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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6/08/30 22:59:52
Name 이치죠 호타루
Subject [일반] [데이터 약주의] 바르바로사 작전 (9) - 중부 집단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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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gr21.co.kr/?b=8&n=66761 1941년까지의 소련 - 독소전쟁 초기 이들이 대패한 이유
https://pgr21.co.kr/?b=8&n=66854 바르바로사 작전 (1) - 작전 수립 과정
https://pgr21.co.kr/?b=8&n=66906 바르바로사 작전 (2) - 북부 집단군 (1)
https://pgr21.co.kr/?b=8&n=66951 바르바로사 작전 (3) - 북부 집단군 (2)
https://pgr21.co.kr/?b=8&n=67059 바르바로사 작전 (4) - 남부 집단군 (1)
https://pgr21.co.kr/?b=8&n=67123 바르바로사 작전 (5) - 남부 집단군 (2) [데이터 주의]
https://pgr21.co.kr/?b=8&n=67191 바르바로사 작전 (6) - 남부 집단군 (3)
https://pgr21.co.kr/?b=8&n=67214 바르바로사 작전 (7) - 남부 집단군 (4) [데이터 약주의]
https://pgr21.co.kr/?b=8&n=67285 바르바로사 작전 (8) - 남부 집단군 (5) [데이터 주의]



"독일군은, 비록 영국과의 전쟁이 결판이 나기 전이라고 해도, 소비에트 러시아를 최대한 빠르게 박살내도록 준비해야 한다."
- 아돌프 히틀러, 총통 지령 21호



Previously on Barbarossa...

역시 오늘 글의 시작은 중부 집단군의 6월이기 때문에 시기상으로는 한참 뒤이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키예프에서 얻은 승리를 독일군은 그대로 두려고 하지 않았고, 따라서 즉각 구멍이 뚫린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여 죽죽 밀어붙이는 일에 착수했습니다. 이 결과로 소련군 제3의 공업도시이자 우크라이나 공업의 최중요 중심지인 하리코프와 역시 수많은 공장지대가 있고 특별히 스탈린 자신이 애착을 가지고 도시에 이름을 붙인 도네츠크(당시 이름은 스탈리노)가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독일군 손에 떨어집니다. 독일군은 그보다 더 많은 것을 원했고, 마침 캅카스의 유전이 탐나던 독일은 그리로 가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제1기갑집단군을 캅카스로 가는 길목인 로스토프 공격에 투입합니다. 그러나 공세한계점에 도달한 제1기갑집단군은 일시적으로 로스토프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를 지킬 북쪽의 방어선이 소련군의 반격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해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히틀러가 현지사수 후퇴불가 방침을 처음으로 내세우지만, 이미 상황은 후퇴명령이 떨어진 이후였기 때문에 이 책임을 물어 히틀러에게 후퇴를 주장했던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남부 집단군 사령관이 12월 1일자로 해임됩니다. 비록 동기간에 벌어진 모스크바 전투 때문에 묻힌 사실이지만 이는 소련군이 최초로 성공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수복하고 무적이라 불리던 독일군에게 지엽적으로나마 패배를 안긴 전투였습니다.



작전개시 당시의 전투서열 - 독일군

사실 굳이 이렇게 전투서열을 상세하게 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누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어서 활약을 펼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글을 서술하는 데 있어서, 철저하게 타임라인을 스텝 바이 스텝으로 따라가는 방식을 쓰기 때문에, 일 단위로 어떤 상황이 펼쳐졌고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는 쉽게 알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소위 말하는 "명장"들의 행적을 알기 위해서는 여기를 봤다 저기를 봤다 해야 하는 결점이 있습니다. 이를 약간이나마 보완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양군의 전력을 쉽게 비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한참 전쟁 중인 경우, 예컨대 제3차 하리코프 전투라던지, 쿠르스크 전투라던지, 바그라티온 작전이라던지 등등 양군의 전투력이 크게 소진되어서 사단 수만 가지고는 병력의 수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게까지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합니다. 예컨대 전쟁 중기 소련의 소총병(보병)사단 평균 병력은, 1943년 여름에는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의 사단 인가 병력인 1만 4천 5백 명의 절반도 안 되는 7천 명 수준이었습니다(《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p. 206).  그러나 바르바로사 작전은 문자 그대로 "개전"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게 양군의 전력을 비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죠.

