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는 집을 나서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일상을 걸었다. 3월의 오전에 미풍은 감미로웠고, 겨우내 움츠렸던 거리에는 따뜻한 봄기운이 번졌다. 답답하게 여며진 코트들 대신 화사한 옷들이 거리에 너울거리는 모습을 보며, J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곧잘 가는 홍대의 카페를 향하며 J는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을 재생했다. J는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다. 그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의 장엄하고 음울한 선율을 좋아했다. 그는 협주곡을 인간 존재의 한계와 비극, 명멸하는 불완전한 의식에 대한 절규로 들었으며 그 선율 안에서 종종 위안을 캐내곤 했다.
J는 우울할 때 타인의 음성을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울감이 심하지 않을 때도 아리아보다는 협주곡 또는 소나타를 선호했다. J는 우울함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고 오히려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쪽이었다. 다만 스스로의 감정을 치유하려 노력 할 때 타인의 음성은, 그것이 비록 달콤하고 감미로운 것일지라도 과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J는 3월의 봄을 걸었으나 동시에 12월의 차가운 겨울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은은한 미소로 가벼운 걸음을 걸었으나 동시에 차가운 벽에 머리를 찧었다.
잠시 J의 거리에서 벗어나 J와 M에 대해 얘기해보자. 이 이야기는 J의 이야기이지만, J의 이야기라는 건 곧 M의 이야기이므로.
그렇고 그런 다른 소설들처럼 J는 M을 좋아했다. 그의 흔한 연애 이력에 M만이 특별하게 아로새겨진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J는 처음 M을 봤을 때부터 그 해사한 얼굴을 바라보며 우연과 인연의 경계선에 대해 생각했다.
J가 M을 처음 만나던 날은 기묘하게 여러 우연들이 겹친 날이었다. 늘 주말 밤 어울리던 친구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나올 수 없었고, J는 혼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모처럼 혼자 밤공기를 쐴 겸 나갔다. 홀가분하게 집을 나선 터라 그는 늘 가던 번화가가 아닌 다른 번화가를 가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주말은 욕정이 들끓었다. 취객들은 환호하며 거리에 흐르는 음악에도 몸을 흔들었다. J는 왠지 그들보다 그들을 비추는 불빛들이 더 야하게 느껴졌다.
몇 잔인가의 위스키를 마시고 취한 채로 거리를 배회하다 J는 거리 한 쪽에 있는 작은 공원을 발견했다. J는 그 안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얼마 동안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니 문득 빗방울이 조금씩 거리를 적셨다. 바닥에 하나 둘씩 생기는 점들이 이어져 모든 거리가 젖어 갈 때쯤 M이 비를 피하기 위해 정자로 뛰어들었다. J는 취기를 빌려 용감하게 말을 걸었고, M은 동그랗게 눈을 뜨며 대답했다. 그저 그런 얘기들을 나누며 J는 M에게 연락처를 물어봤다. M은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기억력이 좋은 J는 사실 M이 가수가 되고 싶다는 말 말고 다른 얘기들을 잘 떠올리지 않았다. 그보다 단단한 나무에 걸터앉아 불편했던 엉덩이의 느낌과, 비와 섞여 자극적이던 M의 향기를 더 소중하기 기억했다. 이때의 감각들과 기억은 J와 M이 후에 연인이 되고, 몇 달 간의 연인관계를 지속하고, 서로 돌아서서 남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J를 괴롭혔다.
J는 그냥 때가 되어 비가 내리듯, M이 자신에게 내렸다고 생각했다. J는 27번의 겨울을 보냈으나 M과 헤어지고 나서는 유일하게 M과 함께 보낸 28번째의 겨울만을 기억했다.
M은 스스로 겁이 많고 소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J가 농담으로 캐피바라와 닮았다고 했을 때, M은 약간 어리숙해 보이는 모습과 공격성이라곤 없는 캐피바라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M도 마찬가지로 처음 J를 본 순간을 잊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정자 밑에 앉아 하염없이 길바닥을 쳐다보던 모습. 사실 J에게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지만, 공원에는 정자 말고도 두어군데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었다. 평소 낯선 이를 무서워하는 M이었지만 그는 굳이 J가 앉아있던 정자에 뛰어들어 앉았다. 동시에 M은 J의 일상에 앉았다. 몇 달 후, M은 자리를 털고 J의 일상에서 일어났다. M이 J를 좋아하기까지, 처음 입을 맞출 때까지, 그리고 매력적인 M이 다른 사람의 고백을 받을 때까지 일련의 과정들은 동시에 M의 일상에 맞닿아있었는데, 딱 거기까지였다. M은 앉았다 일어났고, 그 반작용으로 J의 일상은 파도에 쓸려 사라지는 모래 언덕처럼 부서졌다.
M은 수화기 너머로 J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붙잡아보려고 며칠인가를 애써보고, J는 자신이 쌓아올린 M과의 관계, 하나의 세상이 멸망했음을 받아들였다. J는 몇 주간 M을 증오했다. 그럼에도 도시의 곳곳에는 M이 배어있었다. 버스에 내리면 항상 달려와 자신을 반기던 M의 모습, 같이 가던 식당들, 술집들, 공원이며 거리들. J는 거리를 걸을 때, 음악을 들을 때, 회사로 가는 길가에서도 M을 봤다.
M이 수화기로 이별을 고하던 날, J는 으레 통보를 받은 쪽이 그러하듯 자신의 가장 나약한 면을 보일 수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주 볼 수 없던 친구는 J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J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J는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마지막으로 M을 보고자 했다. 친구는 묵묵히 조수석에 J를 태우고 M의 집으로 향했다. 만취하여 몸을 가누지 못한 J였지만, M의 집으로 가는 길은 또렷하게 친구에게 알려줘서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J는 마지막으로 M에게 보고 싶다 하였고 M은 거절했다. 친구가 차에서 기다릴 동안 J는 12월의 추운 겨울, 아스팔트 위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 때 찧은 이마에 상처는 이제는 희미해졌으나, J는 M과 했던 모든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렸다. J는 M을 잊고 싶었으나 잊을 수 없었다. M은 J를 그저 그런 추억으로 남겨두려 했으나 곧 J를 잊었다.
J는 홍대의 한 카페에 도착하여 곧잘 시키던 음료를 시켰다. 귀에는 반복해서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이 들렸고, 마치 앞에 M이 앉아있는 것만 같아서 J는 아무도 없는 앞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잔을 비우고, J는 카페를 나섰다. J의 발걸음은 탁 트인 큰 물줄기 앞으로 향했다. 다리 위에서 보는 한강은 M과 같이 둔치에서 바라보던 한강과 달랐다. 둔치에서는 강의 너머가 보였으나 다리 위에선 끝이 보이질 않았다.
J는 불어오는 시원한 미풍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쳐 지나가는 바람은 너무나도 시원하고 좋았다. 그리고 문득, J는 무엇인가 마음을 먹고 저 너머가 아닌 다리 밑의 강을 봤다.
그리고 J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