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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1/15 17:46
잘 봤습니다.
역시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긴 영웅인가 봅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본문에서처럼 인조반정을 서인과 남인의 연립정권이라고 규정을 한다면 동인에 대한 반란보다는 북인에 대한 반란이라고 표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인 역시 동인에서 갈라진 당으로 알고 있는데 동인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게 어폐가 있지 않나 해서요. 물론 다른 의미가 있어서 일부러 괄호를 쳐서 이율곡, 이황 계열이라고 표기한듯 합니다만.. 그 부분은 제가 잘 몰라서 ^^; 매번 잘 보고 있습니다. :-)
08/01/15 17:55
콜록콜록님//아,그렇네요.
동인중,이황계열인 남인과 조식계열과 서경덕계열의 북인으로 나뉘어지고,북인정권이 광해군정권입니다. 동인 중에서도 북인들이 의병운동의 중추역할을 하였고요. 이황과 조식은 같은 경상도라는 공통점 외에는 경상좌도와 우도의 유림들로 나뉘어진 채 그다지 유사점이 없습니다. 조식의 수제자가 곽재우이고,그의 광신도적인 추종자가 정인홍입니다.....둘 다 최고의 의병장으로 국민적 신망을 얻었습니다. 본문은 조금 수정하겠습니다.
08/01/15 18:14
이순신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죠...
정부에서 거의 지원하지 않았음에도 무기를 개발하고 병사들을 훈련시켜서 숫적으로나 무기로나 전쟁경험으로나 모든 면에서 앞서는 일본군을 한번도 안지고 다 이겼죠.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08/01/15 18:51
후방에서 보급이 안되서 자멸한 군대가 역사상 허다한데..
충무공은 전투는 물론이고 보급까지 자급자족했으니.. 먼치킨이죠..-_-
08/01/15 19:02
잘 읽었습니다
kbs에서 방송했던 '불멸의 이순신'이 생각나네요 정말 감동 그자체였습니다 제가 사는곳은 해남인데 해남과 진도가 연결된 진도대교 인 '울둘목' 어렸을때 명랑대첩 축제 많이갔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그저 대단하다는 생각이 13척으로 133척과 싸우다니요 불멸의 이순신에서 명량대첩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나네요 전 해남에 사는걸 자랑스러워 한답니다 흐흐..
08/01/15 23:41
계속 계속 계~~~~~속 연재해주세요~
오랜만에 또 선조와 인조라는 희대의 망군들의 이름을 보니 멀리서도 짜증이 확~ 납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계속 읽어? 말어? 했었죠.
08/01/15 23:59
TheOthers님//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요? ㅠ.ㅠ
네이버 백과사전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무찔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인터넷에 보면 어디는 300척이상이였다 어디는 133척이였다 그러는데 확실히는 모르겠네요
08/01/16 02:27
명량대첩때 일본 수군이..그러니까...본진 53척. 선수 32척. 이진-1이 63척. 이진-2가 37척. 유세가 94척. 후할이 48척....그냥 다 정리하면 전투선 327척에 수송선 2백여척. 거기에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육군 수송함대 100여척에 시마즈 요시히로의 육군 수송함대 300여척..
얼추 900여척이니까 대략 천여척..;;;; 13:1000...이네요..;; 먼치킨도 이만하면 투명드래곤급인데요..;;(물론 수송함대는 매우 약하지만..;; 어차피 일본 수군의 전투함과 수송함의 차이는 방패판 붙이고 이것저것 보수한게 다니까..;;) happyend님//임진왜란때 선조가 벌인 삽질은 두고두고 후의 조선에 악영향을 끼쳤지 않나요? 왕에 충성하는 동인계열과 신권주의의 서인을 잘 돌려가면서(물론 왕권을 가지고 어떻게 하려는 생각을 가진 서인쪽이 더 낫긴 합니다만...;;)중요할때는 서인의 뜻을 수렴한거..결국 이게 붕당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저는 생각합니다만..;; 중요한건 나라, 즉 정부가 무능력함을 드러내면 나라는 망해야죠. 그런데 그런 나라가 거기서 더 이어졌으니...정치상황하고는 조금 다르지 않나 싶네요;;(PS. 서인이 힘을 잃었다면 후에 광해군이 왜 실패했는지 매치가 잘 안되네요. 설명 좀 부탁드릴께요..;; 제가 궁금해서..;;;)
08/01/16 03:13
전 가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실존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싸웠다하면 이기는 전승장군, 겨우 13척을 가지고 몇백척의 함대를 박살낸 기적의 주인공, 거북선을 고안한 천재적인 발명가, 모함으로 백의종군을 하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고결한 정신, 학익진이란 전법을 생각한 희대의 전술가, 거기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명언과 함께 전쟁이 끝나는 날, 자신도 숨을 거둔 드라마같은 마무리까지... 이건 거의 신의 현신이라봐도 과언이 아니죠;; 정말 신화에나 나올법한... 이런 일화도 있죠. 러일 전쟁의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있던 날, 어떤 신문 기자가 도고 제독에게 "각하의 업적은 영국의 넬슨 제독,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 비견할 만한 빛나는 업적이었습니다."라고 아부성 발언을 하자, 도고 제독은 "나를 넬슨과 비교할 수는 있어도, 이순신 제독과는 비교하지 말라. 그 분은 전쟁에 관해선 신의 경지에 오른 분이다. 넬슨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승리를 거뒀지만, 이순신 제독은 국가의 지원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훨씬 더 열악한 상황에서 매번 승리를 끌어 내었다. 나를 전쟁의 신이자 바다의 신이신 이순신 제독에게 비유하는 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말했다는... 적장에게까지 존경을 받았다는 이순신 장군같은 분이 우리 역사에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자랑스럽습니다.
