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금요일 저녁 퇴근길 핸드폰이 울린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여자아이가 오랜만에 연락했다. '오빠 오늘 한강 같이 갈래?'라고 한다. 나는 이 아이가 지난번에 약속을 깬게 괘씸해서 한강 말고 우리 집 근처로 오라고 했다. '여기로 니가 오던가, 아님 다음에 보던가.' 몇 분간 투덜거리더니 온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 어색한 인사 대신 왜 이렇게 늦게 오냐고 핀잔을 줬다. 투덜거리더니 나한테 뭐 먹을 거냐고 되물었다.
'비가 오니 파전에 막걸리나 한 잔 하자!'
'그래!'
이 아이는 역시 먹는걸 가리는 성격은 아니다.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이 아이는 숨기는게 많은 것 같지만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나 비밀은 있으니까. 나 역시도 숨기는게 있으니까. 끝나고 코인 노래방에 갔다. 갈고 닦은 내 랩실력을 뽐내다 보니 열한시가 넘었다.
‘지하철 역까지 바래다 줄게’라고 말했다.
가다가 이 아이가 말했다. 오늘 더 같이 있고 싶냐고. 난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래'
'그런데 오빠 여친 있지 않아?' 그 아이가 물었다.
'있지'
'미쳤네 나 갈게'
알고도 또 물어본다. '여친 있잖아 나 갈게.'
낚였다. 이미 내가 여친 있는 걸 알고 있는 애가 이렇게 또 물어볼 리 없다. 그냥 내 생각을 떠본 거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있었던 악몽이 또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톡을 본다. 이 아이의 이름 위에 손가락을 올린다. 길게 누른다. 클릭. 차단. 이제 그만 연락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일년 넘게 알았는데 낚였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더 이상은 못 만날 것 같다. 아물었다고 생각한 상처가 또 벌어질 것만 같다. 다음날 이 아이에게서 온 연락 역시 내 실망감을 줄여주지는 못했다. 거기까지다. 이젠 끝이다. 이제는 모르는, 친했던 동생일 뿐이다.
2.
몇 주 뒤, 또 다른 금요일 저녁 카톡이 온다. 일년 넘게 사귄 여자친구다. 이별 통보를 해온다. 낌새는 있었지만 이별은 언제 겪어도 갑작스럽다. 요즘 내가 잘 못해주긴 했다. 약속도 몇 번이나 깨고. 아무래도 실증이 난 거겠지. 좀 더 잘해주기엔 나도 피곤했다. 주말에 같이 영화 보자고 티켓도 예매해 놨는데. 물거품이다. 혼자라도 보러 가긴 해야겠다. 내가 보고 싶어 하는 영화였으니까. 자리 넓게 쓸 수 있겠네. 잠시 있다가 카톡에 여자친구로 등록 된 아이디 위에 손을 올린다. 길게 누른다. 클릭. 차단. 좋아했던 만큼 실망감도 커지는 것 같다. 아니, 내가 받을 상처가 두려워 더 잘해주지 못했던 것도 같다. 더 이상 사귀는 관계에 머물러 있어도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잘 해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돌아온다고 해도 이미 깨진 유리잔이다. 여러 생각이 교차한다. 에라...집에서 혼자 술이나 한 잔 해야겠다.
3.
몇 달 뒤. 친구가 시험도 끝났으니 같이 한 잔 하자고 한다. 마침 나도 재충전을 위해 휴가를 쓴 참이었으니 좋다고 친구 집까지 가는 버스를 탄다. 친구를 만나 그래도 친구는 공시생이고 나는 직장인이니 '내가 치맥을 쏜다!' 라고 하니 롤 버스좀 태워주겠다고 한다. 롤 얘기를 하니 친구가 나한테 플레부심을 부린다. '렝가하면 다 이겨' 라고 눈을 찡긋하며 말한다.
