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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11/22 17:34:28
Name 쎌라비
Subject [일반] 둥지
누군가가 둥지를 튼다고 말했다. 둥지라니... 엉뚱한 표현으로 느껴졌지만 생각해보면 그 표현만큼 어울리는 표현이 또 없었다. 새가 나뭇가지 하나하나를 모아 둥지를 틀 듯이 그는 한 글자 한글자를 책상에 새겨넣으며 그만의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둥지를 지켜보고 있자니 그의 둥지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글자였다. 만약 천적이 그의 책상을 본다면 글자 내용 그 자체는 확인할 수 없겠지만 그가 책상에 무언가 써 놓았다는 사실정도는 쉽게 확인할 수 있을정도로 글자가 진하게 씌여있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둥지는 표적이 되기 쉽다. 처음부터 너무 진한 잉크로 둥지를 튼다면 지우기가 너무너무 어려울 뿐더러 천적의 눈에 띄기도 쉽다는 사실을 간과한걸로 봐서는 그는 둥지틀기의 프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물론 운이 아주 나쁘지 않은 이상 천적의 눈에 띌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리스크가 큰 이런일에 있어서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역으로 나는 그런 그의 치밀하지 못한 모습이 맘에 들었다. 만약 치밀하고 정교하게 빈틈없이 그 일을 준비한다면 그는 틀림없는 확신범이다. 하긴 만약 확신범이라면 둥지를 트는 일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범행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집에서 마치고 올 테니까 말이다.    

단순하지만 일견 세련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을 한참동안 지켜보다가 문득 주위를 본 순간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상당히 기이한 어찌보면 무서운 기분까지 들 정도로 기묘한 광경이었는데 내 주위, 그러니까 전우좌후에 모인 사람 중 상당수가 자신만의 둥지를 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전염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누군가가 처음 길을 열었을 것이다. 마치 머뭇머뭇거리는 펭귄들 사이에서 처음 바다에 뛰어드는 첫펭귄처럼 용감하게 그는 책상에 그의 비굴함을 아로새겼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물결처럼 그것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두에게 울려퍼졌을 것이다.

이쯤되니 나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머릿속에 쌓아올린 둥지는 실재하지 않았고 그들의 둥지는 강렬한 존재감을 내뿜으며 하나하나 완성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개미가 낑낑거리며 식빵조각을 나르는 모습처럼 그들은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가며 그들만의 둥지를 조금씩 틀어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있자니 나는 내가 마치 베짱이가 된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감독관이 들어와 나에게 “자네는 둥지를 소중히 하지 않았지 그럼 게임을 시작하지” 라고 말하며 시험지를 나눠줄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민이 조금 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십자가를 꺼내 “주여 저를 시험에 들지말게 하옵시고...”라고 쉴새없이 중얼거리거나 한건 아니었다. 수능시험 후 친구들이 수능점수와 배치표를 이리저리 비교해가며 발을 동동구르고 있을때도 별다른 고민없이 남자의 3상향지원 그리고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을만큼 고민을 빠르게 결정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내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나는 결국 주변의 비정상적인 광경들은 무시하고 내가 해야할것에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생각보다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그것을 의식하려고 하지 않으면 더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의식하면서 무시하려고 했으나 차라리 의식하려고 하지 않으니만 못하게 되었다. 나는 차라리 감독관이 일찍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다리고 기다리던 감독관이 들어왔다. 푸근해보이는 인상의 20대 후반정도로 보이는 대학원생이었다. 그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려던 찰나 그 대학원생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러실 분들이 없으리라 생각을 하지만요. 서로간에 불편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먼저 자리를 옮기고 시작할게요.” 그들에게는 좋지못한 소식이었을 것이다. 당황스러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통쾌한 기분보다는 안타까운 기분이 앞서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날의 전쟁을 마치고 왠지 냉면을 먹어야 할 것 같아 집 앞 마트에 들려 4개들이 냉면 한봉지를 샀다. 가격도 비싼 주제에 5개도 아닌 4개가 한봉지인 것이 상당히 불만스러웠지만 CF속 이승기의 흐뭇한 미소가 떠올라서 기대감을 가지고 구입하기로 했다. 기대와는 다르게 냉면은 맛이 없었다. 조리예를 정확히 따르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계란을 반개 잘라서 얹지 않아서 였을까? 냉면은 기대했던 것 과는 달리 무척이나 맛이 없었다. 그랬다. 냉면은 무척이나 쓴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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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12/11/22 17:39
수정 아이콘
아 둥지를 튼다고 하는군요....

냉면은 둥지냉면...? [m]
켈로그김
12/11/22 17:50
수정 아이콘
둥지냉면은 끓여먹어야 제맛이죠.
식초로 죽을 끓이면 이런 맛이구나.. 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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