08/01/16 04:02
특히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 부모에게 한없이 효도하고,나라에 끊임없이 충성을 맹세한 이순신은 강력한 힘으로 왕권에 도전해오는 노론들에 대한 적절한 차단막이 되어줄 것이라 여겼습니다.
"특히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며," 로 수정하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에 옥의 티 같아서 지나가다 알려드리고 갑니다. 허허
08/01/16 05:30
네 신빙성이 있는 일화입니다. 몇번 저 도고제독의 이순신 관련 발언은 조작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DC 역갤에서 한번 파헤쳐졌던 적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뭐 그냥 카더라가 아니라 사학과 교수 인터뷰까지 진행하면서 체계적으로 사료들을 조사했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그때 결론이 아마...비슷한 논조로 말을 했던 것은 사실이나 출전 전에 이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일화는 확실하지 않다고 했었던 걸로 기억납니다. 기자에 의해서 기사화 됐던 것도 맞구요. 조금 찾아보면 나올겁니다.
08/01/16 09:28
KDX3GreatSejong님//선조임금의 무능함이라고 보지 않는 것이 역사를 더 객관적으로 보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역사가 한두사람의 유능함이나 무능함으로 인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탐구하는 것이 (역사,다시보기)의 취지이기도 해서요.
붕당정치가 선조임금시대에 본격화된 이유는 후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길 바라지만,그것 자체가 이미 조선왕조가 창업되는 순간 예고된 길이고,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는 순간 현실화된 것 뿐이며,유교의 왕권에 대한 두가지 시각,즉 절대왕권을 옹호하는 쪽과 신권을 우월하게 두는 쪽의 정치적 철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좀 더 실용적인 동인내 북인이 전쟁청산과정에서 권력을 쥔 것은 당연해 보이고,전쟁책임론이 조선성리학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이 북인정권이 성립한 배경이라고 보입니다. 서인과 남인은 이 성리학의 위기에 맞서, 의리와 명분,즉 군주의 도덕성을 물고 늘어짐으로써 인조반정을 성공시켰고요. 전쟁의 상처에 대해 국민들이 너무 쉽게 잊은 건지도 모르고요. 선조시대는 붕당정치가 비교적 균형을 잃지 않은 권력분점기이기 때문에, 선조임금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신권의 분열을 이용했던 것이고,그것이 선조시대 조선왕조가 막을 내려야 할 증거라고 본다면(외국의 동양사학자가 그렇게 말했습니다만)...완전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그런식으로 역사를 봐버리면 살아남을 역사는 지구상에 하나도 없으니까요.역사는 '존재'이며, 그 '본질'에 대해서는 다만....받아들일 뿐입니다. 히로님//^^제가 왜 "뛰어난 능력을 가졌으나..."로 썼는지는 그 문장내 행간에 있다고 여겨져서 보충하지 않았습니다. 잘난 명문가 노론들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정조의 정치적 노림을 부각시키기 위해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목동저그님// 도고의 이순신 장군에 대한 평가에는 다른 눈도 필요할 듯 해서,....제가 덧붙이겠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에 패배한 뒤,해군에서 조선따위에 밀린 것을 도무지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서,해군과 지식인들이 대답을 찾아야 했죠.나라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참전 장수인 '가토'가 거북선에 당하는 일이 일본 인형극으로 형상화되어서 아직도 공연된다고 합니다.그들은 패배를 인정하는 것보다 패배주의를 벗어나는 것이 제국주의 건설에 중요한 이념적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두가지입니다.하나는 이순신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서,마치 임진왜란에서 패한 것은 조선백성들의 저항때문이 아니라 이순신이라는 초시대적 영웅하나 때문이다.그런 영웅이 있다면,그건 어쩔 수 없는거 아니냐?이런 논리를 개발한 것이고요, 두번째는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둔갑시킵니다.임진왜란직전,이순신이 만들어낸 거북선은 단 세척입니다.(이 거북선의 발명가로 이순신을 두는 것은 오해라고 생각합니다.이순신은 수군에 있었던 적이 다해봐야 2년도 안되며,바닷가에 살아본적도 없습니다.배의 매카니즘을 연구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나대용이라는 괴짜 발명가가 10년간 연구한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고요) 이 세척의 거북선중 실제 전투투입,한산대첩에 쓰인 것은 두척입니다.그리고,돌격선으로 만들어 적진의 시야를 흐트러뜨리는 역할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사상자도 대부분 거북선에 탄 사람들에게 집중되었고요.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일본은 그런 별볼일 없는 배에 당한 것을 이해할 수 없었고,그들사이에 거북선에 대한 공포는 점차 확산,오해가 오해를 낳으며 마침내 철갑선이라는 '개념'이 획득된 근대에 접어들어 철갑선이라고 표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바로 우리나라로 역수입되었고요. 이순신을 신격화하는 것에 저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라....극단적으로 보일지 모르나,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낸 일이라 더욱 이순신이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08/01/16 11:12
약들구뗘 님//헉....좀 놀랐네요.
마지막 줄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연상하시다니.... 제가 의도한 바는 오히려,세계화의 칼바람앞에 서야 하는 이 엄중한 시국에,실력으로 맞서기 보다 차라리 충무공같은 신화속에 숨어들고 싶은 우리 국민들의 선택에 대해 얘기한 것이고요.그것이 이명박속에서 충무공처럼 이나라를 구할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충무공 신화를 통해서 '해석'해보고 싶었던 것이 이글의 의도입니다. '경제만 살리면 되지...'이 말속에 담긴 자조와 허상이 이순신신화를 통해 깨지기 바란 것이죠.국민들이 왜 이명박을 선택했을까요?멍청해서요?물론,대중은 항상 똑똑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사는 숱하게 보여줬지만 그것이 답은 아닙니다. 아마,한나라당에서 박근혜가 후보로 나왔다면,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그점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전과 14범 대통령....저역시 끔찍하고,그걸 알면서도 선택한 국민들이 어처구니 없지만...국민들은 이명박에게서 '신화'를 기대한다는 것이죠.아마 그양반 자서전이 '신화는 없다'인가 ,뭐 그랬던거 같다는 생각도 얼핏드네요.
