임 - 공명이 숨겨진 캐릭터였는데 던전 앤 드래곤의 마법사 같은 역할이었다... - 이 설치되어 있어서 자연스레 가성비 끝판왕인 던전 앤 드래곤을 다시금 시도해 보게 되었다.
사람도 없고 간혹 실수로 죽으면 중학생이 되어 인상된 용돈으로 캐시질을 초딩 시절보타는 훨씬 여유롭게 할 수 있었기에 우리 무리는 금새 4인 파티로 1코인 클리어를 심심치 않게 해내게 되었고, 이는 그 당시 우리에게 꽤 큰 유흥거리였다. 보통 오락실에서 1시간을 떼우려면 꽤 지갑이 두툼해야 했는데 우리는 단 500원이면 1시간동안 게임을 하고, 오락실에 딸린 자그마한 코인 노래방에서 1인당 노래 2곡씩 추가로 부를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1P자리에 누군가 앉아서 던전 앤 드래곤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직업은 성직자, 스테이지는 이제 전갈 형제를 지나 비공정에서 하피와 전투중. 남색 마이에 빨간 타이 체크무늬 치마. 근처 여상 교복이다. 동네 룰은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던전앤드래곤을 이미 하고 있을 경우, 진행한 스테이지가 그리 길지 않으면 ‘이어도 되요?’ 정도 물어보고 그냥 이어서 했다. 먼저 하던 사람이 실력자라면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니까.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던전 앤 드래곤을 매우 잘 하는 여자애는 적어도 내 주위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당연히 하피에서 죽을 거라 예상하고 100원짜리 동전을 1,2,3,4 플레이어에 모두 올려 두었다. 그런데 웬걸, 하피도 뱀파이어도 모두 클리어하고 비공정은 스토리를 따라 정상적으로 잘(?) 추락했다. 우리는 내심 뒤에서 구경하며 감탄했다. 그도 그럴것이 1코인 클리어가 가능하다곤 해도 아직 우리 수준은 마법사 2명이 필수고 전사 1명과 성직자 1명 정도의 고정 파티를 했어야 하고 4인 미만 1코인 클리어는 아직 어려운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런 말 하면 큰일나지만 그 때 우리들 머릿속에는 우리보다 게임을 잘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신기했기에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성직자로 신까지 깔끔하게 클리어해내고서 그 사람은 일행이 40분 전부터 전세낸 듯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있는 코인 노래방으로 갔다. 가면서 어쩐지 기다리던 우리에게 사과의 목례를 한 것만 같았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근데 난 쫌 잘해’ 같은 느낌? 그런데 아뿔싸, 숏컷헤어에 뽀얀 피부, 까만 눈동자, 무표정한데 매력있는 얼굴 - 그걸 요즘 말로 시크하다고 표현하더라 -, 이제야 기억났다. 이 사람, 그 때 그 실력자 사람이다. 그땐 남잔지 여잔지 헷갈렸는데 여자였구나.. 그러니 여상 교복을 입고 있는 거겠지.
애초에 손님도 별로 없는 오락실에, 당시 초딩들은 모두 삼국지 게임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자주 오는 원코인 클리어 가능자들끼리는 서로 얼굴 정도는 알아봤다. 왜냐면 누가 먼저 하고 있을 때 이어할 지 아니면 100원 얹어놓고 죽기를 기다릴 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실력자 목록에 그 여상 누나를 올렸다. 앞으로 그 누나가 하고 있으면 + 대충 중간용 클리어 전이면 그냥 이어서 하기로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 오락실은 재미있게도 1,2,3,4플레이어 자리가 고르게도 고장이 나 있었는데 예를 들면 4P자리는 간혹 조이스틱을 가만히 두어도 오른쪽으로 이동했고, 3P는 앞으로 빠르게 타닥 하고 조작하면 아이템 사용이 됐다. 2P는 4P와는 반대 방향이었고, 1P는 어떤 증상이 있었더라... 아무튼 1P도 고유의 나사빠진 고장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각자 가급적 자신이 앉던 자리를 선호했는데, 그래야 불상사가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면 3P에 앉는 사람은 평소에 늘 선택된 아이템 슬롯을 비워둔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내가 1P의 고장 증상을 제기억제대로 지 못하는 이유는 그 누나를 만난 이래로 1P는 언제나 그 누나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새부턴가 그 누나를 우리끼리의 은어로 ‘1P누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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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내려야 해서 다음에 이어 쓰겠습니다.;; 딱히 길게 쓸 이야기도 아니고 꽤 진하게 - 수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냥 추억의 농도가 짙어요. 기간이 꽤 길었으니..- 담고 있는 추억인지라 술술 써내려가면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글 쓰기 어렵군요. 다만 재미있어 하시는 분이 아니 계시면 그냥 다시 추억의 상자에 고이 모셔두는 걸로..
대부분은 사실과 기억에 의존해서 쓰고 있지만 의도해서 살짝 꼬은 부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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