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22/05/12 02:13:15
Name 파프리카너마저
Subject [15] 어느 여자아이의 인형놀이 (수정됨)

나는 어릴 적 인형놀이에 심취한 여자아이였다. 11살이 넘어서도 역할극에서 손을 떼지 못한 나는 꽤나 많은 인형들을 갖고 있었다. 여자아이라면 꼭 갖고 있던 미미인형부터 다양한 만화 종이 인형, 휴대해서 학교 수업 시간에 하기 좋았던 스티커 인형까지. 그중 가장 애정 하는 것은 카드 캡처 체리 종이 인형이었는데 다양한 변신 의상을 입힐 수 있어서 좋아했다. 인형 놀이 속에서 나는 공주와 왕자, 엄마나 아빠, 언니 또는 동생이 될 수 있었고 현실에서 해소되지 못했던 일들을 그 안에서 풀어내곤 했다. 그것은 작은 나만의 드라마였다. 주인공도 내 마음, 스토리도 내 마음, 착장도 내 마음.


그러던 어느 날 일생일대의 날이 찾아왔다. 엄마는 내게 친한 아줌마네 집에 놀러 간다고 말했다. 그 아줌마네는 내가 좋아하는 언니가 있었기에 나는 재빨리 종이 인형을 가방에 넣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아줌마네는 고층 아파트였는데 꽤나 깔끔했고 놀러 가면 유리컵에 항상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시곤 했다. 그날도 인사 후 쥬스를 마시고 있는 나에게 언니가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와봐." 내 손을 잡고 방으로 이끈 언니는 네모난 컴퓨터 모니터에 있는 화면을 보여줬다.




2.png

[ 너 심즈가 재밌단다. 느 집엔 이거없지? ]

충격이었다. 이 인형놀이는 이때까지 내가 알던 것이 아니었다. 커다란 저택 안 정원에서 언니의 인형은 언니의 의지에 따라서 화단에 물을 주고 있었다. 언니의 설명에 따르면 이 인형은 욕구가 있는데 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밥을 먹이고 잠을 재우고 화장실에 가야 했다. 인형은 냉장고를 클릭해서 음식 만들기를 누르면  척척 음식을 만들어 냈고, 티비를 클릭하면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봤다. 그뿐만이 아니라 화장실도 갔으며 정말로 잠을 잤다! 눕혀서 잠을 재워도 눈을 뜨고 천장을 보는 내 인형들과 달리 컴퓨터 속 인형은 눈을 감고 몸을 돌려 잠을 청했다! 이런 게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은데 언니는 한 가지를 더 보여줬다. 건. 축. 모. 드




나는 입을 벌리고 화면을 쳐다봤다. 언니는 자리를 비켜 마우스를 주며 나에게 해보라고 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 외로 간단했다. 원하는 게 있으면 사물을 클릭하고 말풍선을 클릭한다. 그러면 인형은 알아서 움직였다. 인형들은 말을 하면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가 입을 열어 1인 다 역을 해왔던 인형놀이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렇게 언니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인형들로 열심히 놀고 있는데 아줌마와 이야기를 다 끝낸 엄마가 집에 가자며 나를 불렀다. 아쉬움에 언니에게 이것의 이 게임의 물었고 언니는 답했다.


"심즈, 다음에 또 놀러와."


나는 결국 한 번도 꺼내지 못한 종이 인형이 든 가방을 들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내 머릿속은 온통 그 게임 생각뿐이었지만 집에 컴퓨터도 없던 지라 심즈를 플레이하는 꿈은 꿀 수도 없었다. 언니네 집에 다시 갈 수도 없었다. 엄마와 아줌마의 사이가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저 그런 게임이 있었다고 생각해서 잊힐 무렵...