08/01/16 13:56
명량해전 당시 왜선이 몇 척이었느냐에 관하여 의견이 분분한 것은 각 사료들이 다 다른 기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징비록]에는 300여 척, [난중일기] 친필 초서본에는 130여 척, 이순신 조카인 이분의 [행록]에는 133척입니다. 유성룡보다는 본인의 기재가 더 신뢰할 만하고, 이분의 [행록]은 어차피 난중일기를 인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130여 척을 취하는 설이 다수설입니다. 그런데, 1795년에 [이충무공전서]가 발간되면서 거기에 실린 [난중일기(보통 전서본이라고 부릅니다)]에 330여 척, [행록]에 333척으로 바뀌게 되어 이후 330여 척 설의 근거가 되는데요. 이것은 편찬자가 [징비록]을 참고하여 고쳤든가, 다른 의도가 있었든가 간에 자신의 의사에 따라 고친 결과로 볼 수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꼭 330여 척 설이 틀렸다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전투에 참가하여 이순신이 볼 수 있었던 배만 130여 척일 수도 있거든요. 위에서 당시 일본의 총 해군력이 1,000여 척에 달하였다고 설명해 주셨는데, 명량해전에 일본의 전체 함대가 다 투입되지는 않았겠죠. 실제로 [난중일기]에도 전투 2일 전의 육지정탐결과로 [적선 200여 척 중 55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의하면 200척이 출동한 것이 됩니다. 70척은 어디로 갔을까요? 또, [이충무공전서]에 실린 [행록]에서는 [피난민들이 높은 산 위에 올라 바라보면서 적선이 들어오는 것을 300척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몰랐다]는 기재가 있는데요. 결국 피난민들이 목격한 배는 330여 척이지만 실제 전투에 투입되어 이순신이 볼 수 있었던 배는 130여 척일 수도 있겠죠. 330여 척이 실제로 출동하였다 하더라도 모조리 전투에 투입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명량에서 격침된 왜선의 수가 31척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1할 정도의 손실을 가지고 후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1/4 정도의 손실을 봤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봐야겠지요. 어쨌거나... 진실은 저 너머에...
08/01/16 14:16
330여척은 보급선단까지 합친거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죠. 전투선단이 133척이라고 보는게 맞을 겁니다. 어쨌든 133척이든 333척이든 명량해전은 만화같은 승리죠.
08/01/16 14:35
이순신의 전공들은 거의 판타지급입니다. 게다가 보급선까지 자기가 직접 확보하면서 싸웠죠.
어떤 해석을 가하든 일본의 해전영웅인 도고제독조차도 '자신을 넬슨과 비교할 수는 있지만 이순신에는 발끝조차 따라가지 못했다'라고 한 일화는 너무 유명하죠.
08/01/16 19:23
happyend님//왕정시대 군주의 무능은 충분히 나라 말아먹을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정확히 말해 선조의 경우는 무능이 아니라 '정치적 이유'였던것 같네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
은별님//창해일성소님//명량해전은 사실상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의 승패를 결정짓는 전투였습니다. 뚫리면 조선은 멸망, 막으면 승리였죠. 게다가 이미 칠천량 해전 이후로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멸망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이순신이죠...;;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 올인한 셈입니다. 가용가능한 수군 전력 다 끌어모으고 육군의 병참과 보급을 맡겼죠.(육상보급이 안되는 이유는 다들 아시죠?) 그리고 당시 조정에 올리는 전과보고는 선조의 삽질 덕에 최대로 축소(일본 기록보다 적죠..-_-)되어 올려지니 믿을게 안 됩니다. 완전 격침만 31척이라는 소리면..-_-;;; 아무튼 이순신의 13척 조선 수군은 사상 최강의 함대죠...;;;
08/01/16 19:35
명량해전에 대해 제 의견을 보태자면,왜 임진왜란 3대대첩에 한산대첩,진주대첩,행주대첩만 있는지...명랑대첩은 없는지 생각해보면,일단의 진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전투는 전쟁의 승부를 갈랐습니다.
명량해전은 엄밀하게 말하면,이순신의 과학적 준비성이 빛을 발했지만,다른 면에서는 '운'이 좋았습니다.일본군은 단 한순간도 수군이 주력이었던 적이 없고,오로지 수송역할만 담당했습니다.그래서 배에는 대포가 없었고요.그들이 명량해협을 지나갈 그 시간은 가장 해류가 빠른 날입니다.그날 그곳의 바다가 우는 소리를 본따 '울둘목'이라는 이름을 지었다죠?(해남분...) 그 좁은 해협으로 그 빠른 해류를 타고 들이닥치는 일본의 배는 간단히 철쇄공격으로도 무력화시킬 수 있었습니다.물론,13척의 군함이 있으니 모든 배는 앞에서 꼬꾸라지고,설령 그 파고를 넘어도 조선수군의 대포공격에 무너졌습니다. 제가,이순신의 장계를 꼼꼼하게 검토해서 얻은 일본군 함대의 피해정도를 보면, 한산해전 1592년 7월 8일 적선 47척 격침,12척 나포 부산포해전 1592년 9월 1일 적선 128척 명량해전 1597년 9월 16일 적선 31척 노량해전 1598년 11월 18일~19일 적선200척 일본군은 첫 교전에서 피해가 속출하고,물길의 방향이 바뀌자 진입을 포기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그렇기 때문에,130척이니 330척이니 하는 숫자는 의미가 없었고,일본군의 피해도 예상외로 적었던 것이고요. 물론,이 전투때문에 일본군이 전의를 상실한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08/01/16 22:41
happyend님//수군이 주력이었던 적이 없었고, 그래서 배에는 대포가 없었다는 말은 어폐가 조금 있는것 같습니다. 왜구들이야 정규군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애초에 일본은 해전에 있어서도 배끼리 맞대고 육박전을 치르는게 보통 아니었습니까? 임진왜란때도 판옥선에 일본 함선이 접근해 육박전을 벌이면 보통 판옥선은 그대로 무너졌습니다. 당연하죠. 제대로 접근전을 훈련받은 병사들은 거의 없었는데요.(그나마 승병들이 접근전에서 유일하게 일본군과 대등하게 싸웠습니다.)
