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3/06/07 22:36:34
Name ijett
Subject [잡담]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의 게임.
가끔 흘러간 동영상들이 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제는 제법 <연륜>과 <권위....>마저 느껴지는 요즘 스타리그와 비교해보면, 선수들의 비쥬얼도(--;;) 배경화면도 그래픽도 참 칸츄리^^하고 덜 닦인 거 같아 보이긴 합니다만, 그래도 '정말 좋은 경기'가 가지고 있는 힘, 그리고 감동은 - 그걸 싸고 있는 그릇이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참 사람을 가슴 뛰게 만들고... 또 가끔은, 울게 만들곤 하지요.

음... '정말 좋은 경기'.....

뭐, 추억의 게임이라 해 봤자 저는 임요환 선수 때문에 스타를 시작;;;; 하게 된 케이스인지라...KIGL 이야기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겜큐 동영상도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본 적은 없었습니다. 온게임넷에서도 한빛소프트배ㅠㅠ;;; 정도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인데요. (다 아시는 대로, 임요환 선수가 우승까지 단 1패라는 다분히 괴물스러운 전적을 기록했던 리그 말입니다.)

그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임요환 선수의 거의 모든 경기를(VOD로 ㅜㅜ) 봐왔습니다. 물론 김정민선수를 필두로 홍진호선수 김동수선수 이윤열선수.... 그리고 최근에는 강민선수. 이런 순으로 은근히 눈길을 준 멀티;;;; 가 생기기는 했지만, 여전히 제 본진은 임테란이었으니까요. 참, 뭐든지 첫 마음이라는 게 그토록 무섭더군요. ^ㅡ^

그 모든 경기들 중에, 제가 아직까지도 가장 사랑하는 경기가 있습니다. 한빛소프트배 4강전, 박용욱 선수와의 경기 제 2차전. (경기 내용이나 배경이나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는 이야기겠습니다만, 이왕 큰 맘 먹고 pgr에서 넋두리 하는 김에 다 쏟아 내 보렵니다. ^^)

그 전까지 단 1패도 기록하지 않고(물론 8강전 장진남 선수 상대의 믿기지 않는 역전승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야말로 욱일승천의 기세로 달리고 있던 임테란은 준결승 1차전에서 박용욱 선수에게 일격을 당합니다. 이젠 연승기록이고 뭐고, 이 경기를 놓치면 테란 첫 결승 진출의 꿈은 사라지게 됩니다.

어느 분의 글 중에서, 박서는 이길 때보다 질 때가 멋있다...... 라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나는군요. 2차전 시작할 때 임테란의 표정. 패배의 충격, 당혹감, 자신에 대한 분노, 자책, 피가 마르는 듯한 긴장감, 초조함, 그러면서도 준비해 온 전략, 연습할 때 있었던 일들을 애써 되짚어보며 경기를 준비하려는 마음.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은 떨리고, 머릿속은 자꾸만 텅 비어 가는 것 같은 느낌...... 무슨 독심술사도 아니면서, 이렇게 써 놓으니 참 제가 보아도 우습네요. 어쨌든 경기 시작 전 그의 표정, 몇초도 비추어지지 않은 그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경기 내내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상대적으로 담담한 박용욱 선수의, 안경 너머 차분한 표정과는 대조적으로 말이죠....그리고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냥 겉으로만 보면, 단순한 테란 대 플토의 힘싸움으로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그 경기.

> 어? 테란이 힘싸움 할 모양이네.
> 이야... 저, 저거 탱크 숫자 봐라. 플토 밀리겠는데.
> 우와....밀린다... 밀린다... 일꾼 다 날라가고 장난 아니네. 저거 못살린다.
    ..... 어? 근데 왜 넥서스 부수고 난 자리에다 커맨드를...
> 저거 플토가  돌리던 거 아냐? 자원도 얼마 없을 텐데?
> 야...이거 플토가 기분 좀 나쁘겠는데... 무슨 점령하고 깃발꼽는 것도 아니고...
> 에... 노매너.
> 노매너는 아니지, 걍 좀 그런 거지.
> 노매너라니까.


