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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11/30 20:25:52
Name 지니팅커벨여행
Subject [일반] 아버지와 연좌제 이야기
며칠 전, 점심무렵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인천에 친구들 모임 있어 올라오신다고요.

저는 모임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던 터라, 왜 이제 연락하셨냐고 반문하면서 이따가 가서 뵙겠다고 말씀드렸죠.

직장 상사에게 잠깐 일 좀 보고 오겠다고 말하고 길을 나서 아버지 친구분들이 있는 장소에 도착했고, 얼굴만 뵙고 나오려던 계획은 친구분들에 의해 술까지 얻어 먹어 가며 20여 분동안 더 앉아있게 되며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가장 자주 뵈었던 친구분께서, 참고로 이 분은 사업에 성공해서 인천에 자리잡고 건물도 몇 채 있는 잘 나가는 사업가죠, 제 얼굴을 보더니 아버지와 대화를 주고 받으셨습니다.

"즈그 작은 할아버지 닮았지?

"긍가? 쟈들 할아버지 닮았다고 그러던디..."

옆에 있던 다른 친구분이 그러시네요.

"자네 아부지? 자네가 아부지 얼굴도 모르는디 어찌 닮은 지 안당가?"

"응 아부지 초상화 있는디 좀 닮은 것 같다네"

어느새 이야기는 약간 진지하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느그 아부지 고생 참 많았지. 할아버지 때문에도 그렇고..."


아버지가 지금의 제 나이보다 더 어렸을 때가 되네요.
저도 참 나이를 꽤나 먹은 모양입니다.

어릴 때 상경해 구로공단에서 옷 만드는 노동자(듣기론 '요꼬' 짜는 일을 하셨다는)로 있다가, 사업을 한답시고 공장을 차리셨는데 쫄닥 망하고 결국은 빈털털이로 귀향을 하셨지요.

아버지에겐 다행이고 어머니에겐 불행이었는지,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누나를 낳은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 고향의 이웃 마을 출신이 아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겠죠.

우여곡절 끝에 작은 할아버지(아버지의 작은 아버지)를 통해 당시 인력을 구하던 지역 국가산업단지의 한 회사에서 서비스 업종으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너무 자세히 들어가면 이야기가 길어지니 그냥 서비스업으로 요약합니다.

당시엔 비정규직 개념이 없고, 일 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식 직원으로 올라가는(?) 식이었다는데, 아마 요즘으로 치면 정규직 전환 인턴 같은 거랑 비슷한 것 같네요.

아무튼 2년이 지났는데 회사에서는 미안하단 말로 다른 회사를 추천해 줬다고 합니다.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다행히도 다른 회사에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생각하고 이직을 하셨고요.

그런데 그 회사에서도 2년을 넘기기는 어려웠습니다.
또다시 회사 관계자는,

"정말 미안하고, 자네 같은 사람 진짜 아깝지만 우리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네"

하면서 다른 회사를 추천했습니다.
아버지는 두번이나 이렇게 되니, 그 이유를 알고 싶어서 이번에는 꼬치꼬치 따지셨죠.

그랬더니 돌아온 말은, 자네 가족 문제 때문에 어찌 할 수가 없네, 하는 답변이었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알게 되신 거죠.
뭐 그 전에도 비슷한 분위기를 파악하셨겠지만, 설마설마 하며 살아오신 것 같아요.



동네 유지였던 할아버지네 집안은 가진 산과 땅도 많고, 집안에 훈장과 공무원, 정치인을 배출하기도 한 이른바 '집안 좋은'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4형제 중 둘째였고, 일본에서 유학을 하셨다는 얘기도 들었고요.
시골 섬마을이지만 나름 지역에서 유지라고 불리던 집안에 4남 2녀 중 성인이었던 3형제가 모두 당시에 드물었던 고등 교육(고등학교겠지요)을 받은 상태...
큰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이웃 동네 유지의 딸들과 결혼을 하셨고, 아직 미혼인 셋째는 공부중이었답니다.

4형제 중 막내인 작은 할아버지는 소학교를 들어갈 무렵이었지요.
어느 날인가부터 막내를 제외한 형들 3명이 차례대로 모두 사라집니다.

6.25가 터지기 전이었죠.
할머니로부터 전해 듣기론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하네요.

할아버지가 산 넘어 처가에서 빌린 소를 돌려 주려고 가셨고, 사위를 환대하던 장모는 평소와 달리 손을 꼭 붙잡고 사위에게 말했습니다.

"저녁 먹고 자고 내일 가게"

아내를 두고 혼자 처가에 간 사위 입장에서 그렇게 하긴 힘들었겠죠.
그날따라 장모는 사위를 재차 붙잡으며, 자고 다음날 아침 일찍 가라고 간곡히 얘기했지만, 사위는 집으로 돌아 옵니다.