게다가 차후에 나타나는 누각선은 조선수군에게 굉장한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숙련된 화포기술자가 없는 탓에 싸움은 역시나 조선 수군의 승리였습니다. 그리고 철쇄공격이요...?;;; 저도 직접 가보지는 않았지만 가신분의 얘기에 따르면 그만한 철쇄를 만들고, 또 거는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더군요. 가뜩이나 화포 제작도 버거운 수군이었는데 그만한 철을 어디서 구했으며 또 판옥선의 노잡이들도 부족한 판국에 철쇄를 걸만한 인력은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장계는 당시 선조가 이순신의 보고는 어떻게든 흠집을 내고 빈틈을 찾으려 했기 때문에 패배한 일본군 장수의 보고보다 그 성과가 적은게 빈번합니다.(일본쪽 기록도 찾아보시길) 게다가 칠천량 해전 이후 고니시군과 가토군등은 다시 북진할 계획을 세웠고 남원성에 명군 1만 이상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물론 낚였지만요..;;) 수군까지 동원해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전쟁을 끌고 나가려 합니다. 그래서 수군이 총동원돼 육군의 보급을 맡은 거죠. 즉,수군이 주력이었던 적이 없고 수송역할만 담당한 이유는 조선의 도로사정때문에 보급이 불가능 했기때문이었지 결코 수군이 절대적으로 약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첫 교전에 피해가 속출했다고는 하지만 전쟁의 성패가 달린 일입니다. 대충 깨져서는 포기하고 물러설 리가 없겠지요. 게다가 명랑대첩 이후 조선수군은 화약이 모자라 울돌목을 포기하고 뒤로 물러납니다. 엄청나게 퍼부었다는 소리겠죠. 그리고 선조는 명랑대첩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에 명의 군대가 그나마 참패를 겨우 벗어나는 직산전투를 엄청나게 떠받들어 명나라 장수들에게 과도한 아부를 떨기 시작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나라 국왕이 대령쯤 되는 사령관한테 가서 재조지은을 입었다며 감사하다고 절을 하려고 합니다. 당시 사관들은 그걸 기록으로 적고 나면 붓을 꺾고 손과 귀를 깨끗이 씻었다고 하죠..;;; 그리고 일본수군의 서해안 진출은 명나라 해안쪽에도 막대한 위협을 줍니다. 당장 요동에서 군대가 잡혀있다가 명랑대첩이 끝나자 군대가 내려왔으며 이후 전쟁의 승패를 바꿀지도 모를 명나라 수군도 내려오죠. 한마디로 명이 조선에게 재조지은의 은혜를 입은 겁니다. 더욱 더 큰 증거는, 이후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께 명나라 벼슬로 정1품 도독을 하사합니다. 명나라 수군대장인 진린이 정2품 도독첨사니 실질적으로는 이순신의 품계가 더 높다는 말입니다. 대충 막아선 걸로 정1품을 줄까요?(조선국왕에 대한 명나라의 대우 역시 정1품과 비슷합니다.)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세를 바꿀만한 기적. 영화 300은 영화지만 명랑해전은 정말 있었던 전투입니다.
08/01/16 23:35
장계는 해당 전투를 지휘한 장수가 직접 작성하는 것입니다.
선조가 이를 조작했다는 흔적이 없는 한, 선조의 의사에 따라 전과가 축소되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08/01/16 23:40
KDX3GreatSejong 님//개인적인 평가까지 제가 뭐라 그럴 수 있겠습니까.
다만,말씀하신 세가지에 대해서. 1.일본의 배인 안택선은 삼나무로 만들었습니다.그래서 빠르긴 하나 대포를 실을 수 없습니다.그들이 거제도에 웅거한 동안,거제도의 소나무로 판옥선을 만들까봐 노심초사했으나(선조실록)그들은 해상전술에 변화를 주지 않고,게릴라전만 가능한 빠른 안택선(V자형 배)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이 게릴라전에 대항하여,이순신은 V자형 밑바닥과 판옥선을 결합산 쾌속선을 개발,어영담을 통해 게릴라전을 펼치는 일본수군마저 소탕한 뒤,바다는 정유재란까지 평정되었습니다. 정유재란에서도,일본의 배는 대포가 주화력이 아니었습니다.그런까닭에,명랑해협같은 곳에서 대포를 통해 조선수군의 진영을 무너뜨렸다면,명랑해전의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2.철쇄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하므로,가설이라는 점은 동의합니다만....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아니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근거로는,이미 임진왜란 전, 이순신은 수하의 과학적 재능을 가진 이봉수를 통해 여수앞바다에 철쇄를 심는 일을 맡겼습니다.여수에 가보셨으면 아시겠지만,굴곡이 심한 남해안에는 철쇄를 통해 스파이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이 철쇄는 낮에는 바닥에 가라앉아있고,밤에는 들어올려져서 적의 배가 걸리는 구조입니다.아래에는 돌을 매달고,위에는 부력을 이용할 나무가 잇달아 매어져 있습니다. 이걸 설치하고,운용할 인력에 대해서는 저는 강강수월래 전설이 그걸 뒷받침한다고 생각합니다.여자들이 울둘목양쪽에 둘러서서 철쇄의 양쪽 지렛대를 돌리며 올리고,내리는 일을 했던 것이고요,그때 강강수월래를 불렀습니다.강강수월래 춤을 한번이라도 보셨다면,제가 말씀드리것을 이해할 것입니다.철쇄의 도르레를 올리고 내리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3.명랑대첩의 의의에 대해서나 명나라가 오히려 이순신에게 빚진것에 대해 저는 조금도 이의가 없습니다.그러나,그것이 임진왜란 3대대첩에 들어갈 전투가 아닌 이유는,나머지 전투의 의의를 보시면 분명해집니다.명량해전에서 일본이 이겼다고 해도 시간을 조금 더 벌었을 뿐이고,우리 민족의 고통이 조금더 커졌겠지만,전황이 바뀌진 않았을 것입니다.이때 이미 명나라 도독 진린이 국경을 넘어왔으니까요. 제가 이순신을 극단적으로 폄하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은 누누히 말씀드렸고요,오히려 신화로 보기보다 합리적 인간의 과학적 측면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오해가 있었다면 양해를^^
08/01/17 00:00
여하튼..... 아무리 여러 임금과 독재정권이 이순신 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 할지라도
또한 그 자신이, 선조가 혹은 후대가 이순신의 성과를 깍기도하고 높이기도 했을 수는 있지만...... happyend님의 말씀대로 인간으로써 믿기지 않을만한 업적을 남겼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겠죠...... 근데 명랑해전에서 졌으면 조선백성의 고통은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커지지 않았을 까요..... 왜세의 의한 독립유지는 한마디로 "그닥" 아닙니까..... 60여년전에 절실히 보여줘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으니까요....