14살, 우연히 방문한 마트 게임 가판대에서 심즈를 발견했다. 때마침 나는 설날 용돈도 갖고 있었다. 이제 집엔 컴퓨터도 있었고 나는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지난 기억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게임팩을 안고 집으로 뛰어왔다. 컴퓨터를 켜고 CD를 넣어 설치를 시작했다. 그런데 응? 안된다. 왜지? 하고 인터넷 지식인을 찾아 헤매던 나는 하나의 답을 찾았다. 그렇다. 나는 확장팩을 산 것이다. 이것은 스타로 비유하자면 오리지널 없이 브루드 워를 먼저 산 것이다.(눈물) 그렇게 나는 용돈을 모아 산 심즈를 고이 모셔두게 됐고 그 이후 7개월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된 게임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중했던 내 인형들은 심즈로 대체되어 하나씩 사라져갔다.


그렇게 나를 겜순이로 만든, 내 첫 게임 심즈. 그러니까 EA 는 어서 심즈 5를 내놓으라고~~!

* 손금불산입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01-10 12:48)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 게시글로 선정되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메타몽
22/05/12 07:45
수정 아이콘
그 어린 시잘에 7개월 존버라니...!?

심즈가 인생게임이 될 수 밖에 없었군요 흐흐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7:45
수정 아이콘
추석 용돈 받을 때까지 시다려야 해서요 흐흐
메타몽
22/05/13 18:01
수정 아이콘
어릴때 부터 끈기가 남다르셨네요 흐흐
Quantum21
22/05/12 08:08
수정 아이콘
이 글을 읽고 딸 아이에게 심즈를 소개해볼까 고민중입니다.
이상한화요일
22/05/12 08:15
수정 아이콘
요즘은 동숲이죠.
1년 정도 재밌게 하더군요.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7:45
수정 아이콘
윗분 말씀대로 요즘은 동숲이지만 건축과 상호작용은 심즈가 압도적이니까 소개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셔 
22/05/12 11:18
수정 아이콘
제가 공간 지각 능력이나 입체적인 것에 약한 편인데, 어렸을 때 심즈나 마인크래프트를 접해서 즐겨 했으면 좀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7:49
수정 아이콘
저는 즐겨 했지만 공간 지각 능력은 영 좋지 못해요(…) 상관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뉴뉴
22/05/12 11:31
수정 아이콘
커엽...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7:49
수정 아이콘
어린시절 저에게 전하겠습니다 흐흐
22/05/12 11:44
수정 아이콘
(수정됨) 게임이라고는 2도 모르는(피시방가면 테트리스 정도만 하던) 여자친구가
심즈 안에서 온갖 데이트, 결혼, 육아, 불륜, 협박, 환생, 재벌, 건축, 등등..
자신의 모든 꿈을 대리만족하며 행복해 하더군요.
확장팩의 개수와 가격에 놀랐고... 그후엔 모드들 깔아주면서 그 방대함에 또한번 놀랐지만...
제일 놀랐던건 주말 내내 밥 먹고 장실 빼곤 오직 심즈만 하던 그 집중력에
다시 한번 놀랐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한 친구가 아닌데...크크)
정말 엄청난 게임... 심즈!!!
퀀텀리프
22/05/12 16:04
수정 아이콘
사회에서 직접 경험할때의 경제적 심리적 비용에 비하면 저렴하겠네요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7:51
수정 아이콘
저도 처음에 빠졌을 땐 정말 밥먹는 시간 빼고 했었지요 크크 심들 자유의지 관람하면서 드라마 보는 것처럼 보기만 해도 재밌습니다 정말
가능성탐구자
22/05/12 18:16
수정 아이콘
게임을 안 좋아하는 여자 친구들도 심즈는 수상할 정도로 재미있게 플레이하던데 이런 감성이었군요...!
커여운 이야기 감사합니다.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9:19
수정 아이콘
게임 안 하는 제 친구들도 심즈는 다 좋아하더라구요 공통된 감성을 자극하는게 있는거 같아요!
22/05/12 19:16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속칭 말하는 인생 게임이 10개는 있는 진성 겜돌이인 저에게도 '심즈 2'에게는 각별한 추억이 남아있습니다.
흐흐흐, 그 어린 나이에 모드라는 개념도 처음 배우고, 모드팩을 온라인에서 구해서, '텍스처'니 '메쉬'니 구분해서 폴더에 중복되지 않고 수정하기 쉽게 담아서 정리해뒀던 것도 정말 대단하고요. 한참 중2병의 시기였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해지는 이런저런 취향이 가미된 인형놀이를 하던게 정말 기억이 생생하네요~ 인터넷이 당시에는 덜 발달해서 다행입니다. 요즘 어린이들처럼 그걸 업로드했더라면 저는 인터넷 세상에 얼씬도 하지 못했을거에요 크크.

