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추리소설] <왜 그는 임요환부터...?> -56편
#1
"우리 팀에서 블리즈컨 나만 참가하는 것도 아니잖아, 왜 나만 붙잡고 조르는 거예요?"
"주장이 미국엘 나가는데 코치 선물을 안 사온대서야 말이 되냐?"
"요환이형을 좀 본받아요, 열쇠고리나 한개 사오래는 거 봐. 내가 아주 후레쉬 달린 큼지막한 걸로 하나 사주고 다른 선물도 잔뜩 할거야. 하지만 준호형처럼 술 사와라 옷 사와라 하는 사람한테는 아예 아무것도 사주기 싫다구요."
이준호 코치는 잠시 딴청을 피우더니 정 감독을 가리키며 귓속말을 했다.
"저러다가 진짜로 하나 지르실 거 같지 않냐?"
진호는 정감독이 열심히 클릭하고 있는 화면을 몰래 들여다보았다. 나이트사이트, 나이트비전 등의 상품명만 봐도 뭐 하는 물건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정감독은 이것저것 적기도 하고 심지어 전화를 걸어 물어보기까지 했다. 녹화는 가능한지, 화질은 얼마나 좋은지 등을.
"대체 적외선카메라가 왜 필요하신지 모르겠어. 밤에 뭐 찍을 게 있다고."
"몰라요. 이번에 우리랑 미국 나갔다 올 때 하나 사 오시겠다던데요. 진짜 제대로 된 걸로 지르신다더니 아직 장난감 같은 것만 검색이시구만."
툴툴거리던 이 코치는 진호의 등을 떠밀어 연습실 의자에 앉혔다.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병민이 터벅터벅 뒤따라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또 한숨을 쉬었다.
"지금 KTF에서 제일 잘 나가고 있다는 녀석조차 저렇게 축 늘어져 있으면 어떻게 해."
이 코치가 아무리 답답해한다 한들, 정작 원인을 아는 사람은 그 자신과 진호뿐이다. 진호는 연습실에 들어오자마자 로봇처럼 헤드셋을 쓰는 병민의 어깨를 툭 쳤다.
"대체 지혜씨하고는 왜 헤어진거냐?"
아직 어린 테란은 선배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막 불이 들어오는 모니터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데생용의 로마인 조상처럼 잘 깎인 그의 코를 하릴없이 부볐다.
"뭐를 극복 못한거야? 나이차? 공주병?"
"몰라. 좀 변할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끝내 그렇게 하질 않는 걸. 나 만나기 전만 해도 테란이 뭔지 저그가 뭔지도 모르던 누난데 나 만나고 나서도 여전히 말이 안 통해.
좀...... 관심을 가져줄 수도 있는 거잖아. 남자친구가 뭘 하는 사람인지, 뭘 하고 있는지."
"너한테는 관심이 있었으니까 만난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뭐냐고. 나는 그냥 어리고 귀엽고 키 크기만 하면 되는 애완동물 취급받고 있다고."
그러니까 내가 뭐냐고?
그러면 나 홍진호는 뭘까, 그 괴팍한 여자에겐?
"이건 자존심의 문제야. 완전히 나를 우습게 보고 있어. 항상 나에 대해선 모르는 척 상관없는 척 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있다구. 바보같은 생각이잖아? 남녀간에는 사랑을 덜 주는 쪽이 무조건 이긴다는 생각 말야. 왜 꼭 이겨야만 하냐구. 나이 많다고 학벌 좋다고 해서 항상 이기려드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
"그게 꼭 이기고 싶어서 그런 걸까, 너나 나한테 스타는 밥먹는 것보다 익숙하지만 그 여자한테는 굉장히 어려운 세계일 수도 있잖아.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
시현씨가 매번 병원말로 꼴깝떠는 거 내가 왜 참는 거 같냐? 그냥 그 여자 주변 사람들끼리는 그런 대화가 습관인 거, 난 그냥 모르고 넘어가면 된다고 좋게 이해해주려 애쓰는 거야."
병민이 잠자코 그 말을 듣더니 정색을 하고 진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형, 그 누나...... 좋아하는구나?"
#2
"강민을 죽여 달라고 이렇게 네가 먼저 요청해올 줄은 몰랐는데. 강민이 어디까지 알아냈나?"
"당신들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라. 하지만 나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어. 그 자식은 내가 어떻게 해명해 볼 기회도 없이 나를 매장시킬지도 몰라. 그리고 나를 믿어 줄 사람은 없겠지."
"'협회'같은 멍청이들 밑에서 일하려면 몸을 사려도 모자란데 또 누굴 없앨 일이 생기다니 웃기는 일이군. 어떻게 해줄까?"