08/01/17 02:30
happyend님//아...^^;;;; 저는 그런 뜻에서 말씀드린건 아닙니다. 엣날 역사를 어떻게 보던 그건 각자의 생각이죠. 저도 신화는 싫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린 누각선은 안택선이 아닙니다. 몇척 안되긴 하지만 어찌되었던 화포를 실은 대형함선이니 명랑해전때는 엄청나게 위협으로 작용했겠지요. 물론 주력은 안택선입니다..^^ 그리고 철쇄건은..;; 대략 철 4톤이 필요한 일을 왜 했을까요..;; 물론 여수앞바다에 철쇄를 심기도 했었지만 그러한 철쇄의 용도는 주요 항구나 수영 입구 같은 중요한 곳에 쓰는 게 대부분이었을 겁니다. 게다가 철쇄의 사용이 나온 사료는...택리지고 김억추 건은...(에휴..;;;;) 아마도 우수영 입구에 심는 철쇄를 보고 와전된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마지막 문구에선 아연실색했습니다...;;; 명량해전에서 일본이 이겼다고 해도 시간을 좀 더 벌었을 뿐이었다는 말씀에는..;; 당시 한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일본 육군은 보급을 하지 못해 북진을 못하고 있었던 것이지 실 군세 상으로는 이미 옛날에 의주까지 밀고 올라갔을 군세입니다. 그걸 수군이 보급을 끊어 막고 있는 것인데 수군이 무너지면 그대로 게임 오버죠. 임금이요? 당연히 의주로 튀고 안되면 명으로 튀겠죠. 게다가 명군이 제대로 싸운 적은...경리 양호가 직접 지휘한 울산성 전투 정도 빼놓고 나면 저는 기억에 없습니다 -_-;; 더더욱이 명랑해전 이후 조선수군에게 가장 큰 문제가 되었던건 명 수군이지 일본 수군이 아닙니다. 이미 명군의 노략질은 잘 아실테지만 말입니다..;;(백주 대낮에 강간 시도 하다가 근처 소년이 보고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자 따라가 목을 베고 그 목을 들곤 웃었다는 기록 정도가 대표적이네요..;; 물론 건수가 심해 사형당했습니다만은...) 게다가 당시 명 수군의 주력함선인 사선과 호선은...-_- 특히 명 수군의 주력포인 호준포는 조선 수군의 신호용 포탄입니다. 게다가 진린 이전에 와 있던 유격은 배가 있는데 무기가 없어 이순신에게 모든 화포를 명 수군에게 넘기고 천자총통 만자루를 더 만들어내라(천자루였던가요..?;;;) 그렇지 않으면 못싸우겠다며 난리였습니다. 너무나 뻔합니다. 게다가 이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이 이후에 한 일은 조선 수군이 왜 수군을 박살내 놓으면 그 뒤에 따라오면서 바다에 허우적거리는 왜병들을 잡아 목을 베는 엄청난 전투를 벌이지요. 명랑대첩의 가치가 하락된 것은 선조가 이순신의 공을 없애기 위해 평가절하(절하 정도가 아니라 무시)하였기 때문이라 추측합니다. 이순신 장군을 여러 임금과 독재정권이 이용하려 들었다 하여 그 성과를 깎아내리는건 좀 난감한 일이 아닐까요? ^^;;;;;
08/01/17 15:08
23전 23승..정말 엄청난거죠..예를 들자면 22:0에서 상대가 1승을 더 찍는 순간 승패가 갈라지는 다전제 경기를 연상하면 될것 같습니다.. 조선수군은 단한번의 패배만으로 뒤를 바라볼수없는 상황이었습니다...결국 칠천량에서 원균이 해냈죠.. 선조의 부산을 치라는 우격다짐으로 내린 명령도 한몫했습니다. 이순신장군께서 항상 몸이 아프거나 인사불성이되거나 한 기록이 많았던 것은 한번의 패전으로도 끝이라는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몸이 견뎌내지 못한 대문이겠죠,,.,항상 느끼지만..참으로 현실적이지 않은 분이십니다..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생각할수록 대단하신분..
