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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1/21 01:13
어렸을 때 역사 참 좋아했는데, 요즘 다시 보니 사료들이 추가로 발견 & 연구되면서
옛날에 제가 알고 있던 사실과 많이 바뀌었더라고요 ㅠㅠ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 뒤통수를 친 게 아니었다든가 안시성 성주 이름이 양만춘인 게 확실치 않다든가 신탁 통치가 오보였다든가...) 시간될 때 언제 좀 몰아서 다시 공부 좀 해보고 싶습니다.
21/01/21 01:35
근데 예식진이 배신할 때는 이미 백제 중앙군이 죄다 박살난 상황이었고 왕족도 줄줄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있었죠. [예식진이 배신하지 않다면 백제가 버텼다]보다는, [이미 가망이 없으니 예식진이 배신]한거라 봅니다.
21/01/21 02:39
둘 다 진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급 차단과 협공으로 백제가 승기를 잡아 나가고 있었지만, 18만 대군이 배를 곯으며 속수무책으로 신라로부터의 보급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테니 백제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미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어서 지방 귀족들은 이미 이번 한타를 이겨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든가...
21/01/21 11:19
포위한 지 5일만에 항복했다고 하더라고요. 웅진성이 천혜의 요새에다 백제의 옛 도읍이기도 해서 물자도 풍부했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5일만에 항복해버려서 동맹인 고구려도 뭐 해볼 수가 없었다고.
21/01/21 01:35
본문은 유리한 상황에서 통수를 맞아서 진거라고 묘사를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전세가 그만큼 불리하니까 통수를 친 것에 가깝지 않나 싶은...
21/01/21 01:43
정확히 말하면 그래도 버텨볼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가능성을 0으로 만들어버린 거라고 봐야겠죠.
버텼다면 당군이 바다 건너온 상황이라 변수가 있어 "유리한 상황"까지는 아니더라도 "안 망할" 상황은 가능성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21/01/21 08:07
저 전투 한번이야 어떻게 도저히 보급을 못버티고 당나라 군이 물러가서 버틴다고 해도 사비성 부근은 전부 다 갈아버렸을 텐데 미래를 봐도 가망이 없었다고 봐야겠죠. 신라가 일단 물러 간 다음에 계속 쳐 들어 올테니까요.
21/01/21 02:03
전력의 핵심인 중앙군이 녹아없어진 상황인데 지방군으로 동시대 최강이던 당나라군대를 막아냈을 거 같지는 않네요.
당시 백제가 일사분란하게 지방전력을 동원할 정도의 국가체제를 구축했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나마 농성으로 최대한 버텨서 보급한계로 물러나게 하는 거 정도가 기대할만한 최선의 결과인데 너무 몰린 상황이라 그것도 힘들어 보입니다. 저 다큐는 대전략으로써 웅진에서 수비를 택한 것처럼 보이게 설명하는데 그런 정황은 전혀 아니죠. 상륙하는 당군을 막으려던 주력군이 말그대로 녹아버렸고, 부여성에서 시간벌라고 남겨놓은 왕자는 스스로 왕을 칭하다가 하루만에 수도가 날아가고...총체적 난국이죠.
21/01/21 02:54
근데 상황이 당나라쪽에 유리했더라면 저 항복이 그렇게까지 가치있는 취급을 받지 않았겠죠. 당나라로서도 쫄리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게다가 흑치상지가 백제 멸망 후에도 꽤 세력이 있었던거 생각하면 생각보다 저렇게 허무하게 마무리가 되진 않았을것 같네요.
21/01/21 03:12
1500년 전에 대군을 이끌고 상륙작전을 펼쳤으니 쉬웠을리가 없죠.
저 3천궁녀 날조는 교과서에서라도 다뤄줬으면 좋겠네요. 진짠줄 알고 있는 사람 정말 많을 겁니다.
21/01/21 06:16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역사 가르칠 때마다 저 삼천궁녀 얘기는 허구라고 꼭 얘기합니다.