그 어렵다는 1.07 테란으로, 4강전 그 경기 바로 전까지 무패로 달려오던, 그것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의 온갖 상식을 깨면서, 그 결과로 누구보다도 화려한 조명과 환호를 받으면서, 남몰래 우승의 확신과 꿈에 부풀어서, 약간은 자만심 비슷한 자신감으로 달려오던... 그러나 그 직전에, 변명의 여지 없이 완벽하게 패배했던. 그래서 가슴 깊이 당혹, 분노, 자책, 그리고 질 수 없다는, 이기고야 말겠다는 오기로 똘똘 뭉쳤... 다기보다는 타오르고 있던 임테란의 경기가 아니었더라면, 저도 그렇게 보았을 겁니다.

(아... 왠지 이런 글은 팬까페에나 쓰라는 질책을 들을 듯한 기분이 ㅠㅠ;;;;;)

그 게임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았죠. 이 사람 정말... 자기 감정을 담아서 게임을 하고 있구나. 저 생명 없는 1과 0의 컴퓨터 그래픽 탱크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그 탱크들에서... 피비린내가 나도록, 무섭도록 이를 악문 오기가 느껴지도록... 치열하게 게임, 아니 <승부>를 하고 있구나. 이기고야 말겠어! 이기고야 말겠어! 이기고야 말겠어!.... 사람들 눈과 귀가 무서운 방송이라 표정 하나 말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게임으로 - 모두 쏟아내고 있구나.
지극히 치열하게. 눈 돌리지 않고.

그 게임을 보고 나서 임테란의 팬이 되었습니다. 뭐, 나 지금부터 임테란 팬! 이라고 딱 정해 버린 건 아니지만,
왠지 팬이 안 되면 안될 것 같은(-____-;;;;) 기분이 들었죠....


언제부터인가.... 게임맥스가 사라졌더군요.
(www.gamax.co.kr을 쳐 보면 이-_-상한 싸이트가....;;;;;)
온게임넷 지난 스타리그에도 올라 있지 않으니, 이제는 그 경기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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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은 경기>들, 재미있는 경기들. (순서는 무작위)
홍진호 선수 대 조형근 선수의, 엽기 나이더스 커널;;;이 등장한 스카이배 경기.
조정현 선수의 트리플 커맨드를 트리플 해처리로 받아친 홍진호 선수, 그래서 <이것이 게임, 이것이 인생입니다>라는 일훈님의 명멘트를 탄생시킨 왕중왕전 경기.
so good, 그리고 해맑은 미소의 세르게이 선수.
김대건 선수 앞마당의 가림토 표 로보틱스 -ㅇ-;;;, 그리고 혀를 내밀던 김대건 선수;;;;;
불꽃테란을 상대로 임테란이 저 유명한 배럭 널뛰기를 보여준, 대전에서의 코카콜라배 경기.
그리고 이제 시기가 좀 가까워지지만, 강민 두 글자를 대뇌피질에 더블스톰으로 새겨버린 챌린지리그 첫경기.
처음 본 순간부터 거의 임테란급의 충격을 주었던, 레드나다의 종족최강전.
<아... 앞으로 저렇게 세상사에 무심한 것 같은 표정 가진 사람들, 조심해야겠다....>란 생각을 하게 만든, 테란 킬러 <샤이닝 리>의 50게이트 신공.
그리고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가림토의 마지막 - 아니, 결코 마지막이 되어선 안 될- 스타리그, 임테란과의 게임.

아~~~ 나열하자면 끝이 없지요. ^ㅡ^
저보다 훨씬 이쁘고 잘 갖추어진, 추억의 보석상자를 가지신 분들이 많을 텐데... 괜히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쪼끔 드는군요. ㅠㅠ
그 보석 같은 게임들, 혼자만 애지중지 하지 말고, 가끔은 같이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
언젠가는 우리가 의미없이 나누는 것 같은 이 말들이....
역사가 될 때도 있을 테니까요.

이 밤, 이 행복한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꿈나라로... 가면 안 되고요. ㅜㅜ
다음 주부터 시험이라;;;; 한빛소프트배 때의 임테란 모드로...
치열하게... 달릴 작정입니다.
^ㅡ^

깊어 가는 여름밤, 모두 즐 pgr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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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시아
03/06/07 22:49
수정 아이콘
<다시보기> 진산님 - 젊은 그들 중

예선전부터 연승행진을 달려왔고, 해설자들조차도 '이러다 임요환 선수 공식대회 연승 기록 깨는거 아닌가요'라는, 약간은 부담이 되었을 (기록 갱신이라는게 사실 참 얼마나 부담되는 일일까) 멘트들이 흘러나오던 중 - 악마의 프로토스 박용욱에게 그만 덜미를 잡히고 말았던 1차전.