08/01/17 19:05
은별// 선조임금은 나라보다 왕권을 더 의식한 임금이죠. 왕권을 위협하는 자는 용납될수없습니다. 한마디로 이순신이 장계에 그 전과 그대로 다올렸으면 이순신장군은 척살당하는겁니다.
happyend // 명나라는 당시 쇠퇴하던 나라였으며 명군은 겁 많기로는 따라올 군대가 없었죠. 수로보급으로 일본육군이 계속 북진만 가능했더라면 지금 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곳은 일본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당시 조선이 길이 파놓지 않아 보급의 어려움때문에 임진왜란때도 조선땅을 다 삼켰다가도 그자리에서 굶어죽고 얼어죽은 것이고 정유재란 때도 마찬가집니다. 칠천량해전(칠천량도 아니고 해전도 아니기에 칠천량해전이랑 단어자체가 성립불가라 생각합니다)험한 남해를 돌아갈 항해술이 없었기에 수로보급을 위해 울돌목을 지나야만했고 명량대첩으로 보급로 막히자 일본육군은 보급한계선까지 도로 돌아와야했죠.
08/01/18 11:42
일본 육군이 평양까지 진격했지만 결국 돌아왔던건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가 수상로를 이용한 보급이 차단되어서 였죠.
육상으로의 보급은 곳곳에서 일어나는 의병들과 제대로 닦여지지 않은 길들 때문에 보급 자체가 힘들었구요. 만약 명랑해전에서 졌다면 신의주까지 밀리는건 시간 문제였겠죠?
08/01/18 14:12
RouGh님//자유게시판에 비슷한 글이 있어서,답을 드렸습니다만....다시 제 의견을 말씀드리면(뭐,의견이랄것도 없습니다만)
일본이 임진왜란때 전술이 속전속결이었습니다.그러나,예상치도 못하게 조선수군의 반격에 일부 병력을 뒤로 빼야 했고,이것이 전력의 약화를 가져와 일본의 치명적 퇴각을 야기했습니다.그래서,한산대첩이 임진왜란 3대대첩이 된 것이고요.(개인적으로 진주대첩이 과소평가되는 것이 가장 가슴아픕니다.진주대첩이 없었다면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키는 일은 불가능했고,일본군은 자체보급을 완성했을 겁니다.다행히 진주성을 지켰고,다행히 임진왜란직후 몇년간 풍년이 들어 하느님이 보우하사,나라를 지켜냈습니다) 정유재란때 조선의 피해는 더 컸지요.이무렵,나라는 흉년이 들었고,오랜 전쟁으로 지친상태였으니까요. 맞은데 또 맞은 격이고요. 그러나,국제정세는 이미 일본도 더 전쟁을 할 여력이 없어졌습니다.설령 우리나라를 점령했다고 해도,조만간 격퇴되었을 것입니다.일본은 도요토미의 죽음으로 사실상 내전상태로 접어들었고,명나라도 멸망을 앞두고 있었으니,다들 제코가 석자였던 것입니다. 명랑해전에서 이순신이 패배했다면,우리 민족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고,아마 이곳에서 키보드를 두드릴 수 없는 사람도 많았겠죠.조상의 죽음으로 인해 태어나지 못했을테니....그래서,이순신에게 우리민족은 빚이 있는 것이고요. 명랑해전은 그 드라마틱함에 비해,예고된 일본군의 패배가 제 의견이라는 것만 말씀드리고 싶네요.일본군의 울둘목 통과전술의 핵심은 해류에 편승해서 신속하게 서해안으로 진입하는 것이었지만,그들의 배는 장거리 대포가 없었고,이순신 함대의 13척의 배는 대포로 무장했으니까요.좁은 다리 건너에서 시즈탱크 13대로 벌처 330대(혹은 130대)와 맞서,31대의 벌처가 죽자 상대가 퇴각한 게임처럼 말이죠. 이날 해류의 방향을 보면,일본수군이 집입시점을 정점으로 서쪽으로 흐르던 해류가 4시간만에 역류하기 시작,더이상 일본군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08/01/18 17:29
happyend님// 음... "예고된 일본군의 패배"는 명량 뿐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한산 대첩"도 저는 "예고된 일본군의 패배"라고 봅니다. 상대를 유인하여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짜여진 학익진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일단 그 안으로 들어온 다음에는 도망갈 곳도 없이 전멸을 당하는 것이 당연해 보이도록 만들고 정말 그렇게 합니다.
