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론 머스크가 스타링크로 우크라이나의 인터넷 서비스를 지원한 사실이 이슈가 되었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보통 유선 케이블로 연결되는 인터넷망과 달리, 스타링크는 저고도에 수많은 위성을 띄어서 인터넷을 연결하기 때문인데요.
위성 인터넷은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유선 케이블이 손상되거나 설치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직도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실제로 남극은 빙하와 수온 때문에 케이블이 버티지 못해 위성 인터넷을 사용하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크루져선, 사람이 적어 케이블이 깔리지 않는 오지 같은 곳에서는 위성 인터넷이 거의 유일한 대안이죠.
인터넷 위성의 대표적인 사업자는 스타링크의 스페이스X가 있는데요. 2018년부터 위성을 쏘기 시작해 현재 1,265여개의 위성을 쏘았죠. 원웹이라는 회사도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약 360여개의 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인터넷 위성군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기술도 있습니다. 열기구를 이용하는 구글의 룬 프로젝트, 드론을 이용하는 페이스북의 테더 테나가 있지만, 둘 다 수익성 문제로 사업을 접었습니다.
[구글의 룬프로젝트]
[테더 테나의 드론]
스타링크가 좋아 보이지만 그래도 위성을 이용한 인터넷은 유선에 비해 느린 편이고, 비쌉니다. 그래서 아직 우리는 유선으로 인터넷을 이용하는데요. 이 말인즉슨, 여러분과 종종 어머니의 안부를 묻는 지구 반대편 존은 선으로 연결되어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오늘은 국제 통신을 가능하게 만드는 해저 케이블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2. 튜토리얼 : 도버-칼레 해저 케이블
[도버-칼레 해협]
[도버-칼레 해협에 설치된 해저케이블 ⓒatlantic-cable.com]
1837년 모스가 전신기를 발명하고, 1844년 전신선이 상용화되면서 본격적으로 전신으로 정보를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전선은 기존에 사람이 직접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급속도록 확산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9세기는 발명의 세기 아니겠습니까? 때 마침 1843년에 패러데이가 고무나무에서 쿠타페르카라는 절연체를 만들어냅니다. 이를 이용해 1847년 프러시아의 장교 윌리엄 지멘스는 라인강을 가로지르는 최초의 수중 전선을 성공시키죠.
강이 성공했으면 그 다음은 바다겠죠? 불과 3년 뒤 브레트 형제가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도버-칼레 해협에 수중 케이블 설치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곧바로 어선 닻에 절단되고 말았죠.
[1844년 와이어 로프 특허 ⓒatlantic-cable.com]
[와이어 로프를 만드는 기계 ⓒatlantic-cable.com]
또 때 마침 독일에서 광산용 엘레베이터를 위해 철로 된 와이어 로프 기술이 개발되었는데요. 이 와이어를 케이블의 외장재로 사용함으로서 브레트 형제는 도버-칼레 해협의 수중 케이블을 1851년 실용화에 성공합니다.
1트 - 필드 도버-칼레 해협을 잇는 튜토리얼에 성공하자 곧이어 미국과 유럽을 잇는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을 설치하는 본 게임이 시작됩니다. 대륙 횡단 해저 케이블은 이때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대사업이었는데요. 당시에는 바벨탑에 버금가는 사업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어요.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은 1854년 영국의 사업가 필드가 처음으로 구상했습니다. 이 사업에는 현실적으로 크게 세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요.
첫째는 자금이었습니다. 근데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됩니다. 필드가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을 찾아가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도움을 요청했을 뿐인데, 곧바로 자본금 53,000 파운드(현재가치로 약 60억)가 모입니다. 이때 자본을 덴 사람 중에는 영국의 대표 시인 바이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게 얼마나 국가적 관심을 끈 사업인지 알 수 있죠.
[해저 케이블 설치를 기념한 우표 ⓒatlantic-cable.com]
자금은 해결되었고, 두 번째 문제는 해저 케이블을 운반하고 설치할 선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길이의 전선을 운반해야 해서 보통 선박으로는 힘든 일이었거든요. 다행히 영국 정부가 당시 가장 큰 전함의 하나인 HMS 아가멤논 호를 빌려주었고, 미국 정부도 5,000톤급 USS 나이아가라 호를 빌려주었죠.
