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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12/29 18:45:39
Name 마스터충달
Subject [일반] (스포) <헤어질 결심>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 이 글은 영화 <헤어질 결심>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유치환의 시 <깃발> 중에서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카메라는 기계다. 하지만 의도가 담긴다. 여기 어떤 사진이 있다. 사람이 꽉 찬 식당을 찍었다. 만약 그저 꽉 찬 모습을 담고 싶다면 누구도 사진의 중앙을 차지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반면에 누군가를 찍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그 사람이 사진의 정중앙을 차지한다. 그 순간 나머지 사람은 있어도 없는 사람이 된다. 마치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하면 그것만 보고 기억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뇌는 그렇게 작동한다. 사람들이 패스를 몇 번 하는지 세어 보라고 하면 고릴라가 지나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다. 그런데 재밌게도 카메라는 그런 의중을 결과에 남긴다. 무엇을 보고 있는지 카메라는 알고 있다. 아니,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다.

<헤어질 결심>에는 카메라의 이런 점이 너무나 잘 담겼다. 현실이었다면 오히려 눈치 채지 못했을 것 같은 것들이 영화에 담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 거부할 수 없는 끌림, 드러낼 수 없는 마음... 카메라는 이것들을 포착한다. 나는 이런 것들을 두고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난다고 말한다. <헤어질 결심>은 그 소리가 너무 커서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영화였다. 해준의 반지로 떨어지는 서래의 시선... 그건 내가 본 그 무엇보다도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다. "괜찮으면 우리 같이 밥 먹을래요?"

--------------

사이 좋은 두 자매가 있었다. 어느날, 먼 친척의 부고를 듣고 두 사람은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 곳에서 한 남자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언니는 그 남자에게 한눈에 반했다. 다음 날, 돌연 동생이 난도질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언니.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평범한 사람들은 '동생도 그 남자에게 반할 것 같아서', '남자가 동생을 좋아해서' 등 동생과 언니가 경쟁하는 상황을 상정한다고 한다. 그러나 살인자들의 대답은...

"다시 장례식을 열면 그 남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 어느 도시괴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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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래는 네 번이나 살인을 했을까?

서래의 첫 번째 살인은 안락사였다. 그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저지른 살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숭고할 수도 있는 살인이다. 하지만 서래는 살인자가 되었다. 살인과 섹스의 공통점은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는 점이다.

서래의 두 번째 살인은 원한에 의한 살인이었다. 자신을 학대하는 남편을 서래는 치밀한 트릭을 이용해 살해한다. 솔직히 잘 죽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래는 아직 인간이었다. 서래는 자신을 의심하는 형사를 유혹해 사소한 증거마저 없애 버렸다. 그리고 결정적 증거마저도 형사의 손으로 없애게 했다. 하지만 그렇게 완전 범죄를 성공시켰을 때, 안타깝게도 서래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이 말을 듣고... "이 폰은 바다에 버려요."

서래의 세 번째 살인은 악랄했다. 살인을 유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 의도에서 손톱만큼도 사정을 바주고픈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남자에 미쳐서 저지른 반인륜적인 행동이었다. 이제 그녀에게 살인은 너무도 쉬운 일이 되어 버린 걸까?