이러한 이유로 전투서열을 적음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하는 겁니다.

독일군 중부 집단군(Heeresgruppe Mitte) : 집단군 사령관 페도르 폰 보크 육군원수, 참모장 한스 폰 그라이펜베르크 소장(1성 장군, 독일군은 소-중-대-상급대장-원수 순으로 진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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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기갑집단군 : 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제5군단 : 사령관 리하르트 루오프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6군단 : 사령관 오토-빌헬름 푀르스테르 공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39차량화군단 : 사령관 루돌프 슈미트 기갑대장
   제7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 폰 풍크 남작, 중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2개 차량화보병사단
  제57차량화군단 : 사령관 아돌프 쿤첸 기갑대장
   제12기갑사단 : 사령관 요제프 하르페 중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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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9군 : 사령관 아돌프 슈트라우스 상급대장
  제8군단 : 사령관 발터 하이츠 상급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20군단 : 사령관 프리드리히 마테르나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2군단 : 사령관 발터 쿤체 공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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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군 :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육군원수
  제7군단 : 사령관 빌헬름 파름바허 포병대장
   예하 4개 보병사단
  제9군단 : 사령관 헤르만 가이어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13군단 : 사령관 한스 펠베어 보병대장
   예하 2개 보병사단
  제43군단 : 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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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기갑집단군 :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
  제12군단 : 사령관 발터 슈로스 보병대장
   예하 3개 보병사단
  제24차량화군단 : 사령관 레오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남작, 기갑대장
   제3기갑사단 : 사령관 발터 모델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1개 전차사단
  제46차량화군단 : 사령관 하인리히 폰 비팅호프 상급대장
   SS기갑사단 "다스 라이히"(Das Reich) : 사령관 파울 하우서 SS대장
   이외 예하 1개 기갑사단, 1개 보병연대 : 대독일(Großdeutschland)연대
  제47차량화군단 : 사령관 요아힘 레멜젠 포병대장
   제17기갑사단 : 사령관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중장
   제18기갑사단 : 사령관 발터 네링 중장
   이외 예하 1개 보병사단, 1개 차량화보병사단
  사령부 직속 : 예하 1개 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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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부 예비
  제53군단 : 사령관 발터 피셔 폰 바이케르슈탈 보병대장
   예하 1개 보병사단
  이외 예하 3개 주둔병사단
  이외 6월 26일부터 7월 1일에 이르기까지 6개의 보병사단이 추가 배치.

전체 보병사단 31 + 6개, 기갑사단 9개, 차량화사단 5개, 기병사단 1개. SS사단 1개
cf) 남부 집단군 - 보병사단 30개, 기갑사단 5개, 차량화사단 2개, 경보병사단 4개, 이외 루마니아군 병력 다수.
cf) 북부 집단군 - 보병사단 21개, 기갑사단 3개, 차량화사단 2개

그 북부 집단군의 두 배에 달한다는 남부 집단군과 병력은 그런대로 엇비슷하지만, 전차 수는 무려 1,936대로 남부 집단군(726대)의 정확히 8/3배였습니다. 3호 전차 수가 모자라서 상당 부분을 체코산 38(t)로 때우기는 했습니다만, 각 사단마다 반드시 들어가 있는 4호 전차는 2개의 전차사단이 4호 전차를 20대 배속받은 것을 제외하면 30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남부 집단군의 경우는 5개의 사단 모두 4호 전차를 20대씩 배속받았죠.

따라서 독일군 내에서 당시로서는 가장 성능이 좋은 전차였던 - 티거가 등장한 것은 뒤의 일입니다 - 4호 전차를 남부 집단군(100대)의 2.5배(259대)나 보유하고 있던 중부 집단군은 명실공히 독일군의 주력이었습니다. 게다가 훗날 여러 전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헤르만 호트, 하인츠 구데리안, 발터 모델, 귄터 폰 클루게,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가이어 폰 슈베펜부르크, 발터 네링, 파울 하우서 등등 라인업도 쟁쟁했죠.