그리고 동네 어귀에 이를 무렵 곧장 체포되어 어디론가 보내지고 말았습니다.

큰 할아버지도 비슷한 시기에 잡혀가셨다고 하고요.
셋째 작은 할아버지는 그냥 실종이 되고 맙니다.

졸지에 한 집안에서 젊은 과부 두명이 생기고, 막내를 제외한 장성한 아들 셋이 사라졌어요.
큰할머니는 딸 셋, 할머니는 아들 둘만 두었고, 더이상 이 집안에 아이들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1948년 말 ~ 1950년 초에 벌어진 일이죠.

1948년 10월 19일이던가요, 저 멀리 남쪽 큰 섬에서 벌어진 일과 연계되어 연달아 일어난 한 사건의 여파가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계속 되었고, 동네의 지식인층은 거의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릴 때 친구들과 다투면서, 저 빨갱이 새끼, 하는 소리도 간혹 들으셨다고 하네요.

아무튼, 아버지 없이 자란 아버지는 망해버린 집안의 기대를 짊어 지기엔 너무 어렸고, 방황을 하며 더이상 진학을 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상경을 하게 되었어요.



다시 80년대 중반으로 돌아와서,
아버지는 세번째 직장에서도 비슷한 상황에 놓이자 이제는 대놓고 얘기하십니다.

"아버지 때문인가요? 사망확인서 드리지 않았습니까!!"

인사 담당자는 이전의 비슷한 위치였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답변을 하죠.

"정말 미안하네만,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네. 그리고 자네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행방불명되신 작은 아버지 때문이라네"


이건 참 저도 대학생때 이 얘기를 들으면서 화가 나기는 커녕 진짜 어이가 없더군요.
직계도 아니고 삼촌일 뿐인데, 그리고 그 삼촌이 그냥 실종되었을 뿐인데, 그 지역 출신이 이유 없이 행방불명되었다고 조카의 앞길을 막게 하는 법이라니...
더군다나 그 삼촌의 얼굴을 알기는 커녕, 당신이 태어나기 전에 사라지신 분인데.

그 소리를 듣고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했다고 하셨죠.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요.


아무튼 그렇게 또다시 직장을 옮기게 됩니다.
가진 게 없어 성실함과 노력으로만 인정받은 덕인지, 이웃 회사로 또다시 소개받아 이직을 하셨죠.

그러던 어느 날 네번째 직장에서 아버지는 정말 반가운 소식을 접하시게 됩니다.
바로 전두환이 연좌제를 폐지한다는 공약을 어느날 부로 시행한다는 뉴스 말입니다.

저 얘기를 꺼낸지가 언젠데 이제 시행이라니,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버지는 본인의 가정에 한줄기 빛이 되는 소문이어서 엄청 기뻐하셨다고 하네요.


아버지는 당신의 자식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저런 얘기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들은 그냥 몇차례 회사를 옮겼다는 사실만 알았죠.

연좌제가 없어졌음을 당신의 정규직 전환을 통해 확인을 하셨음에도 한편으론 계속 불안하고 꺼림칙하셨던 모양입니다.
두 아들들이 취직할 때 혹시 문제가 될까, 큰 기업에서는 혹시 취업 제한을 하지 않을까 등등...


그런데 아버지가 연좌제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 지는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들이 장교 후보생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죠.
군에서 나온 신원조사에서 별 문제 없이 통과가 되었고, 그럼에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셔셔 혹시 임관하지 못할까봐 초조해 하셨다는데, 임관 전에 다시 있었던 신원조화를 뚫고(?) 제가 대통령 앞에서 소위 임관식을 치르고 나서야 수십년 넘게 갖고 계셨던 앙금을 떨쳐 버리셨습니다.


본인이 연좌제를 겪다가 없어짐을 확인하셨다면, 저로 인해 수십년 묵은 굴레를 벗게 되신 거죠.


뭐 아무튼 지금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이제 그 아픈 과거를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 집안에 몇명 안 남으셨다는 거죠.


아버지는 전두환을 비롯한 수구꼴통 세력을 엄청 싫어하고 욕하시면서도 전두환이 연좌제 폐지한 건 잘한 일이라고 하시곤 합니다.


