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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7/01/07 04:53:35
Name SEviL
Subject [일반] 신카이 마코토와 내 인생(너의 이름은 결말 스포?)
0.
e스포츠에는 별관심도 없으면서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통해 pgr21을 들어오기 시작한 것도 어느새 5년이 넘었네요.
항상 눈팅만 하고 가끔 댓글만 달았었는데, 자게에 첫글을 무슨 글을 써야할까 고민도 꽤 했었는데요

커뮤니티 활동을 열심히 하던 시절처럼 평범하게 개인적인 넋두리를 쓸지
한 때 팬이라고 자처하고 남들보다 조금 더 아는 것 같았던(아는 체 하고 싶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그 작품에 관해서 글을 써볼지 고민을 해왔었는데,

근래 개봉한 '너의 이름을' 흥행 분위기를 틈타 신카이 마코토 감독와 제 개인적인 넋두리를 함께 엮어볼까 합니다.

1.
'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처음 본 건 15년 전인 2002년 즈음, 당시 매달 사보던 한국판 뉴타입 잡지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나 당시 신카이 감독의 최신작이었던 '별의 목소리'에 관한 기사가 아닌,
생뚱맞게도 건담SEED와 관련된 기사에서 그 이름을 처음 보게 됐었죠.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당시 건담SEED에 참여하게 된 애니메이터 분들이 한명 한명씩 짤막하게
자기소개와 포부 등을 적은 걸 모았던 기사였었던 것 같습니다.

건담이라는 작품에 참여하게 된 기쁨, 감사함 등등을 적고는
마지막에 '언젠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별의 목소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
라는 식의 희망사항을 적어둔 애니메이터 분들이, 여럿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굳이 찾으려면 지금 제 방에 있는 뉴타입 과월호들을 뒤져서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그냥 기억에 의존해 씁니다.)

당시 신카이 마코토라는 이름을 처음 보게된 중딩의 저는 '대체 누구길래 애니메이터들이 다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고 하지?'
하고 의문을 가졌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인터넷과 못 보고 지나쳤던 과월호 뉴타입의 관련 기사를 통해
신카이 마코토 감독과 별의 목소리라는 작품을 알게 되었습니다.

2.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 '별의 목소리'는
1) 전문 애니메이터(?) 출신도 아니고 게임(을 음반에 끼워팔던) 회사에서 게임 오프닝영상을 만들던 '비전공자가'
2) 음악과 성우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트를 '혼자서 작업해서'
3) 독립 애니메이션이면서도 '상업 애니(?) 수준에 근접한 퀄리티'의 작품
으로 특히 유명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별의 목소리'는 당시 만화와 애니를 좋아하는 덕후면서도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
언감생심 애니메이터는 꿈도 못 꾸던 중딩의 저에게 애니메이션 감독이라는 장래희망도
불가능한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유혹의 목소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몇년 후 모대학 영상학과에 들어가게 됩니다...

3.
'별의 목소리'에서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를 거치며 성공적인 신카이 감독 덕질을 이어가던 제가
애니메이션 감독, 최소한 관련업계 취업을 꿈꾸며 모대학 영상학과에 진학한 것이 벌써 10여년 전이네요.

자기는 헐리웃 키드라는 영화광 동기의 새터 자기소개에 이어 호기롭게
'저는 아키하바라 키드입니다'라고 중얼거리던 혼모노가 애니의 길을 포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죠.

어쨌든 4학년 즈음까지는 콘텐츠 기획, 시나리오 등을 공부해봤지만
졸업작품을 준비하는 저는 어째선지 UDK(언리얼개발킷)를 독학하며 혼자서 게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뭐 애니감독이나 게임기획자나 내가 만들고 싶은 거 만들며 돈벌면 좋은 거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게임 기획자가 되기로 했던 저는 친구 하나와 선배 한명을 꼬셔
본격적인 게임기획자 취업스터디를 시작하였고...

3년이라는 기나긴 취직활동의 끝에는 스터디원 3명 중 2명을 판교로 고이 보내드리고
방송영상 쪽 일을 하겠다며 게임기획자의 길을 관두는 참 근성없는 백수만이 남아있었죠.