아, 그리고... 독일군에게 웬 기병사단이냐 물어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독일군 하면 이미지가 그렇죠? 좋은 전차를 몰고 적을 훌륭하게 사냥하면서 밀어붙이는 이미지가 강하고, 게다가 폴란드 기병대가 독일군의 기갑부대에게 멍청하게 들이받았다고 프로파간다를 할 정도로(물론 지나치게 폴란드 군을 비하한 내용이었습니다마는 선전물이 다 그렇죠) 주장할 정도로 독일군 하면 전차, 전차 하면 독일군 하는 이미지가 매우 강합니다. 오죽하면 축구에서 전차군단이라는 이름이 붙었겠습니까.

그런데 기실 독일군에게 있어서 말이라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동물이기는커녕 매우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뉘른베르크 재판이었을 겁니다. 서부 전선에서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독일군이 신경 가스(Nerve gas)를 쓰지 않은 것을 의아하게 여긴 한 전략 및 전술 연구가가 뉘른베르크에 서신을 보내서 괴링에게 물어보았더니, 괴링의 답이 걸작이었습니다. "물자 운송을 말들이 하는데 그놈의 말들이 버티지를 못하더라고. 방독면을 씌워도 소용없더라니까." 그래서 - 아예 안 쓰인 건 아닙니다만 - 상대적으로 독일군은 화학전이라는 범죄에서는 꽤나 자유로운 편이었던 겁니다. 다른 전쟁범죄행위가 한둘이 아니라서 그렇지...



작전개시 당일의 전투서열 - 소련군

소련군 서부 전선군(Западный фронт) : 사령관 드미트리 그리고예비치 파블로프 육군대장, 참모장 블라디미르 예피모비치 클리모프스키 소장(소련군은 소-중-상-대 순서로 진급합니다.)
담당 구역 : 벨라루스
사령부 : 민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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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군 : 사령관 바실리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중장, 사령부 위치 : 그로드노
  제4소총군단 : 사령관 예브게니 아르센티에비치 예고로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11기계화군단 : 사령관 드미트리 카르포비치 모스토벤코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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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군 : 사령관 알렉산데르 안드레예비치 코로브코프 소장, 사령부 위치 : 코브린
  제28소총군단 : 사령관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포포프 소장(하리코프에서 기갑군을 날려먹은 마르키안 포포프와는 다른 사람)
   예하 4개 소총사단
  제14기계화군단 : 사령관 스테판 일리치 오보린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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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0군 : 사령관 콘스탄틴 드미트레예비치 골루베프 소장, 사령부 위치 : 비아위스토크
  제1소총군단 : 사령관 표도르 드미트레예비치 루브초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5소총군단 : 사령관 알렉산데르 바실레비치 가르노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6기계화군단 : 사령관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하츠킬레비치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13기계화군단 : 사령관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아흘류스틴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6기병군단 : 사령관 이반 세묘노비치 니키틴 소장
   예하 2개 기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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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령부 직속 배치
  제2소총군단 : 사령관 아르카디 니콜라예비치 예르마코프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21소총군단 : 사령관 블라디미르 보리소비치 보리소프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4소총군단 : 사령관 바실리 알렉산데로비치 유스케니치 소장
   예하 2개 소총사단
  제47소총군단 : 사령관 스테판 이바노비치 포베트킨 소장
   예하 3개 소총사단
  제4공수군단 : 사령관 알렉세이 세묘노비치 자도프 소장
   예하 3개 공수여단
  제17기계화군단 : 사령관 미하일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제20기계화군단 : 사령관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니키틴 소장
   예하 2개 전차사단, 1개 차량화소총사단
  이외 1개 소총사단, 다수 각종 여단 및 각종 항공대

확실히 뭔가 빈약해 보이죠. 23개 소총사단, 12개 전차사단, 6개 차량화소총사단, 2개 기병사단, 그리고 전선군 직할 항공지원군단. 전차사단 수는 남서 전선군의 3/4였고, 그나마도 오타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제대로 전차를 갖추지 못한 사단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일례로 제10군 제13기계화군단 소속 제31전차사단의 전차 수는 불과 40대였는데, 이것은 같은 군 소속의 제6기계화군단 소속 제29차량화보병사단이 보유한 전차 수인 200대에 한참 못 미치는 수였습니다.

게다가 남서 전선군은 자기 자신 외에도 독립된 거대 군단인 제9군이 있었는데, 이쪽은 벨라루스 일대를 모조리 서부 전선군이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북서 전선군(17개 소총사단, 4개 전차사단, 2개 차량화소총사단)에 비하면야 이쪽이 규모가 크기는 했습니다만 그쪽은 히틀러고 스탈린이고 애초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 수를 그렇게 많이 잡지 않았었고... 물론 이 병력들이 독일군의 침략 당시에 눈뜨고 그냥 있는 병력은 아니었습니다만, 상대는 주력부대였다는 게 문제였죠.

