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2/09/12 18:55:56
Name 마치강물처럼
Subject (허접단편) 안 구 건 조 증
"아! 이런 망할..."

이 때쯤이면 어김없이 눈이 뻑뻑해지고 아파온다.

"경민이 형 또 눈 아픈가봐?"

옆에있던 동생 한놈이 그럴때 됬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면 한마디 묻는다..

"나 좀 쉬었다가 하자. 어디 안약이 있을건데..."

언제부터일까, (음.. 아마도 프로게이머란 직업을 가지고 나서부터일 꺼다) 난 안구건조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루에 10시간 이상씩 모니터를 봐가며, 온 신경을 집중해야하는 내 직업에는 참으로 어울리지도 않는 병이다.

눈에 안약을 두어방울 떨어트리고 나선 담배 한대를 물었다.

'띠리리~~~ 자기야 전화받어! 띠리리~~~ 자기야 전화받어!'

수진이 전화인가보다. '이 녀석은 정말 내가 쉬고있는 시간을 정확하게 안다.

"왜?"

눈이 뻑뻑하고 아파서일까? 대뜸 첫 마디가 퉁명스럽다.

"또 눈 아파서 담배피면서 쉬고있구나?"

언제나 짜증내고 퉁명스러워도, 수진이는 항상 웃으며 나를 대해준다. 그런 수진이가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넌 귀신이냐? 내가 눈 아파서 쉴때는 귀신같이 알고 전화하네?"

속마음은 안 그러면서도 또 투덜거린다.

"내가 너랑 텔레파시가 통하잖아. 이렇게라도 니 목소리 안 들으면 나 너무 힘든걸.. 니 얼굴 보는건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구.."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이야기 하는 수진이의 말에 왠지 모를 미안함이 몰려온다.

"뭐 너도 바쁘고 나도 바쁘니 그렇지. 그럼 이번 주말에 우리 놀러갈까?"

"저.. 정말? 나야 너무너무 좋지! 어디로 갈건데? 뭐할건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돌아 오셔도 이렇게 기쁜 목소리는 아닐거다.. 그 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구나 하는 미안함이 또 몰려온다...'

"어디든 가자. 나도 이번 주말에는 좀 쉬어야지."

"그래 알았어. 내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갈께. 아~ 아직 이틀이나 남았네. 시간이 좀 빨리 가면 좋겠다"

이렇게라도 수진이의 목소리를 듣고나니 어느새 뻑뻑하던 눈이 괜찮아 지는거 같다..




사실 난 원래부터 눈물이 없는 편이다. 주위에선 감정이 없는 사람같다고도 한다.

수진이도 날보고 그랬다.

"경민이 넌 얼굴이 맨날 똑같아. 슬퍼도 안 울고, 기뻐도 안 웃구."

사실 내가 생각해도 난 감정표현이나 변화가 별로 없다.

뭐 조금은 선천적인 면도 있겠지만, 어릴적 부터 아버지께 귀가 따갑게 들어온 남자의 표본이란게 내 머리속에 너무도 깊이 박혀 있어서 그럴것이다.

어쨌든 변화해 보려고 노력해 본 적도 없고, 그렇게 변화할 필요성을 못 느껴봤다. 때로는 이런 변화없는 얼굴이나 감정 상태가 더 편했으니까..




주말 오후의 경춘가도를 달리는 기분은 언제나 좋다.

오랜만에 만난 수진이는 언제나 그랬듯이 웃는 얼굴에 사람을 기분좋게 하는 인상이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혼자 신이나서 웃고, 떠들고 있고, 난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냥 좋다.

"경민아 요즘도 눈 자주 아프고 뻑뻑해? 나 너무 걱정된다. 너 프로게이머 그만하고 다른거 하면 안될까? 안그래도 눈 그런데 매일 컴퓨터 화면 봐야하니 더 심해지는거 같아서.."

"뭐? 게이머 안하면 뭐하라구? 내가 잘 할수 있는게 뭐가 있는데? 내가 게이머 한다고 해도, 변변히 대회 우승도 한번 못하고 시원찮아서 그냥 때려치라는 거야? 그런거야?"

'그런 뜻이 아닌걸 알면서도, 버럭 화를 내 버렸다. 사실 요즘 너무 부진하고, 또 눈 때문에 짜증스러웠는데, 게이머를 그만 두라는 말을 들으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나 버렸다'

"그.. 그런거 아니라는거 잘 알잖아 경민아. 왜 그러니? 너 그렇게 화내면 나 너무 무섭단 말이야"

수진이 눈에 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에이 바보같은 놈. 그런거 아닌 줄 알면서, 정말 오랜만에 같이 있으면서 결국은 또 울리고 말았다'

"울지마! 미안하다. 내가 좀 답답해서 그랬어. 미안해."

난 울고있는 수진이 눈물을 닦아주려고, 수진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악~~ 경민아 조심해!! 조심!!"

끼~이~이~익~~~~~~~~~~~~!  꽝!