그래 알겠어 친구야 치킨이나 먹자. 창가에 앉아 치킨을 뜯는데 친구 표정이 심상치 않다. 미안한테 지금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걸 봐서 잠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한다. '그냥 남자인 친구 아냐?' 라고 물으니 '그러면 왜 날보고 숨는데?' 라고 되묻고는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뛰쳐나간다. 친구가 15분 뒤 돌아온다. 친구가 말한다. '헤어지잔다. 같이 있던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좋데.' 멍한 표정을 한 녀석을 보니 나도 멍해진다. 에라... 사장님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받아라. 아무래도 이 친구는 나만큼 헤어짐에 덤덤하진 못한 것 같다.
4.
일주일이 지났다. 퇴근 후 얼마 전 헤어진 친구가 생각나 전화했다. '오늘 십시일잔? 열 시에는 한 잔 해야지!' 라고 내가 말하니, 친구가 골드생키 빨리 오라고 한다. 친구 표정을 보니 그래도 괜찮은 것 같다. 십 년을 넘게 알고 지냈지만 이 친구는 감정이 표정으로 나오지 않는다. 어렵다. 조심스레 물어본다.
'어떠냐?'
'괜찮아. 걔 완전 쓰레기였어. 그 남자 말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더라. 다른 친구가 몰래 말해줌'라고 친구가 말한다.
내가 봐도 그렇다. 친구의 여자친구였던 애는 내 친구에겐 어울리지 않는 애다. 전에 봤던 느낌은 마치 영화관의 관객처럼 잠깐 머물다 떠날 것 같은 느낌의 여자였다. 더 좋은 사람이 분명히 있다.
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골드지만, 넌 호구야. 그만 잊고 새 사람 찾아야지.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래'
그래도 내 말이 들리지가 않나 보다. 전여친에게 카톡을 얼마나 보내는지 술 마시면서도 계속 보낸다. 문자도 보낸다. 페이스북 메시지도 보낸다. 디엠도 보낸다. 하지만 1은 없어지지 않는다.
'야 그런다고 걔가 돌아오냐.' 답답한 마음에 내가 말한다.
'그래 맞다 안 돌아오지. 근데 함 돌아왔으면 좋겠어. 한 번만 쫌, 잠깐만이라도 돌아왔음 좋겠다고. 넌 모르겠지.'
내가 모른다고? 내가 잠깐 생각한다. 내가 모르나? 돌아 왔음 좋겠다는 그런 맘을 모르나? 최근에 카톡을 차단한 여자아이와, 여자친구가 생각난다. 그래 맞다. 지금의 나는 떠나는 사람을 잡는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이제는 먼저 헤어지자고 할 수 도 있는, 헤어짐에 무덤덤해진 그런 사람이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비슷할 것 같다. 그러나 나도 친구처럼 그랬던 적이 있다. 누군가를 붙잡았던 때가 있었다. 헤어지지 않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던졌던 순간이 있었다. 지금 나는 누군가를 붙잡으려 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 있다. 예전의 내가 떠오른다.
5.
처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가 생각난다. 전화로. 싫다고 울고불고 떼쓰고 안 된다고. 헤어지면 이대로 죽을 거라고 그랬다. 내 삶에는 이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헤어져도 메신저 차단을 안하는 그런 때가 있었다. 내가 연락을 해야 했으니. 그때는 내가 몇 번이고 붙잡았다. 너무 울어서 팔이 저려왔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붙잡았다. 그래도 결국엔 몇 달 더 사귀다가 헤어졌다. 그렇게 떠나갈 사람은 떠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그 이후로는 붙잡지 않았다. 붙잡고 싶은 충동이 있을 때에도 붙잡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되었다. 내 친구처럼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좋아했었던 적도 있던 것 같은데. 이 사람이 없으면 안되는냥 그런 때도 있었는데. 그렇게 뜨거웠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식어 가나보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깡통로봇이 된 느낌이다. 심장이 없는, 차가운 그런 존재. 다시 또 과거를 돌이킨다.
그러다 문득 내가 잡았어야 했던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내가 상처 받을까봐 대신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내가 상처 받을까봐 잡지 못했다. 그 때 잡을걸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 때 그녀를 잡았더라면 조금은 더 뜨거웠을까? 답이 나오질 않는다. 에라... 어제 사온 편의점 맥주나 따자.
* 노틸러스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1-06-14 15:58)
* 관리사유 :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