이 서부 전선군 전체의 전차 수가 2,309대였는데, 앞서 지적했듯이 중부 집단군의 전차 수는 약 1,900대 가량. 수에서 약간 앞섰다고는 해도 문제는 제공권이 모조리 박살나고 전치 운용 교리가 뒤떨어져 있다는 점에 있었고, 수에서 아예 압도를 해 버린 남서 전선군의 전차도 완전히 박살이 나 버린 마당에(남부 집단군 726대 vs 남서 전선군 무려 4,502대) 이 정도 규모라면 밀려나갈 건 불 보듯 뻔했죠.



비아위스토크에서 민스크까지

바르샤바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브레스트(Brest, 프랑스의 노르망디 끄트머리의 브레스트와 구별하기 위해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Brest-Litovsk라 쓰기도 합니다)를 거쳐 민스크 - 스몰렌스크 -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루트가 있고, 북쪽의 비아위스토크(Białystok)를 지나 리다(Lida)를 거쳐 민스크로 이른 후 스몰렌스크-모스크바로 진격하는 루트가 있죠. 어느 길이던지간에 민스크는 지나야 할 관문이었고, 민스크를 공략하려면 민스크 앞에 있는 병력을 잡아야 했습니다.

연재한 지 시일이 많이 지났으니 잊어버리셨을까봐 다시 한 번 상기시켜 드리자면, 히틀러의 전략은 이랬습니다. 전선에 배치된 병력을 모조리 잡아버리면 동원 능력이 떨어지는 - 물론 이건 독일군의 엄청난 오판이었습니다마는 - 소련군은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을 것이고, 그러면 나머지 점령지역은 힘 안 들이고 접수할 수 있다. 그렇게 한 이후에 슬라브 인들을 우랄 산맥 너머로 쫓아내서 알아서 살라고 하고, 독일은 비옥한 우크라이나 땅을 바탕으로 독일들이 살아갈 땅 - 레벤스라움 - 을 건설한다.

따라서 최중요 목표는 무엇보다도 적의 병력 섬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독일군의 교리와 일맥상통했고, 그래서 전략은 이대로 수립되었죠. 그 첫 발을 비아위스토크와 브레스트에서 내딛은 것입니다.



잘 계획된 독일의 기습으로 제3기갑집단군과 제2기갑집단군을 양 주먹으로 하는 작전이 개시되었고, 순식간에 제10군이 포위됩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반격명령을 내리지만 제대로 된 계획도 전술도 항공지원도 - 시작부터 폭격을 얻어맞아서 최전선의 비행장이 거진 제거된 상황이었습니다 - 없었던 소련군의 반격이 성공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죠. 이 과정에서 6월 23일에 빌뉴스 - 당시는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에 삥뜯은 상태여서 빌노(Wilno)로 통했습니다 - 를 점령합니다.

서부 전선군 부사령관 볼딘 중장은 6월 24일에 제6, 제11기계화군단과 제6기병군단에 그로드노(Grodno) 방면으로의 반격을 명령합니다. 어떻게든 포위망을 탈출하려는 움직임이었죠. 간신히 탈출에는 성공해서 민스크로 퇴각할 수 있었습니다만, 계속되는 폭격과 포위 섬멸 시도로 인해서 제6기병군단의 전력은 절반이 소진되었고, 어느 전차사단은 탄약마저 바닥났으며, 또 다른 전차사단의 병력은 전차 3대 - 30대의 오타가 아닙니다 - 로 줄어 있었습니다(《독소전쟁사》, p. 83).

초기에 이 제6기계화군단과 제13기계화군단 및 제6기병군단에 편제된 전차 수가 1,411대였음을 생각해 보면, 서부 전선군 기갑전력의 60%를 날려먹는 큰 손실을 본 것이었죠. 기병군단에 웬 전차냐 하실 수도 있는데, 당시 전차사단에 전차를 죄다 편제하기는 좀 모자랐던 소련군이 그 약점을 적당하게 커버하려고 연구했던 게 기병-기계화사단입니다. 기병의 기동력과 전차의 돌파력을 결합한 것이죠. 그 일환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 아무튼 주력부대를 날려먹고 포위 섬멸당하기 싫으면 후퇴해야 하는 입장에서 6월 25일이 되자 계속해서 민스크 방면으로 후퇴하려고 시도했지만, 통신 장비와 수송 수단의 부족으로 많은 수의 병력들이 제때 후퇴하지 못하고 포위망에 갇혔습니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의 제10군이 포위, 섬멸됩니다.