"한강변에 있는 우리 아버지 별장 있잖아. 당신들이 나 감시하러 쫓아왔던 적도 있으니 어딘지 알겠지. 내가 강민을 태워서 거기로 데려갈 거야. 사방에 개미새 끼 한마리 없는 곳이라 적당할 거다."
"그냥 우리가 강민을 잡아오는 게 확실하고 좋을 걸."
"강민이 갑자기 실종되면 난리가 날 텐데 어떻게 할 셈이냐? 나랑 만나서 놀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없어졌다고 하는 편이 그림이 좋지."
"알았다. 그러면 지하실 같은 데 얌전히 묶어 놔."
"시끄러워, 남의 집안에 피 튀길 생각 마라. 마당에 대기하고 있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쏘는 거야. 그 다음에 어디다 묻던지 말던지 알아서 해."
"날짜와 시간은?"
"당장 블리즈컨은 물론이고 당분간 일정이 너무 빡빡해. 11월 12일로 하자."
그는 날짜에 틀림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듯, 방에 걸린 달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어느샌가 방에 들어와 있던 두 개의 눈과 마주쳤다. 설마 통화내용을 들었을까?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면 못 들었거나 들어도 이해 못했을 것 같긴 하지만- 날짜는 확실히 들었을 것이다. 살인을 계획한 날짜를.
#3
출국을 위해 짐을 싸고 있던 민과 정석의 방에 진호가 들어와서 챙길 물건이 더 없는지 물었다. 선물 사서 담아 올 것을 생각하면 짐에 여유가 있어야 할 거라는 정석의 말에, 민은 살 게 뭐가 있겠냐고 참견을 했다. 그때 진호는 쏘아붙였다.
"난 연성이 생일선물 살 거야."
나머지 두 사람은 동시에 진호 쪽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면 생일이 얼마 안 남았겠지, 바보들아."
진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파악하고 정석이 자리를 비켜 주었다. 또 시비냐는 표정으로 민은 고개를 돌렸지만 이번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살고 누릴 거 다 누리는 게 부끄럽지도 않아? 뭐든지 끝까지 숨기려들면서 비겁하게 살아남은 게."
흉기를 파내다가 얻어맞고 입원했던 진호가 돌아왔을 때, 강민과 팀원들은 아무일도 없었다고 입 맞춰 부인했다. 목숨을 걸고 알아낸 차 번호가 적힌 쪽지는 또 어떠했던가. 강민이 주의를 혼란시키는 사이에 도둑맞았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다. 그 후 두 사람의 관계가 최악으로 달려간 것은.
"넌 항상 네가 옳은 척 했어. 폭로해봤자 안 먹힐 거다, 쓸데없는 일이다, 우리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난 네가 정말로 진실을 찾아내거나 밖에 알리는 일에 단 한번이라도 관심이 있었기나 했는지 그게 의심스러워."
진호가 빠르게 쏟아내는 말들에 그는 단 한 번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진호는 숨을 고른 후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네 진실이 뭐야?"
"네가 안전한 것이 나한텐 진실이야."
"내 걱정 해달라고 한 적 없어. 지금 네가 걱정하고 있는 건 강민 네 자신의 안전 뿐이지."
속눈썹을 내리깐 진호가 단호하게 대꾸하더니 돌아선다.
나도 지금 나름대로 계획이 있고 목숨을 걸고 있다는 걸 알아 달라고 하진 않아. 하지만 진호야, 제발 나한테 상처주지 마- 만약 내가 어떻게 된다면 그때 네가 정말 후회할 것 같아서 그게 걱정이야.
강민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는 쳐다보지도 않고, 단 두 마디와 함께 방을 나갔다.
"넌 겁쟁이야."
한 글자의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또다시 홀로 남았다.
※작가 코멘트
#2의 다소 섬뜩한 통화 내용 때문에, 작중에서 약속한 시간이 가까워짐에 따라(사실 굉장히 빨리 가까워짐) 이 소설의 스릴러적 면모가 부각될 듯. 음모은 어떻게 될까요?
아참, #1에 대충 끄적거린 상품명의 카메라들이 정말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_-
※다음 편 예고:
다음편은 이번주 금요일 밤.
#1
진호라면 그날밤 당장 마당을 파고도 남을 녀석이 아니었던가.
한 사람의 두 자아가 서로를 바라보며 말한다. 흔들리지 마라 박정석. 너는 강민과 다르다.
#2
그러나 그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먼저 들렸다. 날카로운 고음. 명령투의 거만한 어조.
그건 꼭 가슴에 직접 생채기를 내는 것처럼 씁쓸한 아픔을 예고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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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딕아빠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02-22 0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