명장은 자기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선택한다고 하죠.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90%의 승기를 잡고 시작하는 것 - 그런 전장을 찾아내고 첫 전투 이전에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고 가장 중요한 것은 적이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길 수 있다고 착각하며 전장으로 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 은 역사적으로 명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기량입니다. 명장의 전투를 감상하려면, 전투가 일어나기 전의 그런 준비가 어떤 식으로 되었나, 그걸 확인하는 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막상 전투 자체는 마치 엄청 연습을 하고 나온 오케스트라를 감상하는 것처럼 준비된 시나리오 대로 전투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즐기면 되는 거죠. (하지만 승패 자체는 막이 오르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이길 수밖에 없는 전장을 만들어 이기는 게 명장이고, 그런 준비 없이 열심히 싸워서 이기면 용장쯤 되려나요. 그래서인지 명장들의 승리한 전투를 보면, 대개 승자와 패자의 손실이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자신의 주력은 거의 상하지 않은 상태로 적의 주력을 섬멸하곤 하죠. 전투에서는 이겼는데 피해가 막심하다, 소모전에서의 승리 - 소위 말하는 "피로스의 승리"는 명장의 전투 스타일이 아닙니다. 기껏해야 용장이겠죠. PS) 한 마디 덧붙이면: 어떻게 13척의 배로 수백척의 일본 수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해전을 설계하고 그 전장으로 끌어들였나 생각하면 소름이 끼칩니다. 명량에서 이기고 왜 충청도까지 후퇴했는가, 그건 바로 그런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설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웠음에도 불구하고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이길 수 있는 최선의 기회를 찾으시는 그 분은... 정말 소름이 끼치도록 냉정하고 무서운 분입니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보아도 상대할 위인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08/01/19 14:02
RouGh님// 선조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하시군요. 선조가 나라보다 왕권을 더 의식했고, 이순신이 왕권을 위협하는 수준이었으며, 따라서 이순신이 죽기 싫어서 장계에 전과를 축소해서 보고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셨는데, 그 부분에 관한 증거를 몇 개만 대 주시기 바랍니다. 선조가 이순신에 대하여 수사 임명시에는 때는 파격승진, 파직할 때는 한방에 날려버리는 식으로 이랬다저랬다 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설인 불멸이나 칼의노래에 나오는 수준까지 의심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08/01/19 15:53
은별//증거라....;; 역사적 사료를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집에서 놀면서 뚜닥거리기엔 너무 무리한걸 요구하시네요 끌끌.. 혹 시간되면 나중에 도서관가서 찾아드리지요/
불멸이야 그저 드라마로 재밌게 보았고 칼의노래도 읽기야 읽었지만 그런것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일단 먼저 말씀드립니다. 상식선에서 말씀드립니다. 선조는 방계 혈통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즉위 초에는 상당한 선정을 펼쳤으나 중기 이후로는 보다 왕권강화에 중점을 두고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는것에서 나타납니다. 붕당체제를 가지고 놀면서 신권을 분열시켜(동인 줬다 뺏고 서인 줬다 뺏고 그러죠) 왕권 강화를 꾀하는 모습을 볼수있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터져버립니다. 임진왜란이 터지고 난 후 조정과 왕족은 열심히 도망가며 망명할 생각이나 하고있습니다. 명군을 기다린다곤 하지만 백성들에 발목잡혀 차마 명나라로 도망가지 못해 안달내는 모습 어느부분에서 나라를 중시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의병이 일어나 엄청난 활약을 해대니 민심은 조정을 등지고 의병들에게 몰립니다. 아, 의병은 거의 대부분 동인계열이었습니다. 당연히 선조의 입장에선 민심이 다른 누군가에게 집중되는 것은 과히 우려할만한 일이죠. 그리고 마침 반란이 몇개 일어날때 선조는 의병장들에게 누명을 씌워버립니다. 그결과 김덕령이 사형당하고 곽재우는 은거를 강요당합니다. 민심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죠.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임진왜란때에 그 많던 의병이 정유재란때는 별로 일어나질않죠. 그리고 제가 선조가 나라보다 왕권을 더 중요시했다고 말한 부분입니다. 수군 관할지역임에도 육군에서 군사를 빼가고 식량을 빼가도 이순신은 연전연승. 이순신은 가는곳마다 완승을 거두며 민심을 모조리 끌어들입니다. 물론 이순신이란 인물이 반란을 일으킬 사람이 아니며, 반란을 도모했다 하더라도 그 성공가능성은 극히 낮다는것은 인정합니다. 국제정세 상 이순신의 역성혁명은 필요성은 충분했으나 조선의 체제가 반란에 무너질만큼 허약하진 않았으니까요. 병력에 관한 부분은 잘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순신장군이 선조에 있어서 눈엣가시라는건 그리 어렵게 알수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 이순신장군에게 부산포를 공격하라는 어명이 떨어집니다. 그때의 전력은 이순신은 100여척정도(판옥선의 숫자이며 사후선등은 별 도움도 되지않고 정확하게 모르므로 제외합니다) 일수군은 수송선을 다하여 1000~1500척(정확한 기억이 안납니다.), 저기 윗분이 말씀하셨다시피 이순신장군은 판을 미리 짜놓고 이기는 싸움만을 하는 장군입니다. 아무리 이순신에 조선수군이라 하여도 저 병력을 상대로 망망대해에서 해전을 벌이면 이긴다는 보장이없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선조의 명을 어기고 그리하여 이순신은 파직당하여 백의종군을 하게되죠. 비록 당시 동인이 주도권을 쥐고있었고 이순신이 유성룡의 비호 아래 있었으나 어명을 어긴 죄, 동인도 막을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그 후 임금은 이순신 파직 후, 부산포까지 걍 쓸어버리겠다는 원균을 통제사에 앉힙니다. 잠시 원균에 대해서 말하자면, 원균은 수군의 주력인 경상우수사였고 싸우기 전까진 그저 듣보잡중 한명일 뿐인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였습니다. 원균은 일본이 쳐들어오자 해전은 승산이 없다며 싸우기도전에 판옥선 다태우고 도망간(100척 정도로 알고있습니다. 이 숫자는 이순신장군이 파직 당하고 원균이 통제사가 되어 부산포로 끌고간 총병력과 대동소이한 전력입니다) 전력이 있습니다. 근데 막상 원균이 통제사가 되자 원균도 부산포로 갈 생각은 않고 어기적거립니다. 그러다 상관인 권율장군에 혼쭐이나고서야 전병력이끌고 부산포로 러시갔다가 일본수군의 전선 수를 보고 쫄아서 도망갑니다. 추격속에 계속 맞으면서 춘원포까지 도망갔다가 더 도망갈 길이 없자 판옥선 다 버리고 상륙해서 튀죠. 그걸 일본수군은 좋다고 다 태우고.. 그 유명한 칠천량해전입니다.(여담으로, 당시 판옥선은 다 탔으나 조선수군자체는 얼마 죽지않았죠. 전사한 장군도 이억기전라우수사와 최호장군정도..) ..................... 그리고 기적같은 명량대첩 전까진, 조선은 희망을 잃습니다. 전라도 지방은 병탄 당할것이며 남원성에서 명군에 낚여 시간을 좀 끌었지만, 직산전투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상황에서도 명군 요동기병의 바보짓으로 다행히 무승부를 낸 일본육군은 보급로를 확보하고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며 북상할것입니다. 어느 사료였는지는 기억나지않으나, 백성이 일은 않으며 모든 곡식을 소비하며 축제를 벌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간단히 제 의견을 요약하자면, 물론 이순신장군 대신 원균을 앉혀도 조선수군은 조선수군이니 강력할것이다. 라고 크게 판단착오한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이순신을 파직하지 않았다면 나라가 망할위험은 없었을겝니다. 참, 그리고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 우려를 가지고 경계했다는 사실을 알수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명량대첩이 끝나고 조선이 한숨돌린후 이순신장군에게 선조는 술과 고기를 하사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그걸 먹습니다. 겉으로 보면 별거 아닌것 같지만, 이순신장군이 옥중에 계실때 어머님이 돌아가십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상중의 이순신에게 고기를 하사하여 먹도록 합니다(생고기 째로 먹었다는데 진위여부는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인 선조에 대한 평을 곁들이자면, 선조는 무능한 임금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초기의 선정과 인재를 보는 안목(선조대에 인재는 정말 차고 넘쳤습니다.) 그리고 정치적 능력에서 유능함을 엿볼수있습니다. 허나 안타까운것은 그 유능함이 결국은 자신의 혈통과 왕권에 대한 컴플렉스에 묶여 정치적생리 안에서만 발휘되었다는 점이죠. 왕권강화를 이끌어내기위한 붕당정치도 후대에 엄청난 부작용을 양산합니다. 선조가 평화로운 시대에 즉위했더라면, 그는 이상적인 왕으로 평가되었을겁니다만.. 안타깝게도 선조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거죠.