이 과정에서 민스크로 가는 중요 관문인 바라노비치(Baranovici)가 넘어가면서 민스크로 가는 고속도로가 뚫려버린 상황이 되었고, 게다가 엄청난 속도로 진격하던 제3기갑집단군과 제2기갑집단군의 선봉대가 전쟁 개시 고작 5일 만에 민스크 동부까지 진격하여 적의 퇴각을 막아버리는 대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거리가 무려 321 km. 북부 집단군의 폰 만슈타인만큼이나 정신나간 속도로 적을 외려 앞질러 간 것입니다. 이렇게 말이죠.



6월 25일. 서쪽에 포위된 것은 소련군 제3군.



6월 28일. 독일군의 전선은 민스크 동쪽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회색 바탕의 별표가 바로 민스크입니다. 지도에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만, 민스크에 병력이 없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이미 제10군이 비아위스토크에서, 제3군이 민스크 서쪽에서 포위당한 상황에서 사령부 직속 부대였던 제20기계화군단과 공수부대의 반격마저 실패로 돌아가고 6월 30일에 서쪽의 포위망이 닫히면서 민스크 일대에 남은 것은 철저한 소탕전이 될 뿐이었고, 이렇게 스탈린 스스로가 애착을 갖고 육성한 도시인 민스크가 어이없이 넘어갑니다.

민스크가 넘어가면서 스몰렌스크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고, 서부 전선군은 사실상 전멸했으며, 사령관 파블로프 대장은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제대로 된 전투 없이 군을 물렸다는 이유로 여하 다른 서부 전선군 참모들과 함께 NKVD에 의해 처형됩니다. 이들의 가족들조차 가혹한 운명을 겪어야 했고, 이들은 1956년에야 신원됩니다. 단 한 사람, 부사령관이었던 볼딘 중장은 일부 병력과 함께 독일군 배후에서 보급조차 받지 못하고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 45일간의 사투 끝에 간신히 스몰렌스크 인근으로 복귀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시기의 소련에서 항전의 영웅이 됩니다. 이는 독일군의 놀라울 정도로 빠른 - 소련군이 후퇴하는 것보다 독일군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는 이야기죠 - 진격 속도와, 병력의 차이로 인한 완벽하지 못한 포위망이라는 문제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한 장면입니다.

아, 그리고 또 하나... 겨울전쟁 이후 한동안 총참모장으로 있다가 주코프로 교체되었던 키릴 메레츠코프가 뜬금없이 걸려드는데, 파블로프와 친했다는 이유였습니다. 그 단 한 가지 이유로 인해서 메레츠코프는 NKVD에게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무시무시한 고문을 받아야 했고, 그래도 그 때까지의 능력은 인정받아 간신히 목숨은 살아서 레닌그라드 전선에 복귀합니다.

여하간 이 결과, 34만 명의 소련군이 전사하고 7만 5천 명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힙니다. 독일군으로서는 무시무시한 전과였죠. 여기에 소련군은 5천 대에 가까운 전차, 9천 대가 넘는 야포, 그리고 1,669대의 항공기까지 잃는 어마어마한 패배였습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스몰렌스크로 이어집니다.



