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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3/07 18:11:36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최고의 요리, 스티엘라 클라바 콘 파사
[모난 조각 7주차]


“최고의 요리라.”
카를로스가 바 테이블에 앉아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날씨가 좀 더운 것 같군. 카를로스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십오 년 전에 허허벌판이 된 정수리의 땀을 닦아냈다. 그러는 동안 바 뒤편의 주방에서 백발의 호르헤가 걸어나왔다.
“최고이고 말고. 내 추천은 틀린 적이 없잖아.”
호르헤는 양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하나는 친숙한 것이었고, 하나는 난생 처음 본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이 뭐라고?
스티엘라 클라바 콘 파사.

스티엘라 클라바 콘 파사. 스티엘라 클라바, 그리고 파사. 부드럽게 시작해, 작은 악센트를 지난 후에 다시 편안하게 빠져가나가는 듯한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파사라, 파사는 언제나 좋지. 물론 어제 바리 고틱의 뒷골목에서 함께 싸구려 압생트를 마신 그의 조수 안드레는 파사를 혐오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안드레가 아직 애송이라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파사는 마치 작은 소동 같은 것이었다. 당신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한, 그것은 결코 감지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편안하게 빵을 씹고 있을 때나 샐러드를 뒤적거릴 때 당신을 덮치는 그런  장난스러운 작은 악마 같은 것이다. 젊은이들은 그런 작은 소동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삶이 온통 커다란 소동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쪽 바구니에 있는 알 수 없는 것이 스티엘라 클라바겠군.
“어제 아침에 호카 곶에서 올라온 물건이야.”
호카 곶이라. 마지막으로 호카 곶에 간 게 언제였지. 머리카락이 남아있던 시절의 카를로스는 마음이 답답할 때면 호카 곶으로 여행을 떠나고는 했다. 가서 딱히 뭘 한 것은 아니었다. 끝없이 펼쳐진 대서양을 바라보고, 술을 마시고, 돌아왔다. 바르셀로네타 해안과 호카 곶의 차이는 뭐지. 하나는 앞에 지중해가 있고 하나는 앞에 대서양이 있다는 것? 하지만 지중해나 대서양이나, 결국 똑같은 바다가 아닌가. 모든 바다에서는 똑같이 익숙한 향기가 났다. 그리고 눈 앞의, 바구니 속에 담긴 정체불명의 것에서도 그 익숙한 향기가 났다. 바다의 냄새. 생명의 냄새. 세상에서 가장 비릿하고 세상에서 가장 청량한 그 냄새.
“간단한 요리지. 둘을 냄비에 넣고, 오븐을 켜면 끝이야. 주방까지 갈 것도 없어.”
호르헤는 냄비를 열고, 두 재료를 털어넣고 잘 섞어주었다. 약간의 스파이스를 넣고 냄비 뚜껑을 닫은 그는 백 바의 한 쪽에 있는 오븐에 집어넣었다.

“기다리는 동안 한잔 하겠어? 어울리는 물건이 있는데.”
호르헤는 백 바 한켠에서 작은 보틀 하나를 꺼내왔다. 보틀을 건네받은 카를로스는 생전 처음 본 문자가 어지러이 써 있는 보틀을 살펴보았다. 그가 보틀의 에티켓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도수를 나타내는 것 같은 숫자 뿐이었다. 이 정도 도수라면 드라이 포트인가? 아니면 버무스? 드라이 포트의 달콤함이건 화이트 버무스의 상큼함이건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카를로스가 보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행복한 상상을 하는 동안, 호르헤는 작은 카발리토를 꺼냈다.
“카발리토라니, 뭐 하는 짓이야. 제대로 된 와인 글라스를 꺼내라고”
호르헤는 얼굴을 찌푸리며 리델 글라스를 꺼냈다. 이건 치워버려. 하지만 호르헤는 카발리토를 치우지 않았다. 그것이 늙은 호르헤의 마음을 조금 상하게 했다. 작고 땅땅막한 카발리토 잔은 싸구려 그라빠나 파스티스를 마시는 데도 쓸 수 없다고. 어서 저 더럽고 몰취향한 물건을 치워버려. 그는 병을 열고 리델 글라스에 술을 조금 따랐다. 보틀의 첫 잔을 따를 때만 나는 생동감 있고 리드미컬한 소리가 그를 기분 좋게 자극했다. 그는 첫사랑을 떠올리며 글라스에 코를 들이밀었다.