08/01/19 21:07
RouGh 님//두가지 사실만 ....
1.경상우수영에서 판옥선과 무기를 가라앉히고 도망간 사람은 우후(우수사 직속관)입니다.이름은 기억이 안나고요.아마 일본의 수군과의 싸움은 전략적 고려사항이 아니었던 임진왜란이전 상황의 영향에 따라 적에게 뺏기기전에 취한 행동이며 어쩌면 옳은 결정일지도 모르고요.원균의 책임은 맞지만 우후의 자발적인 판단이었고,후에 이걸 원균이 보고 받습니다. 2.선조가 붕당정치를 이끌어낸 것이 아닙니다. 조선의 훈구파와 사림파는 아실거교,훈구파는 왕권강화파이고,사림파는 붕당정치파입니다.도식화한다면...따라서 선조임금의 즉위와 함께 붕당정치가 표면화된 것일 뿐,선조의 정치적 의도때문이 아닙니다.정치사상이 훈구파와 사림파가 다릅니다.그런 점에서 선조시대는 사림정치의 모순이 드러난 것일 뿐이지 선조의 무능,오판 ...이런것은 부차적입니다. 전쟁의 시대에 효과적이었을 임금은 훈구파의 소멸이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냥...사실 확인차 적은 글이니...그 이상으로 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08/01/19 23:03
RouGh님//
선조와 이순신과의 관계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조가 방계였고, 이순신이 파직 당시 부산 진격 가능성이 있었는지에 관한 자료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말씀해 주신 대로 임진왜란에 관한 상식선의 역사지식이 있으면 다들 아는 내용이죠.) 제가 말씀드린 것은 [장계에 그 전과 그대로 다올렸으면 척살당하는] 정도의 정신병적 수준에 이르렀다는 부분에 관한 자료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조가 괴팍한 임금이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장계에 전과를 있는 대로 올린다고 하여 장수들을 척살하였다거나 척살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은 금시초문이거든요. 게다가 이미 칠천량해전 전에 해군 총사령관을 교체하는 삽질을 했다가 뜨거운 맛을 본 선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과연 명량해전의 장계를 곧이곧대로 올렸다고 하여 척살당할 위험이 있었나요? 장계라는 것은 전투 후의 보고서입니다. 임금 눈치 보느라 적게 보고한다구요? 미운 놈 찍어서 혼내주고 싶으면, 축소보고한 것도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습니다. '죽기 싫어서 장계에 전과를 축소해서 보고'한다고 무사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보고자 스스로의 생각으로도 허위임이 명백한 보고를 하는 위험을 무릅쓴다는 것 자체가 논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이순신이 아니라 하더라도, 임진왜란 당시의 장수 중 '선조에게 척살당하기 싫어서 장계에 전과를 축소해서 보고한' 장수가 있다는 사료가 하나라도 있다면, 제 주장을 철회하고 정중히 사과드리겠습니다. ※ 사족입니다만, 이순신 장군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은 장군이 석방된 직후이지 옥에 있을 때가 아닙니다. 또, 평시같으면야 상중의 사람에게 고기를 보내는 건 평판을 떨구고자 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당시는 전시이고, 장군께서는 해군 총사령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예법대로 진짜 2년간 풀만 드실 생각이었나봅니다. 지휘관이면서 그리 하시는 것은 무리죠. 선조가 보낸 고기 한 접시 먹는다고 해서 그것만 먹고 땡 한다면 영양보충 면에서 별 소용이 없었을 것이구요. 선조가 고기를 보낸 건 부하들의 목숨을 오락가락하게 할 수 있는 지휘관이니 앞으로는 고기 좀 먹으라는 취지로 보냈겠지요. 물론, 실컷 옥에 가둬서 힘 다 빼놓고 뒤늦게 웬 뻘짓? 이라고 보시는 분은 그전에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고기 보낸 것에 대해서는 선조가 미안하고 뻘쭘한 마음으로 보냈다는 해석이 대부분이었는데, 그걸 가지고 장군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한 작업이었다든지, 충성심을 시험한다든지 하는 설로 승화시킨 것도 위 두 소설이 처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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