마지막 문제는 케이블이었습니다. 5900km짜리 케이블이 필요했는데요. 그러니까 서울에서 부산을 왕복 91 번할 수 있는 전선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전파를 전달해야 하니 작은 틈 하나도 있어서는 안 되었어요.
필드의 해저 케이블은 구리선 7줄을 꼬아 한 가닥으로 만들고 3겹의 구타페르카로 절연하고, 그 위에 철선 7줄을 꼬아 한 가닥으로 만든 선 18줄을 꼬아 만든 해저 케이블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1858년 8월 13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미국 15대 대통령 제임스 부케넌에게 최초의 대륙 통신을 보냅니다. 보내는 데 17시간이나 걸린 모스 부호의 첫 문장은 이러했습니다.
"영국 여왕은 매우 깊은 관심으로 이 위대하고 국제적인 업적을 이루어 낸 미국 대통령께 축하하는 마음을 전합니다.”
이 역사적인 사건에 티파니앤코에서는 케이블 설치 성공 기념으로 잔여 케이블을 구입해 우산 손잡이 및 지팡이로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 케이블은 불과 2달 뒤에 케이블의 단열재 열화로 고장나면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2트 - 톰슨 제대로 된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이 등장한 것은 1866년이었습니다. 이번엔 고품질 구리선과 구타페르카를 4겹 그 위에 철선 10줄로 보호한 케이블로 설치에 성공합니다.
톰슨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케이블도 있지만, 무엇보다 어디서 전선이 망가졌는 지 확인 할 수 있는 검류계를 만들어낸 것이 결정적이었어요. 이젠 망가져도 보수할 수 있게 된 것이거든요. 그는 자석과 거울을 철사 코일 속에 장치해 검류계를 개발했어요.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 수 있겠죠. ‘망가졌는지 확인 하려면 사람이 검류계를 일일히 봐야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 톰슨이 만든 검류계는 자동 알람 기능이 있었어요. 검류계에 연동되는 전신도 함께 개발해 검류계의 변화를 주기적으로 모스 기호로 기록되게끔 한거예요.
톰슨의 이런 발명으로 인해 해저 케이블은 실용화되고, 19세기말까지 대서양에 총 15개의 해저케이블이 부설됩니다.
#4. 무선통신 등장으로 해저케이블 ????같이 멸망..?!
[무선 통신으로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은 마르코니]
1895년 이탈리아의 마르코니가 무선통신 기술(ex. 라디오)을 개발하는데요. 1900년대 초에는 무려 대서양 횡단 무선통신에 성공합니다. 막대한 해저 케이블 설치비용을 생각해보면 무선이 주류가 되는 것은 당연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1924년 대양횡단 케이블을 마지막으로 해저 케이블은 더 이상 설치되지 않게 되었죠. 그렇게 해저 케이블의 시대가 끝나는가 했는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국가 간의 통신이 활발해지면서 사용할 수 있는 주파수가 제한적이고, 혼선이 일어나는 무선통신의 문제가 부각되기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다시 유선을 찾아 개선하기 시작하죠.
[동축 케이블]
그렇게 해서 발명된 것이 동축 케이블인데요. 중심의 도체와 바깥쪽 도체의 축이 같다고 해서 ‘동축케이블’이라고 부릅니다. (이때까지 전선이 동으로 만들어져서 동축 케이블인 줄 알았던 사람 저뿐만은 아니죠..?)
그리고 1956년, 다시 이 동축 케이블을 가지고 대서양 횡단 제1 케이블(TAT-1)을 설치하게 되죠. 1980년대까지 동축케이블로 해저 케이블을 설치했으나, 국제 통신량이 많아지면서 동축케이블도 역부족이었습니다.
[현재 해저 케이블 현황]
그래서 개발된 것이 광케이블입니다. 광케이블은 사실 1970년대 이미 발명되어 내륙에서는 이미 쓰이는 기술이었는데요. 해저 케이블은 그 길이가 너무 길어 신호가 점차 유실된다는 문제가 있었어요.