“이거 뭐야.”
고무 패킹으로 밀봉된 싸구려 그라빠에서나 맡을 수 있을 법한 쿰쿰한 단내와 정리되지 않은 강렬한 알코올의 향이 그의 코를 자극했다.
“이건 그리 좋은 술이 아닌 것 같은데.”
카를로스는 손가락을 내밀어, 레스토랑의 입구를 가르켰다. 문 옆에는 ‘좋은 음식에는 좋은 술.’이라는 커다란 싸인보드가 붙어 있었다.
“저게 자네의 철학 아니었나?”
“나는 철학을 포기한 적이 없어.”
“그렇다면 이 술은 뭐지?”
“자네가 잘못된 잔을 사용했을 뿐이지.”
호르헤는 병을 기울여 카발레토를 가득 채웠다. 액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유려하게 잔 안으로 자리했다. 카를로스는 생에 두 번째 여자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발레리아였나. 이자벨이었나. 그것은 또 그를 묘하게 침울하게 했다. 너무 늙었군.
“이쪽을 마시라고.”
호르헤는 카를로스에게에게 가득 찬 카발리토를 건냈다. 카를로스는 잔의 좌우 두께도 맞지 않은 싸구려 카발리토에 담겨진 투명한 액체를 잠시 노려보고, 단숨에 술을 넘겼다.
“허, 생각보다 괜찮은 걸.”
이번에는 호르헤가 입구 옆에 붙은 싸인보드를 가르켰다.
“좋은 음식에는 좋은 술이지.”

완벽한 술은 아니었지만, 카를로스의 기분을 가라앉게 하는데는 충분했다. 젊은 시절, 바르셀로네타 해변가의 바에서 마시곤 하던 베스퍼 마티니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바텐더들은 얼음을 깨부술 기세로 쉐이커를 흔들어댔고, 그렇게 깨져나간 얼음은 한여름 바르셀로나의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관광객들은 바텐더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게 뭐야. 그냥 물 탄 보드카잖아. 007의 제임스 본드가 마시는 건 이런 게 아니라고.’ 하지만 삶을 모르는 것은 관광객들이었다. 해변가의 베스퍼 마티니는 원래 그렇게 마시는 거라고, 꼬맹이. 제대로 된 마티니를 마시고 싶으면 시내의 바에 가서 드라이 마티니를 주문하도록. 호르헤는 그렇게 쏘았다. 그러다 때로 관광객들과 시비가 붙었고 바텐더와 바운서들은 호르헤의 편이었다. 다 옛날 이야기였다. 한동안 해변에도 가지 않고 베스퍼 마티니도 마시지 않았는데. 추억이란 좋은 것이로군.
“그리고 더 맛있는 걸 주지. 기대하라고. 일단은 천천히 마시고. 십 분 정도 걸릴 거야.”
그들은 오븐이 돌아가는 동안 옛 시절을 이야기했다. 얼마 가지 않아 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오븐이 멈추었다. 호르헤는 오븐을 열고, 커다란 금속제 식기를 꺼냈다.


“잠깐만, 코를 막아줄 생각 없어?”
“왜?”
“내 요리는 완벽해야 하니까. 스파이스를 다 넣고 나서 제대로 냄새를 맡도록 해. 오늘의 추천 요리에 대한 격식을 지키라고.”
카를로스는 한 손으로 코를 막았다. 호르헤는 뚜껑을 열고, 먼저 약간의 코히앙드를 넣었다. 뜨거운 요리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코히앙드 잎새는 마치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천천히 냄비로 하강했다. 그리고 약간의 앙고스투라 비터와 약간의 비니거.
“자, 이제 코를 열어.”
카를로스는 코를 열었다. 세 가지 향미의 폭풍이 그의 앞을 회전하고 있었다. 바다의 짜릿한 광풍이 그의 코를 난폭하게 침입했다. 바다의 폭풍은 카를로스의 정신과 음식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감각의 성벽을 무너뜨렸다. 무너진 성벽 사이로 차분한, 어딘가 부끄러운 듯 하면서도 자기주장이 확실하고 완고한 파사의, 산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지막으로 평온하고 어딘가 식물적인 폭풍의 눈, 코히앙드가 바다와 산의 폭풍이 만든 폐허를 자애롭게 굽어보고 있었다. 세 개의 폭풍이라니, 시공의 폭풍이 따로 없었다.
향미의 들판 속에서 카를로스는 마치 홀로 들판에서 비바람을 맞는 멕베스가 된 듯한 원초적인 고립감을 느꼈다. 마치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카를로스와 눈앞의 요리 뿐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 코만 들이대고 있을거야, 노인네야.”