자료출처

《독소전쟁사》, 데이비드 글랜츠
https://de.wikipedia.org/wiki/Schematische_Kriegsgliederung_der_Wehrmacht_am_22._Juni_1941#Heeresgruppe_Mitte - 중부 집단군
https://de.wikipedia.org/wiki/Schematische_Kriegsgliederung_der_Roten_Armee_am_22._Juni_1941#Westfront - 서부 전선군
https://en.wikipedia.org/wiki/Chemical_warfare#Nazi_Germany - 2차대전 당시 독일군의 화학전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ia%C5%82ystok%E2%80%93Minsk -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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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30 23:16
수정 아이콘
보통은 저 정도로 한방 얻어맞으면(게다가 전쟁 전체를 보면 독소전 초기에만 3-4방은 더 얻어맞았죠) 나라가 휘청이는 게 정상인데 소련군은 정말 끝도 없이 그 이상으로 병력을 토해냈다는게..
이치죠 호타루
16/08/30 23:21
수정 아이콘
끝도 없이...라고 하기에는, 전쟁 후반기에는 소련군도 한계는 보이고 있었죠. 어쨌든 시베리아는 사람보다 땅이 더 넓은 곳이었으니 말입니다. 1945년대의 소총사단의 평균 병력 수는 거의 여단 수준인 2천 명에 불과했다는군요.
드라고나
16/08/31 00:32
수정 아이콘
완벽하지 못한 포위망 이야기 하시니 앞선 글에 나왔던 우만 전투에서도 포위망 형성된 거에 비하면 살아나간 소련군 병력이 꽤 되는 편이란 게 생각납니다.
이치죠 호타루
16/08/31 00:47
수정 아이콘
그래도 포위섬멸전 특성상 잡힌 병력이 훨씬 많았죠. 혈로를 뚫을 수 있었던 것은 소수에 불과했구요. 보통 살아서 탈출하는 병력은 혈로를 뚫었다기보다는 포위섬멸전이라는 운명을 맞기 전에 철수한 쪽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었구요. 우만이나 키예프의 경우 아무래도 계속된 병력 손실로 인해서 포위망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었습니다만. 우만 전투의 경우 투입 병력을 30만으로 보고 이 중 20만이 잡혔다고 하는데, 이게 아마 포위당한 병력과 포위당하기 전에 밀려난 병력을 합쳐서 30만일 겁니다.
뻐꾸기둘
16/08/31 00:45
수정 아이콘
동부전선은 전선 이동하는 단위가 어마어마 하네요.
이치죠 호타루
16/08/31 00:53
수정 아이콘
고도 지도를 찾아보시면(예컨대 우크라이나의 경우 http://www.globalsecurity.org/military/world/ukraine/images/map-topography.jpg , 벨라루스의 경우 http://www.grida.no/graphicslib/detail/belarus-topographic-map_08e8# 등) 우크라이나고 벨라루스고 고도가 500 m를 넘는 곳이 매우 드뭅니다. 우리 나라처럼 산지가 엄청나게 깔린 곳이 아닌 문자 그대로 대 평원이라서 기갑 부대가 활개치고 다닐 수 있는 곳이죠.
드라고나
16/08/31 01:01
수정 아이콘
바그라티온 작전 한번 검색해 보시면 전선이 한방에 얼마나 이동할 수 있는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지나가던선비
16/08/31 01:58
수정 아이콘
링크해주신 위키를 보니 물론 읽지는 못하지만 자세하게 나와있는게 우리나라는 그 한국전쟁에 대한 저런 자세한 자료를 정작 한국 사람이 접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배우는것도 딱히 없죠 헌리전투 이런거 안알랴줌이잖아요.
이치죠 호타루
16/08/31 02:03
수정 아이콘
일단 대부분의 내용 자체가 군사 기밀이었던지라 소련의 경우는 1990년대, 즉 전쟁이 끝나고 50년이 지나서야 해금된 탓에 이제서야 데이비드 글랜츠를 필두로 수많은 사람들이 달려든 탓이 크고(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화제성이 최근에 와서야 올랐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특히 국가의 군사적인 실패라는 것은 의도적으로 가려지게 마련이죠.

1990년대까지만 해도 독일이라면 몰라도 소련 측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었습니다. 저런 내용 자체가 극히 최근에 와서야 밝혀진 내용이죠. 게다가 독소전의 경우 워낙 많은 사람들이 뒤얽혔다 보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탓이 크죠. 독일 쪽에서는 아예 프란츠 할더를 필두로 해서 냉전 시기에 독일의 전쟁을 분석하고 있었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을지는...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원 사망자가 3년간 250만 명 가량 정도 되는데, 독소전쟁은 당장 민스크-우만-키예프-스몰렌스크를 합치면 곧바로 소련 측 사상자만 200만 명을 넘어갑니다. 그러니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자료를 열람해 가면서 연구했던 거죠. 결국 규모 + 관심도 + 자료가 해금된 시기 삼박자가 정확히 맞아떨어진 결과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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