이 문제는 1986년에 광증폭기가 개발되면서 드디어 광섬유 케이블을 해저케이블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9년 태평양 횡단 해저 광케이블망인 TPC-3/HAW-4의 개통을 시작으로 해저 광케이블의 시대가 열렸죠.
#5. 남들이 멋대로 설치한 조선의 해저케이블
국내에서 오래된 해저 케이블로 잘 알려진 것은 1885년 영국군이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면서 설치한 것인데요. 영국 동양함대사령부의 주둔지였던 상하이까지 연결된 것이었죠. 당시 조선은 섬이 점령당했는지도 한 달 동안 모르고 있었고, 해저 케이블이 설치된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영국 해군도 청나라를 통해 설치한 뒤에 우리나라에 허가받았죠. 이 해저케이블은 2년 뒤 영국군이 철군하면서 폐기되었어요.
근데 이 해저케이블 전에도 이미 조선에 해저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1884년 설치된 부산과 나가사키를 잇는 해저케이블입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에 통신수단 개설을 요구하는데요. 문제는 조선은 해저케이블을 설치할 기술도 자본도 없었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뜻밖의 덴마크의 대북전신회사(The Great Northern Telegraph Company)가 이 케이블을 설치하게 됩니다.
이 회사는 영국, 러시아, 덴마크의 국가 자본으로 설립된 회사인데요. 이미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전선을 설치해본 경험이 있었던 회사였죠.
조선은 당시 덴마크와 수교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대북전신회사와 계약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중재가 필요했어요. 이걸 빌미로 1883년 조선 정부는 일본과 해저전신망 부설에 관한 조일해저전선부설조약을 맺게됩니다.
이 조약에는 일본이 25년간 운영권을 보장하고, 전선 업무는 일본 정부가 담당하며, 부산-나가사키선과 경쟁하는 전신선 가설을 제3국에 승인할 수 없다는 독소 조항이 있었어요. 그리고 해외 전보선일 경우 반드시 부산에 있는 일본 전신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속박 조항도 있었죠.
#번외. 해저 케이블 설치와 수리는 어떻게 하나
[케이블매설기의 작업 모습 ⓒKT 서브마린]
① 설치 우선 지진대, 화산대를 피해 설치할 장소를 찾습니다. 케이블을 설치한 곳이 정해지면 해저탐사가 시작되고, 주변의 청소작업을 거쳐 케이블을 바닥에 묻습니다. 이때 수심이 얕은 곳은 잠수부와 케이블매설기가 설치를 돕고, 수심 30m 이상일 경우 원격조종차량(ROV)과 수중로봇 등을 이용해 매설하죠.
그보다 더 깊은 수심 1000m이상의 바다는 어선이나 어망이 해저케이블에 접촉할 가능성이 적기 때문에 매설하지 않고 그냥 가라앉힙니다 .
케이블 설치는 보통 먼 바다에서 시작해 해안을 향하며 작업합니다. 보통 국가간 영역을 나눠 부설과 유지보수 작업을 맡게 됩니다. 주요 지점에 연결해야 할 케이블을 부표를 이용해 띄워두면 부설선 위로 끌어올려 연결한 뒤 가라앉히면서 해안을 향해 작업을 해나갑니다.
[상어가 해저 케이블을 무는 모습]
② 고장 해저케이블의 고장은 대부분 수심 200m 이내의 얕은 바다에서 선박이나 어업(낚시)에 의해 발생합니다. 그 외에는 수심 1000m 이상의 심해에서 발생하는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원인이고, 가끔 상어가 공격하는 등 바다 생물에 의한 훼손도 일어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1983년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이 상어의 공격을 받아 일부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③ 수리 해저케이블이 끊어지면 지상에서 전파를 이용해 끊어진 위치를 찾아내고, 수리선이 출동합니다. 손상 부위의 한쪽을 먼저 고쳐 부표를 달아 바닷에 띄워두고, 손상된 다른 한쪽을 바닷속에서 끄집어내 수리한 뒤, 배 위에서 양 쪽을 연결한 뒤 다시 가라앉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