'정신을 차렸는데 눈 앞이 캄캄하다.. 눈을 붕대로 가려놓은거 같다. 답답하다. 어떻게 된거지? 아! 사고였던가? 수진이는... 수진이는 무사할까?'

옆에서 아련하게 사람들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는거 같기도 하고, 침통한 신음소리도 들리는 듯 하고, 또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도 들리는 듯 하다.





두 달만에 퇴원을 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왔다.

"경민이 형 왔어요? 무사하게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준철이가 어색한 웃음으로 반겨준다. 다른 애들도 다들 반겨주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나 대하기가 껄끄러운가 보다.

"경민아! 지나간 일은 깨끗하게 있고 새로 한번 시작해보자.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말고."

언제나 아버지 같은 감독형도 등을 두드려 준다.

난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그냥 무언가에 미쳐버려서 지금의 상황을 잊고 싶을 뿐이다.




'수진이가 죽다니. 나 때문에 죽은거다. 왜 나만 살아남은 거야. 같이 죽어버리지 않고. 뭐 그렇게 미련이 많다고 수진이 혼자 남기고 나만 살아남은거냔 말이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인데도 취하지가 않는다..

"제기랄 왜 술까지 사람을 우습게 보는거야? 좀 취하고 싶단 말이야. 죽도록 취하고 싶단 말이야!"

등 뒤에서 감독형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래 경민아. 괴로운거 안다. 쉽게 잊을 수 없는것도 안다. 그렇다면 그냥 가슴에 묻어둬라. 그냥 묻어두고 생각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무언가에 몰두해 버려라. 그게 꼭 게임이 아니어도 좋다. 이건 너의 감독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경민이 니 형으로서 하는 말이다."

"형. 나 너무 괴로워. 아무것도 할 수 없을거 같아. 그런데 왜 난 눈물도 안 나는 걸까?"






그 후로 6개월간 난 정말 미친사람처럼 게임만 했다..

정말로 수진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미친듯이 게임만 했다.

그래서 일까? 이상하게도 내 눈은 한번도 뻑뻑해지거나 아프질 않았다.





처음으로 올라본 메이저 대회 결승..

감독형은 긴장하지 말라고 등을 두드려 줬다.

내가 보기엔 형이 더 긴장하고 있는거 같다.

난 긴장따위를 할 여유가 없다.. 내게 그런 감정은 그냥 사치니까.

난 그냥 또 몰두할 무언가를 찾을 뿐이고, 오늘 내가 몰두할 대상이 그저 결승전일 뿐이다.

긴 호흡을 한 번 하고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나의 강한 굶주림 때문이었을까? 의외로 경기는 쉽게 끝을 향해 달려갔다.

두 판을 먼저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의 세 번째 판도 거의 나의 승리일 것 같다.

먹이를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이리같은 내 공격에 상대방은 결국 gg를 치고만다.

주변에서 터지는 폭죽소리와 함성소리도 그냥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한다.

난 또 내일이면 새로운 몰두거리를 찾아서 나서야 하니까.





다들 자기가 우승한 것 보다 더 기뻐해주고, 축하해 주었지만 난 그냥 성의없는 미소와 함께 고맙다고 의식적인 대답만을 했다.

잠시 혼자 빠져나와서, 담배를 한 대 물었다.

아무리 생각 안 하려고 해도,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이럴때면 전화벨이 울리곤 했는데...'

상념에 젖어있을때 쯤, 준철이가 부른다.

"경민이 형! 형!"

"어! 어 그래"

"밖에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그래. 알았다 나가볼께. 고맙다"

담배를 끄고나서 느적느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만이에요. 경민군"

'수진이 어머님이다. 숨이 턱까지 막혀온다. 당신 딸을 하늘로 보내고, 혼자만 잘 살고 있는 나를 원망하러 오셨을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오늘 우승을 했더군요. 축하해요... 흑 흑흑~"

'나를 보고 당신 딸이 생각 나셨는지, 눈물을 보이신다. 차라리 나쁜놈이라고 욕이라도 하고, 따귀라도 한 대 치시면 좋겠는데...'

"수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어서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 왔어요."

.............(여전히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경민군이 자기가 없어도 괜찮아 질때 쯤 이걸 전해주라고 해서요. 아마도 지금이 그 때인거 같아서. 이렇게 주책없이 왔네요."

수진이 어머님께서는 작은 다이어리 하나를 건네주시고는 이내 돌아서 가셨다.

그냥 아무말도 못하고, 다이어리 하나만 받아 들고서는 한참을 서 있었다.



혼자 돌아와서 읽어본 다이어리에는 수진이가 나랑 만난 날부터, 떠나기 전날까지 일들이나 느낌이 그냥 짧게짧게 적혀 있었다.

맨 마지막 페이지 까지 나는 아무런 생각없이 읽어내려 갔다.

마지막 페이지로 넘기니, 그 사이에 쪽지 하나가 끼어 있었다.