그런데 같은 교사 중에도 모르는 분이 태반일 거라는게 문제죠..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이란 노래 자체가 문제예요.
21/01/21 07:22
저희 아이들의 최애책이었던 '설민석 쌤과 함께 부르는 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책에도 삼천궁녀는 사실이 아니라고 언급 하더라구요.
저는 국민학생 때 낙화암 가보고, 도대체 이 조그만 절벽에서 삼천명이 어떻게 다이빙을 했나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KBS 역사스페셜에서 다루더군요.
21/01/21 08:16
진짜 낙화암 꼭 가봐야 합니다 크크크
500명도 안되는 한 학년 학생들이 그거 구경 한 번에 다 못해서 반 별로 코스 다르게 동선짜서 구경했는데 크크
21/01/21 07:59
사실 그 당시 백제가 상황이 좋은건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질 상황이었냐? 라고 하면 그건 또 아니였어서.. 결국 예식진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항복 한 것이 당나라에겐 호재였죠..그리고 의자왕은 후대에 놀림거리로 전락 ㅠ
21/01/21 10:02
우장의자래항을 저렇게 중국인한테까지 물어볼필요야.. 원래 '장'자뒤에 명사가 있으면 ~을 가지고 ~을 통해서라는 의미가 됩니다 오히려 ~을 데리고가 훨씬 의역이구요.
영어의 바이버스 겉은 느낌. 기본문법에 가까운걸 저렇게 오바할필요야. 고전한문이나 백화체는 중국인이라고 더 잘하고 한국인이라고 더 모르고 그런거없습니다. 물론 드라마틱한 연출을 위해서라겠지만 동양철학전공하는 사람입장에선 저걸 중국인한테 물어봐서야 답을 찾았다는 식의 전개는 참... 웃음이나오네요. '교양방송하는 인간들이 다 그렇지' 라고 하면 가장 기분나빠할 인간들이..참.. 한마디 더 하면 중국어와 한문도 다르죠. 한문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소위 한학하시는 분들 그리고 동양철학 사학등등 동양학 하는 사람들이죠
21/01/21 10:31
민족적 관점을 빼고 보면, 당대에 18만이 넘는 굶주린 군사들이 백재땅을 유린하고 있고, 왕이 요지에서 수성은 어느정도 할수는 있겠으나, 사실상 희망이 없는 상태라면.
왕을 넘기고 하루빨리 당나라군대가 철수하는게 평범한 백제인들 입장에서는 그나마 살길이었겠죠. 다 추측일 뿐이지만, 단순 매국도일수도 있고 당시로써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수도 있었을거 같네요.
21/01/21 10:53
댓글로 쓸까 하다가 그냥 한번에 써봅니다.
1. 의자왕에게 처음부터 웅진에서 항전한다는 대전략이 있었는가. 가. 지방통제력이 완전하지 않은 고대국가에서 왕령지를 내준다는 전략을 구상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특히 백제같이 왕권과 대성팔족으로 대표되는 귀족 세력의 대립이 강한 국가에서는 더욱 그렇죠. 당장 개로왕이 참수당할 때도 고구려가 한강 이북까지 밀고 왔는데 끝까지 한성에서 버티던게 백젭니다. 특히 의자왕은 귀족 세력과 연달아 강공 드라이브를 걸었던 왕인데 지방 세력의 원활한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나. 웅진에서 저항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은 그냥 요충지 막고 지방 세력 동원해서 신라와 합류를 저지하는 겁니다. 성충, 흥수가 말했듯 [당군은 기벌포에서, 신라는 탄현에서] 막고 합류를 저지하고 지연전을 벌이면서 지방 세력을 동원하는게 더 안전하죠. 그런데 의자왕은 성충•흥수 안을 묵살했습니다. 