....그리고 지금은 방송영상 진로도 포기하고
30년 인생 동안 한번도 고려해본 적 없었던 업계의 소기업에서 영업관리 일을 하고 있습니다.

4.
다시 신카이 감독 얘기로 돌아가면..
지금은 뭐 빛의 마술사니 애니메이션의 렘브란트니 하는 수식어까지 붙은
영상미의 일가를 이룬 신카이 감독입니다만,

분명히 별의 목소리 때만해도 회사를 다니며 작업하다 퇴사까지 하고 8개월이나 걸려
30분짜리 상업 애니메이션 퀄리티의 작품을 홀로 만들어낸 비전공자 근성가이 같은 이미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런 사람의 작품을 보고 뻑가서 애니감독의 꿈을 품는 것도 이상할 건 아니잖아요?

근데 덕질을 해서 신카이 감독을 파면 팔 수록 이 사람은 그냥 비전공자 근성가이가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재능러에 영상 쪽을 제대로 파낸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거 아닙니까?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인상 깊었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듯한(나무위키에 없는..)
신카이 감독의 일화를 두 가지 소개하자면..
(*기억과 몇몇 자료에 의존하여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1) 초등학생 5학년 때(83년?) 아버지가 사주신 PC를 사용해서 좋아하던 그림책을 전자 그림책으로 이식하는 작업을 함.
원본의 삽화을 간략화시키고 텍스트를 옮겨 입력한 뒤 음악교과서의 악보를 보고 BGM까지 만들어 집어넣음.

MdtZPHg.jpg

-취미는 전자그림책 만들기?- (NHK 톱러너 출연 당시)


당시의 작업에 대해 신카이 감독은 글이나 그림, 음악을 컴퓨터로 옮겨넣으면
그것이 그냥 글이나 그림, 음악이 아닌 하나의 작품이 되는 것처럼 생각되었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느낀 신카이 감독의 작품스타일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단편소설같은 스토리에 예쁜 영상과 좋은 음악을 적당히(적절히) 버무려둔 것 같은 느낌이 강한데
어린 시절의 위와 같은 작품활동 경험이 지금까지도 이어져오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2) 95년 게임회사 취직 후, 동경하던 컴퓨터와 각종 소프트웨어들을 다루게 되자
출퇴근길의 전차에서 수백페이지 분량의 매뉴얼들을 정독하는 것이 취미였음.


glaGNYN.jpg

-애독서는 매뉴얼책- (NHK 톱러너 출연 당시)
(여담이지만 위 프로그램의 당시 남자MC였던 야마모토 타로씨는 일본 참의원의원을 하고 계시네요)


신카이 감독은 엄청나게 효율적인 작업을 한다고 하더군요.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 제작당시 디지털작업 경험이 없는 스탭들을 직접 가르쳐가며 제작을 했다고 하는데,
당시부터 신카이 감독과 작업을 해서 '너의 이름은'에서도 미술감독을 맡은 마지마 아키코의 인터뷰를 보면,
신카이 감독은 포토샵 등의 두꺼운 매뉴얼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뒤에
'여기서 이 단축키를 사용하면 한 키 적게 눌러도 되니까 전체적으로 몇초 절약할 수 있어요'라고 말하며
실제로 초 단위로 작업을 하는 포토샵의 귀재(Photoshopの鬼)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1인제작, 소규모 스튜디오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신카이 감독의 당연한 작업스타일 같기도 하지만,
팔콤 재직시절부터 소프트웨어 기능을 달달 꿰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마 그런 능력이 있었기에
시도 가능했던 작업스타일이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5.
어렸을 때는 그저 신카이 감독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위와 같은 일화 등을 접하며 신카이 감독에 대해서 더 알게되면 될 수록

저는 신카이 감독처럼 좋아하는 걸 파고들줄도 몰랐고,
금새 포기하고 항상 플랜B만 생각하는 근성없는 인생을 살고 있더군요.