그때 그의 분함 같은 것은 아무리 앳되 보이는 얼굴이고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고 해도 - 화면을 통해 보는 나한테까지조차 마구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차전. 무시무시한 속도로 프로토스 진영을 향해 달려가는 임요환의 탱크들에서 나는 단지 '탱크'가 아니라 분노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조금은 전율했다.
'이야, 대체 누가 임요환 보고 힘싸움에서 밀린다고 해? 저거 봐. 시즈 모드 풀었다 조였다 하는 소리에서조차 열기가 팍팍 느껴지는구만!'
내 입에서는 절로 그런 소리가 나왔고, 내 눈에는 박용욱 선수의 기지가 탱크의 포화에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임요환의 기와 감정에 밀리는 것처럼 보였다. 결정적으로 박용욱 선수의 메인 자리에 커맨드 센터를 짓는 걸 보고 나는 그가 정말 '감정'을 담아 게임을 했다고 느꼈다. 자신을 패배시킨 상대 선수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자신의 패배 그 자체에 분노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한테 화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건 대단히 센치한 감상이다. 지고 나서 상대한테 열 안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임요환의 외모는 얌전하고 내성적인 소년처럼 보인다. 그는 어쩌면 내성적일지도 모르겠다. 내성적인 사람의 속이 더 뜨거운 경우가 많으니까. 내성적인 사람은 평소에 그걸 주변에 터뜨리지 않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폭발하는 힘이 더 클 수도 있다.
내성적인 사람이 착한 사람은 절대 아니다. 내가 보는 견지에서 임요환은 착한 게이머가 절대 아니다. ^^;; (그래서 얼마쯤은 그를 경원하는 사람들,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가 간다) 박용욱 선수와의 게임을 보면서 내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이거였다.
'저 녀석, 정말 독하네.......'
인간적으로는 섬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고 했다.
03/06/07 22:54
수정 아이콘
수시아님 덕에 추억의 글을 다시 보네요^^
03/06/07 22:56
수정 아이콘
이 글이 어디 있지... 어디 있지 하다가 결국 포기했는데, 한번에 딱 올려주셨네요. 감사합니다. ^^ (역시 수시아님 ^^;)
그때도... 진산님 글을 보면서 뭔가 마음 속에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죠... 물론 지금도 그렇구요.
03/06/07 23:04
수정 아이콘
추억의 글, 추억의 게임......그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할말이 많아 집니다. 그때는 정말 스타를 보면서 알게된 임요환 이라는 이름 석자로 스타를 보게 될줄 몰랐었는데.....차라리 몰랐던 때가, 인식하지 않고 스타를 보던때가 그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왠 청승모드...쿨럭..ㅡㅡ;;)
아무래도 제가 요즘 임테란 때문에 심란한가 봅니다 그려....에잇!!!!
안전제일
03/06/08 00:13
수정 아이콘
멋진 경기였었지요. 그러고 보면 참 인상 깊은 경기가 많았던 대회였었지요. 박용울 선수의 데뷔전도..레가사오브차였던걸로 기억합니다. 언덕위 파일런으로 전진게이트 앞마당먹고 무시무시한 물량을 쏟아내었던..^^;이 한경기로 박용욱 선수의 팬이되어버렸었죠.기욤선수와의 3,4위전에서의 최장기전(지금은 기록이 갱신되었는지도..)발할라 맵에서 왜 그 플리피콘을 깨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그대회의 히어로는 분명 임요환선수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았던것은 박용욱선수였지요.실은 4강전때는 아무나 이겨라라는 심정으로 경기를 보았었지요.두선수를 동시에 응원하는 그 안타까운 심정이라니.^^;왜 임요환 선수는 제가 좋아하는 프로토스 선수들과 그렇게 멋진 경기를 보여주는 걸까요? 다시보고 싶네요 정말. 뭐 멋진 경기를 보여주니까 좋아하는 것입니다만^^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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