다. 실제 전쟁에서도 소정방이 덕적도에 왔을 때 백제 조정은 얘네가 고구려를 칠지, 백제를 칠지 감도 못잡고 있었습니다. 당군에 백강으로 밀고 들어올때도 기벌포에서 상륙 작전을 막을지, 강 안쪽으로 끌어들여 공격할지 같은 기본적인 전략도 정해지지 않았았죠. 그런데 웅진으로 천도한다는 장기적인 대전략이 있다? 회의적입니다. 라. 당군의 공격 정황이 확실해질 때 백제 조정에서 논의되었던 안은 상륙 저지안=장기전/백강 안쪽으로 끌어들여 타격안=단기전(당군에게 전력 피해를 주어 퇴각 강요)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백제는 후자를 선택하고, 망했습니다. 지방 세력과 연대를 구상했으면 당연히 지연전을 펼치고 지방 세력을 결집해야 되는데, 백제가 그런 전략을 시도했다는 정황이 없습니다. 마. 신라 방면의 탄현 저지선은 당연히 구성되지도 않았구요. 바. 결국 백강 저지선이 돌파당하고, 평지에서 당군을 요격했지만 참패하고 1만 명이 전사합니다. 그 무렵 황산벌에서 계백이 5,000 결사대와 전멸하죠. 사실상 이 전투로 백제 중앙군은 와해되고 소정방이 사비에 도착하자 의자왕은 그제야 웅진으로 파천합니다. 웅진으로 갈 전략이 있었으면 미리 웅진으로 가 있거나, 적어도 중앙군 전력을 유효하게 썼어야죠. 단기 결전을 시도했다가 중앙군 죄다 증발한 시점에서 의자왕이 웅진으로 피난가는데, 장기적인 대전략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사. 후술하듯 의자왕의 웅진 피난 시점에서 의자왕의 리더십은 끝장납니다. 전시에 예식진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는건 그 무렵 의자왕의 친위 전력이 소멸했거나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는 의미도 되죠. 2. 장기전을 시도했다면 승산이 있는가? 없지는 않겠지만 최소 만골 차이 정도는 났다고 봅니다. 가. 아까 봤다시피 백제 중앙군은 회전 두 번에 증발했고, 전쟁 시작 후 10일 만에 당군이 코 앞까지 밀고 들어왔습니다. 이 무렵 백제 지방군이 산발적인 저항을 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웅진 구원을 시도했다는 정황은 딱히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나. 보급 문제도 당군이 유리할거야 없지만, 크게 뭘 기대하기는 시기상조였다고 봅니다. 사실 백제부흥운동도 처음에만 부여, 웅진을 고립시켰을 뿐 당군이 지원군 끌고 오자 다시 보급로가 뚫립니다. 그 때 당군의 지원군도 7,000명 수준이었구요. 661년 소정방이 고구려를 쳤을 때도, 고구려 야전군이 멀쩡한 상황에서도 소정방은 8월부터 다음해 초 김유신의 지원을 받을 때까지 어찌저찌 버팁니다. 소정방이 덕적도에 상륙하고 백제가 망하기까지 10일 정도밖에 안걸렸는데 보급 문제로 당군의 퇴각을 논하기는 너무 이릅니다. 여기다 웅진은 신라의 지원을 받기도 훨씬 수월합니다. 실제로 백제부흥군이 기세를 탈 때도 신라도 간헐적으로 웅진을 지원하는건 가능했거든요. 여기서 보급 문제가 거론되는건 게임 기울었을 때 클템이 외치는 [50분까지 버티면 반반입니다!] 정도의 의미라고 봅니다. 다. 결국 장기전이 의미를 가지려면 50분까지 버틸 수 있느냐, 즉 웅진성이 얼마나 버텨주느냐에 따라 달려있는데, 이미 중앙군 다 날아간 시점에서 웅진이 방어하기 좋은 지형이라고 해도 얼마나 버텼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일례로 김헌창의 난 때는 반란의 거점으로 삼은 웅진성은 10일 만에 함락됐습니다. 또한 앞서 보았듯 의자왕도 처음부터 대비하고 도망간거라고 보기 힘든데 웅진성이라고 장기전 대비가 잘 되어 있었을까요? 3. 당대 백제인들의 반응은 어땠는가? 