서래의 네 번째 살인은 자살이었다. 어쩌면 세 번째 살인을 저질렀을 때 서래는 스스로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자를 사랑한다. 그 사람의 관심을 욕망한다. 그래서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사건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서래는 미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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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ayInTheLife
22/12/29 18:51
수정 아이콘
결국 서래는 안개 같은 것이 되고 싶지 않았을까요.
영원히 서래 안에서 살아가고 동시에 해준의 안에서도 살아가는 어찌보면 반복되는 프랙탈 같은 그림처럼요. 어찌보면 현실과는 헤어지지만 결코 헤어질 수 없는, 떨어뜨려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무엇인가.
그렇기에 이 영화를 말로 표현하는 건 그만큼 어렵고 힘들지만 그만큼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마스터충달
22/12/29 18:53
수정 아이콘
저는 서래의 사고방식이 어쨌든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살인을 저질러서 그렇게 된 건지, 아니면 그런 사람이라 살인을 저지른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aDayInTheLife
22/12/29 18:55
수정 아이콘
흐흐흐 그렇죠. 그렇지만 뭔가 다르다는 것에서 묘하게 ‘서늘함’이 느껴질 듯 안 느껴진다는 게 이 영화의 또 기묘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솔직하게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취향에 안맞다고 느끼는게 그 서늘함 같은 거에서 나오는 독특함이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가장 소프트한 박찬욱 영화라고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스터충달
22/12/29 18:57
수정 아이콘
저는 박찬욱의 다른 영화에 나오는 살인자들은 뭐랄까 인간적으로 나도 저러면 저럴지도... 싶은 면이 있었는데, 이 영화는 안 그렇더라고요. 오히려 가장 하드한 사이코가 등장하는 영화가 아닐까도 싶어요;;;
Janzisuka
22/12/29 18:53
수정 아이콘
넷플릭스로 오늘 봤습니다
뭐 어떻길래 올해 최고라고 하는지 궁금증 해결
진짜 잘 만들었어요
스팅어
22/12/30 00:22
수정 아이콘
탕웨이와 박해일의 야한 씬을 기대하고 봤는데..실망이었습니다.
영화는 왜 극찬을 받았는지 알겠더군요.
기대한만큼 좋았습니다.
김승남
22/12/30 00:49
수정 아이콘
저도 마침내 넷플로 봤습니다. 긴 플레이 타임이 결코 지루하지 않았어요.
넷플 덕분에 자칫 놓칠뻔한 명작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해야할지, 넷플 덕분에 이런 명작을 서재방 작은 티비에서 볼륨 7로 봐버린걸 불행하다 해야할지 애매한 밤이었습니다.
22/12/30 01:02
수정 아이콘
영화관 첫번째 봤을땐 탕웨이 한국발음이 잘 안들려 그낭 감으로 봤었는데, 두번째 보니 신기하게 또렸히 들리더군요.
이쥴레이
22/12/30 08:47
수정 아이콘
여러번봐도 재미있는 영화이고 2022년 저에게는 최고의 영화 였습니다. 극장가서 후회없이 본 영화가 얼마만이었는지..

마침내

라는 단어 표현이 가장 기억에 남았죠.
상한우유
22/12/30 11:11
수정 아이콘
영화의 여운이란게 무언지를 처음 느껴봤네요.
군령술사
22/12/30 18:04
수정 아이콘
워낙 감명 깊게 본 영화라 반가운 영화평입니다.
그런데 저는 서래가 싸이코 살인마라는 해석에는 동의를 못하겠어요.

3명이나 계획살인한 범죄자에게 하기 이상한 인물평이지만,
서래는 근본적으로 선한 인물입니다. 환자나 작은 동물 같이 약한 존재에게 친절해요.
다만 ... 법과 규율에 얽매이지 않는 다는 점이 (큰) 문제죠. DnD 성향으로 치면 [혼돈선]?
세번째 살인의 경우도 서래에게는 '고통받는 환자의 안락사' + '악당으로 악당 처리' + '해준 보호' 라는 훌륭한 해결책일 뿐이죠.

[질서선] 성향인 해준과 서래의 가치관 차이가 끝내 맺어질 수 없는 원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었어요.
(물론 서래가 그런 성향이 아니었으면 만날 일도 없었겠지만요 하하)
마스터충달
22/12/30 18:07
수정 아이콘
오... 혼돈선이라는 말씀도 설득력이 있네요. 그렇다면 자살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도 좀 더 이해가 됩니다.
보로미어
22/12/30 19:26
수정 아이콘
누구나 미결인 사건 하나 정도는 가슴속에 다들 있지 않나요?
영화를 보고 나니 그녀가 오랜만에 생각나서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리뷰 글 잘 봤습니다.
마스터충달
22/12/30 19:50
수정 아이콘
저는 미결인 사랑 같은 거 없습니다.... 아내는 피지알을 봅니다.
SAS Tony Parker
22/12/31 16:51
수정 아이콘
아.. 크크크
포도씨
22/12/31 00:48
수정 아이콘
피가 많은 사건현장을 싫어하는 해준을 위해 수영장의 물을 빼는 서래를 보면서 저로서는 평생 경험할 일이 없을(그렇기에 이해는 더더욱 불가능할) 지독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연성이 떨어지면 드라마도 중도하차하는 내게 이런 몰입을 선사하다니 박찬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대단한 디테일의 작품이었네요.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표현처럼 영화를 보다가 이전 장면이 자연스럽게 오버랩되는것이 무슨 사술을 쓴것처럼 뇌리에 찍히는데 서래가 자신이 묻힐 장소에 꼽아놓은 막대조차도 흘려버리지 않고 밀물 때 이리저리 떠다니는 것을 보여주는데 소름끼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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