다섯 달 전 지금의 회사에서 일하기 직전까지 나름 사진영상 관련하여 개인적인 작업을 나름 해보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도 결국 '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상상도 못 해본 업계의 회사에서 일을 하게 됐습니다.

대학 시절만 해도 '언젠가 영상업계에서 일하게 되어 신카이 감독을 업계인으로서 만나 뵙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해왔었지만, 
지금은 팬으로서 좋아하던 시절 멀어진듯한 느낌만 들더군요.


6.
저런 제 개인적인 경험과 감정때문에 
'너의 이름은'은 정말 재미 있었지만, 마냥 좋아라 할 수 없는 작품이더군요.
작품적으로도 냉정히, 결국은 개인적인 평가지만 응?스러운 부분도 많았구요.

그래도 '너의 이름을' 보고나니 당장이라도 회사를 뛰쳐나와 내가 하고 싶었던 일
(애니, 콘텐츠 기획, 방송영상 관련 등등)을 하고 싶다는 감정을 샘솟게 하더군요.
지금의 회사일은 집중하면 재미있기도 하다가, 
'내가 지금 여기서 뭘하고 있지?'라고 생각을 하루에도 수차례씩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물론 제대로된 각오도 준비도 되어있지않은 지금으로서는 그것또한
나의 포기 이력에 한줄을 더 추가하게 되는 것뿐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저는 다음주에도 출근을 하게 되겠죠.

무언가를 계속 찾고 있다가, 언젠가 결국 발견하게 되는 경험을 저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몇년 후쯤에는 제가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냥 잊어버릴 날이 올런지도...


ps: 너저분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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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신경쓰여요
17/01/07 05:33
수정 아이콘
꼭 미츠하와 타키처럼 커다란 일을 겪고 잊어버리는 판타지 같은 일을 겪지 않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고생을 한 타키조차도 자기가 찾고 있는 것이 사람인지, 장소인지, 취직처인지조차 모르겠다고 했지요. 아마 SEvil님도 금방 찾아내실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은 지금 하고 계신 일이 자신에게 맞는 일일 수도 있고, 다른 일을 찾으실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바로 그 사람을 만나고 계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면 곧 만나실 수도 있고... 뭣하면 그냥 생각지도 못했던 인생 게임이나 영화, 애니, 만화, 소설쯤이라도 만나실 수 있겠죠 흐흐 큰 것인지 소소한 것인지 언제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분명 마음을 채울 만한 것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17/01/07 09:44
수정 아이콘
댓글 감사합니다. 그러고보니 근 3~4년간 취준한다고 덕질도 다 쉬다 보니 변변히 즐기는 작품도 많이 없었는데, 인생게임...정말 나타났으면 좋겠네요 흐흐. 좋아하는 거에서 목표가 생기고 하나하나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이 어느샌가 포기하는 것만 많아진 거 같다는 상실감 때문에 위와 같은 글도 쓰게 된 건데 다시 처음부터 좋아하는 거 덕질을 시작하면 뭔가 찾게 될 것 같다는 느낌도 드네요.
17/01/07 10:18
수정 아이콘
정작 자기가 하고싶다는 그 일을 해도 내가 지금 뭘하거있지? 하는 생각은 늘 드는게 ...
따지고보면 나는 왜 살지?하는 의문 자체에 해답이 없으니까 그런거같기도 하네요.
뭐 그래도 뒤늦게 그런걸 생각해보고 놓친 기회에 아쉬워하는거보단 미리 고민해보는게 좋지않나싶습니다만.
17/01/07 12:52
수정 아이콘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지금 제가 하는 게 그냥 후회인지 고민인지도 스스로 잘 구분이 안 가는 상황이라..어렵네요
마스터충달
17/01/07 12:36
수정 아이콘
기술발전 덕분에 야금야금이지만 꿈을 향해 전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사리 성공할 순 없겠지만, 꾸준히 손에서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빛을 볼 거라 생각합니다.
17/01/07 12:53
수정 아이콘
그렇네요. 결국 부지런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한동안 손놓고 있던 개인작업이라도 해봐야할 것 같네요. 말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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