호르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지르고 들어왔다. 안 그래도 이제 혀를 쓸 차례였다. 카를로스는 포크로 음식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모든 것의 존재가 사라진 향의 공허 속에서 미가 창조되었다. 천지창조, 향미의 빅뱅, 영원한 순환, 모든 존재의 종결이자 모든 사건의 시작이었다.
스티엘라는 농염하게 하나의 바다를 품고 있었다. 하나의 바다를 품고 있었기에 그것은 곧 행성의 근원이었다. 심해, 부둣가, 해안, 그 모든 바다가 스티엘라에 잠들어있었다. 스티엘라의 바다 위로 도발적으로 치솟은 검붉은 파사는 육지였고 생명이었고 피였다. 코히앙드는 바다와 땅을 아우르는 운율이었고 바람이었으며 노래였다. 하나의 행성이 그의 입 안에서 파괴되고 생성되었다. 카를로스는 마치 창조신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오. 오오.”
카를로스가 감탄하고 있는 동안, 호르헤는 묵묵히 하이볼 글래스를 꺼냈다. 커다란 얼음을 두 조각 넣고, 2온스 정도의 술을 부었다. 그리고 탄산수로 필업. 바 스푼으로 정확히 세 번 반 젓고 얼음을 들어올려 마무리했다. 소싯적 스패니시 스타일 진 토닉의 달인으로 바르셀로네타 해안을 주름잡았던 바텐더 출신의 요리사다운 솜씨였다.

이건 또 뭐지.
강렬한 탄산은 입 안에 남는 끈적한 죄악과 파괴의 잔해를 감쪽같이 은폐해주며, 스피릿의 강렬한 향과 펀치력은 입 안에 남는 농밀한 옛사랑, 그 향미의 흔적을 마치 새 사랑처럼 지워주었다. 대체 이 환상적인 마리아쥬는 무엇이란 말인가.
“스프리처. 혹은 하이볼. 혹은, 뭐 그런 거지. 적당히 독한 술에 적당한 탄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이제 모르는 것들의 이름이 중요한 나이는 아니지 않나.”
호르헤는 백발을 정돈하며 말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자네 전성기 시절에 만들던 키르 로얄이나 진 토니카보다 훨씬 나은걸.”
“그 이야기를 몇 년을 우려먹을 생각인데. 당시에 매니저가 제대로 된 샴페인을 들여오지 않았다고. 싸구려 프로세코나 카바로 만들 수 있던 최선의 키르 로얄이었어.”
그들은 옛 추억을 떠올리며 스티엘로 클라바 콘 파사를 먹고 이름이 중요하지 않은 하이볼을 마셔댔다. 저 탄산수도 굉장하군. 갈색 병이 꽤 매력적인 걸 처음 보는 녀석인데. 바르셀로나의 풍류가 카를로스께서 모르는 게 이리도 많았다니.

“저기요.”
테이블에서 홀로 양배추 수프를 먹고 있던 동양인 여자가 바에 끼어들었다.
“네?”
“저기. 제가 참견할 주제가 아니기는 한데. 미더덕 건포도 찜 같은 건 좀 그런 음식 아닌가요?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보니 상상보다 훨씬 지독하네요. 윽. 이게 뭐야. 아니 이거는 고수잖아. 아저씨 미쳤어요? 대체 이게 뭐람.”
그녀는 스티엘라 클라바 콘 파사, 그러니까 미더덕 건포도 찜을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맥은 얼음 없이 마시는 게 정석이에요. 이리 줘보세요.”
그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맥을 만들었다. 호르헤는 가게의 간판을 끄고, 편히 앉아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

미더덕(스티엘라 클라바)이나 건포도(파사)나 고수(코히앙드, 코리안더나 실란트로는 너무 뻔해서 카탈루냐의 프란스 어로)나 소맥이나 호불호 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야 농담으로 끄적거리던 걸 길게도 쓰게 되었네요, 쯥. 모두 즐거운 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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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가키
17/03/07 18:46
수정 아이콘
마지막 줄 읽기 전까진 뭔가 고급스러운 요리를 생각했는데 크크
마스터충달
17/03/07 18:58
수정 아이콘
아직까지 건포도가 싫은 걸 보니 저는 젊은 것 같네요 크크크크

그리고 반전 좋네요!!
시공의 폭풍
17/03/07 19:00
수정 아이콘
시공의 폭풍이란..
aDayInTheLife
17/03/07 19:09
수정 아이콘
크크크크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ComeAgain
17/03/07 19:20
수정 아이콘
오늘 제가 근무하는 학교에 새로 온 원어민 선생님 알레한드로가 회식 때 홍어와 소주를 맛있게 먹고 갔는데...
그런 느낌인가... 아 모르겠네요...
치열하게
17/03/07 23:53
수정 아이콘
미더덕과 건포도는 싫지만 술은 함께하고 싶네요. 좋아하는 만화인 '바텐더'와 '바 레몬하트'에서 보던 술 이름이 많이 나와 반가웠습니다. 크크크
17/03/08 09:11
수정 아이콘
제목만 보고 정신이 아득했는데 이게뭐야 크크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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