'경민군 보세요!
한동안 경민군을 많이도 원망하고, 많이도 미워한 수진이 애미입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딸이었기에, 경민군에게 글로 형언하지 못할 미움과 저주도 했었군요.
하지만 이제는 경민군이 제게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 되었네요.
사실은 수진이가 이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마지막까지 부탁했지만, 이말을 해야지 앞으로 경민군 얼굴을 한 번씩 보러가는 내가 우습지 않을거 같아서요.
수진이는 사고 당했을때, 이미 힘든 상황이었고, 경민군은 충격은 컸지만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지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경민군은 눈을 크게 다쳐서, 아마도 실명을 하게 될거라고 하더군요.
경민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수진이가 마지막으로 의식이 돌아왔을때, 수진이가 유언으로 남긴 말이 두 가지였어요.
자기 눈을 경민군에게 줬으면 좋겠다구 하는 말과, 경민군이 자기가 없어도 괜찮아 질때 쯤에 일기장을 전해달라구요.
수진이는 이제 세상을 보는 창으로 경민군 안에 살아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요.
늙은이 부질없는 집착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끔씩 경민군 볼 수 있도록 해줬으면 좋겠네요.'

한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이제껏 내가 수진이 눈으로 세상을 봐 왔다는 것인가?

왜 바보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6개월간이나 눈이 아프지도,뻑뻑해 지지도 않은것을 왜 그냥 쉽게 생각해 버린걸까?



수진이 다이어리 마지막 페이지를 읽었다.

'경민이 눈이 자주 아파서 걱정이다. 눈을 많이 피로하게 하는 직업인데, 차라리 내 눈이랑 바뀌었으면 좋겠다.
사람들이 경민이 보고, 무감정의 인간이라고 하는데 절대 아니다!!
경민이처럼 따뜻하고 순수한 사람이 드물거다.
다만 경민이가 좀 표현을 잘 할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언젠가 경민이가 자기는 눈물이 없는 인간이라고 했다.
난 경민이가 슬퍼서 흘리는 눈물보다 기뻐서 흘리는 눈물을 느껴봤으면 좋겠다.
눈물이라니까 괜시리 이런 글이 떠오른다.

좋아하는 것은 귀로서 시작되지만..
사랑하는 것은 눈으로 시작된데..
그래서 좋아하다 싫어지면..
귀를 막으면 되지만..
사랑하다가 헤어져서 눈을 감으면..
눈물이 흐르는 거래..


경민이는 두 볼에 타고 흐르는 뜨거운 두줄기 눈물을 느낄수 있었다...



p.s : 휴~~우! 그냥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1시간만에 써버렸네요..
        의학적 지식이 없는 관계로 안구건조증이 어떤지 잘 모르지만, 그냥 눈물이라는 주제 때문에 적어봤습니다.
       허접한 글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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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R_Carter[15]
02/09/12 19:05
수정 아이콘
둘은 죽을때까지 함께 하겠군요.
어찌보면 가장 행복한 커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수진양같은 여자 없나.. -_-;;
응삼이
02/09/12 19:59
수정 아이콘
에어 카터님도 혹시.........안구건조증?
사랑릉 눈으로 본다라 ...저도 눈이 별로 안 좋아서 이때까지 사랑을
못하나 봅니다. ㅠㅠ(나두 눈물 안나오네)
하여튼 슬픈 사랑이야기 잘보았습니다.
굳이 프로게이머가 아니라도 잘 어울릴듯한 이야기네요.
이 글 읽으시는 프로게이머분들은 애인들에게 전화 한통 할 것 같네요.
불멸의저그
02/09/13 03:19
수정 아이콘
잔잔한 진행, 잔잔한 논조, 잔잔한 결말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아무리 세상살기 힘들어도, 님의 쓰신 이런 잔잔한 이야기에 다시 한번 마음이 깨끗해지도록 노력해야겠죠???
다른 글도 생각나실때마다 올려 주십시오. 님의 글 참 좋네요.
마치강물처럼
02/09/13 08:34
수정 아이콘
갑자기 쓴 내용이라 좀 어설프네요.
그래도 다들 잘 읽어 주셨다니 고맙습니다..
아트 블래키
02/09/13 08:36
수정 아이콘
우리가 날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진짜 소금이 될 테지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사람들을 대할 때,
이기심을 조금만 빼어버려도 하얗게 맛좋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이해인수녀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는군여.^^;;

마치강물처럼님!
1시간만에 쓰신글이라고는 믿기지 않네여.
슬픈얘기지만 기쁘게 잘 읽었습니다.^___^
한 톨의 진짜 소금이 되기 위해 아플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저는................................................
마냥 즐겁습니다.
후니...
02/09/13 10:32
수정 아이콘
강물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_ _)
강물님께선 많은 재능을 가지고 계신 것 같네요.. ^^;
앞으로 pgr21의 인기 작가가 되시기를 빕니다..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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