정말 심즈 최신작을 다시 해보고 싶은 그런 추억의 글이어서 좋았습니다~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9:21
수정 아이콘
어떤 놀이를 하셨는지 궁금해지는 댓글인데요 크크. 모드에 텍스쳐에 메쉬러니 진성 심즈 유저시었군요! 다시 돌아오세요 경쟁하믄 aos게임하다가 심즈하니 행복해요
22/05/12 21:40
수정 아이콘
(수정됨) 심즈는 진짜 처음에 확장팩만 사고 정작 본편이 없어서 플레이 못했다는 썰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크크크...
파프리카너마저
22/05/13 19:21
수정 아이콘
확장팩이 너무 많은데 처음 입문하는 유저들은 잘 모르다보니 그런거 같습니다 크크 근데 저는 스타도 브루드워부터 샀어요 크크크크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3507 착한 사람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이 있는가 [27] 아빠는외계인3709 22/05/13 3709
3506 [15] 꽃으로도 때리지 않겠습니다 [18] 나래를펼쳐라!!2904 22/05/12 2904
3505 러브젤 면도 후기 [47] speechless4450 22/05/12 4450
3504 우리에게는 화형식이 필요하다. 그것도 매우 성대한 [33] 12년째도피중5060 22/05/12 5060
3503 [15] 어느 여자아이의 인형놀이 [19] 파프리카너마저4407 22/05/12 4407
3502 나는 어떻게 문도피구를 우승하였나? [77] 임영웅4138 22/05/10 4138
3501 음식.jpg [42] 이러다가는다죽어3526 22/05/10 3526
3500 [테크 히스토리] 전세계 콘센트 하나로 통일 좀 해줘라 / 전기 플러그 역사 [43] Fig.13744 22/05/09 3744
3499 [15] 아빠 차가 최고에요! [18] 두동동4323 22/05/08 4323
3498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365] 여왕의심복4887 22/05/06 4887
3497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그 맛.. [62] 원장2756 22/05/04 2756
3496 [15] 장좌 불와 [32] 일신2654 22/05/03 2654
3495 퇴사를 했습니다 [29] reefer madness3271 22/05/02 3271
3494 집에서 먹는 별거없는 홈술.JPG [23] insane7921 22/04/30 7921
3493 인간 세상은 어떻게해서 지금의 모습이 됐을까 - 3권의 책을 감상하며 [15] 아빠는외계인4747 22/04/29 4747
3492 [테크 히스토리] 인터넷, 위성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 해저 케이블의 역사 [32] Fig.13823 22/04/25 3823
3491 소수의 규칙을 증명..하고 싶어!!! [64] 라덱4847 22/04/25 4847
3490 웹소설을 써봅시다! [55] kartagra5264 22/04/25 5264
3489 믿을 수 없는 이야기 [7] 초모완3587 22/04/24 3587
3488 어느 육군 상사의 귀환 [54] 일신4377 22/04/22 4377
3487 (스크롤 압박 주의) 이효리 헌정사 (부제 : 어쩌다보니 '서울 체크인' 감상평 쓰다가...) [76] 마음속의빛3879 22/04/19 3879
3486 [테크 히스토리] 커피 부심이 있는 이탈리아인 아내를 두면 생기는 일 / 캡슐커피의 역사 [38] Fig.12920 22/04/18 2920
3485 『창조하는 뇌』창조가 막연한 사람들을 위한 동기부여 [12] 라울리스타2858 22/04/17 2858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