가. 계백 장군이 처자식 죽이고 황산벌로 나간건 다들 아실겁니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게 낫다(與其生辱 不如死快)". 신라군 요격을 맡은 지휘관조차 당시 전황을 절망적으로 보고 있었다는거죠. 나. 소정방이 소부리산에 진을 치자 의자왕은 13일 밤 태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으로 피난갑니다. 그러자 바로 백제 왕족이 분열됩니다. 사비성을 지키던 왕자 부여태가 백제 왕을 자칭합니다. 그걸 보고 부여융, 부여융 또는 부여효의 아들 부여문사와 대좌평 사택천복이 항복하고, 부여태도 따라 항복합니다. 늦어도 중앙군이 소멸하고 사비성을 버린 시점에서 의지왕의 리더십은 이미 파탄을 맞은 상태였을 겁니다. 다. 부여문사는 삼국사기에는 부여효의 아들로, 자치통감에는 부여융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여문사가 부여효의 아들이라면, 의자왕은 손자도 못챙기고 태자(부여효)랑 몸만 빼서 도망갔다는 말이 되죠. 적어도 구당서에도 부여문사를 의자왕의 '적손'으로 적고 있는 만큼, 부여문사는 차차기 후계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비추어보면 부여문사와 좌평들의 수장인 대좌평도 웅진으로 피난을 못가는 급박한 상황임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라. 이쯤되면 예식진의 배신도 의미가 좀 더 명확해진다고 봅니다. 백제 중앙군은 이미 소멸했고, 왕은 몸만 빼서 간신히 도망왔습니다. 사비성은 금세 함락됐고 왕자와 왕손, 대좌평도 항복했습니다. 예식진이 보기에도 50분 못갈거 같은 겁니다. 마. 예식진이 의자왕을 잡아다 항복하는 과정도, 앞서 언급했듯 의자왕이 자기가 거느릴 수 있는 전력이 사실상 소멸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 4. 예식진이 대접받은 것이 당시 전황을 뒤집었기 때문인가? 가. 전황을 뒤집은 배신이 아니더라도 다른 배신자들도 그럭저럭 영전했습니다. 평양 포위 이후에 항복한 연남산은 제후로 대접받았고 방어선 붕괴가 가까운 시점에서 평양성의 문을 연 신성도 광록대부에 봉해졌죠. 백제부흥군 붕괴가 임박한 시점에서 막타친 흑치상지도 대우 받았죠. 결말이 안좋았지만. 나. 당군 입장에서는 어쨌건 예식진의 항복으로 위험부담이 하나 없어진겁니다. 반드시 전황을 뒤집는 배신이 아니더라도 굳이 대우를 안해줄 이유가 없죠. 오히려 그 정도의 대공이라면 대우가 더 컸어야 할겁니다. 예식진이 항복 이후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한건 맞지만 엄청나게 승승장구 했다는 기록도 없구요. 다. 백제 멸망 이후 백제부흥이 활발할 때도 당군은 웅진 지방은 끝까지 통제 해냅니다. 백제부흥운동이 진압되고 웅진도독부을 개편하기 이전까지도 당군의 거점도 웅진이었습니다. 이에 비추어볼때 백제부흥군이 기세를 올릴 때도 예식진으로 대표되는 예씨 일족는 당의 지배에 협조적이었을 것임이 추정되죠. 예식진은 웅진도독부 체제 개편 이후(5도독부>1도독부) 웅진 일대를 다스리는 동명주자사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굳이 예식진이 극적인 반전을 불러오지 않았더라도 예씨 일족이 보인 당군에 보인 협조적인 태도나, 웅진 지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씨 일족의 협조를 얻을 필요를 고려하면 당이 예식진을 좋게 대우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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