지난 주에 피지알에 연좌제 관련 글이 올라왔더군요.
그 글의 내용과는 상관 없이 연좌제라는 말이 저희 가족사를 꿰뚫는 단어 중에 하나인 지라, 야근 중에 일은 안 하고 이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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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점화한틱
17/11/30 21:39
수정 아이콘
하... 가슴아프네요.
가만히 손을 잡으
17/11/30 22:49
수정 아이콘
정말 많은 분들이 피해 입었죠.
제가 예전에 모시던 분도 박헌영이 동네출신이라(빨갱이 마을이라 불려서) 이사가면 제일 먼저 하는게 경찰서 정보과에 신고하는 거였다고.....
경찰서 정보과라는 곳이 한 번 가보면 숨이 턱 막히는 곳이죠.
지니팅커벨여행
17/11/30 23:18
수정 아이콘
당시엔 사람 죽이기 쉬웠죠.
그냥 죄 없는 사람도 빨갱이로 몰면 바로 잡혀가곤 했으니...
17/11/30 22:56
수정 아이콘
아버님 사연이 안타깝네요. 지니팅커벨님 덕분에 본인의 마음 속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니 다행입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11/30 23:23
수정 아이콘
그당시 지역사회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참 많았습니다.
밤바다로 알려진 해안가 동네에 뒷산에 '형제의 묘'라고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채 단체로 죽어간 사람들의 묘가 있기도 했고요.
저희 집안보다 더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꽤나 많을 겁니다.
낭만없는 마법사
17/11/30 23:10
수정 아이콘
참... 가슴아픈 근현대사의 피해자들이 아직도 이리 많이 있는데.... 미래를 보자며, 적폐 청산을 방해하는 자칭보수라 칭하는 극우적폐세력을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튼 이제라도 글쓴님과 아버님이 한국사의 잘못된 피해자로서 더 이상 고통받지 않고 마음 편히 사시길 바랍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11/30 23:27
수정 아이콘
아버지는 이미 초월하고 사셨을 거예요.
뒤늦게 자리잡았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아오셨고요.
광복 직후 이승만이라는 첫단추를 잘못 끼운 게 저희 가족을 포함해서 현재를 사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힘들게 된 원인이겠지요.
17/12/01 03:17
수정 아이콘
우병우와 연관지어 현대판 연좌제개념으로 판사를 압박하는 집권여당 국회의원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적폐청산 좋은데, 여론재판이 되어선 안되죠. 보수는 그것을 염려하는 겁니다.
순규성소민아쑥
17/12/01 07:50
수정 아이콘
보수 누구요? 일단 보수라고 칭한 그들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17/12/02 00:45
수정 아이콘
그것은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MicroStation
17/12/01 08:36
수정 아이콘
예전부터 현실에서 직접 일어난 일하고 인터넷에서 말로 떠들어 데는것하고 동치를 시키는게 너무 화가 나네요. 그러지 좀 맙시다.
17/12/02 00:42
수정 아이콘
(수정됨) 여당 집권 4선 의원이 sns로 우병우와 지역 동향,서울대 동문, 사법연수원 동기라는 이유로 합리적 의심 간다고 글쓴게 단순이 인터넷에서 말로 떠드는 건가요.
겨우 인터넷에서 말로 떠드는것 따위가 아무렇지도 않다면 인터넷 악플로 자살하는사람도 없겠군요.
진산월(陳山月)
17/12/01 01:16
수정 아이콘
현재라고 그다지 나아지진 않았습니다.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다고 보여지지만 아직 갈길은 멀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온갖 구석에는 만연하지요. 특히 전라도지역(또는 그 출신)에 대한 차별이...
-안군-
17/12/01 01:58
수정 아이콘
저희 외할아버지의 형님은 월북을 하셨습니다.
...그 다음은 말 안해도 되겠죠.
Keepmining
17/12/01 02:48
수정 아이콘
참... 또 잊을만하면 생각나는 그 노래가 있죠.
워 어어어~~ 전 땡!
계란초코파이
17/12/01 04:55
수정 아이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는 정말..... 그래도 다행히 지니팅커벨여행님 이야기는 해피엔딩인 것 같네요.
지니팅커벨여행
17/12/01 16:23
수정 아이콘
아버지는 관련 건으로 해피엔딩일 수 있지만 할머니는 현재진행형이니 참 뭐라 하기 힘드네요.
할아버지랑 같이 계셨던 시간은 불과 3년 남짓이지만 그 이후 70년 가까이 혼자 계시니....
계란초코파이
17/12/02 20:38
수정 아이콘
아, 그렇군요. 미처 생각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12/03 10:39
수정 아이콘
죄송하다뇨, 공감을 표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립니다.
蛇福不言
17/12/01 23:29
수정 아이콘
글 잘읽었습니다. 저도 제 아버지께서 겪은 일을 올려보겠습니다.
지니팅커벨여행
17/12/02 01:00
수정 아이콘
네.. 현대사의 아픈 기억은 서로 나누면서 알아가는 게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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