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22/10/10 06:26:43
Name comet21
Subject [일반] [역사] 고등고시 행정과(1950~1962) 역대 합격자 일람 (수정됨)
내용상으로는 지난 번 포스팅 "일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조선인 합격자들"  의 후속에 해당합니다.

[고등고시 제도의 도입과 개편]
오랫동안 우리나라는 정부의 간부 후보생을 선발하는 시험의 명칭으로 "고등고시"란 말을 사용했습니다. 요새는 이 표현이 점차 눈에 띄고 있지 않으나(국회사무처, 그리고 법원행정처의 사무관급 채용 시험은 여전히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5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과 외교관후보자선발시험의 옛 이름이 각각 행정고등고시, 외무고등고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고등고시란 표현이 정식으로 쓰인 첫 사례를 거슬러 올라가면 1950년 실시된 고등고시 제도와 마주하게 됩니다.

5급 공채, 그리고 구 사법시험의 전신인 고등고시는 정부 수립 직후인 1950년 최초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전신의 전신은 아시다시피 일제 때의 고등문관시험이었습니다.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와 사법과를 사실상 계수하여 우리 정부에서 실시한 것이 고등고시 제도였습니다. 고등문관시험이 현지에서 한동안 고등시험으로도 통용됐던 것을 생각하면 시험을, 당시 한국에서는 시험보다 더 친숙하게 받아들여졌던 고시란 표현으로 대체한 정도였던 셈입니다.


광복도 되고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언제까지 인맥, 수시 채용에 의해 행정을 이끌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대학도 일제 때와 달리 각지에서 설립되었으니, 고등교육을 배우고 시험을 패스한 검증된 인재들로 나라를 이끌어 가보자, 일본도 했는데 우리도 못 할 게 뭐냐는 게 당시의 시대 정신이었습니다. 5권 분립을 골자로 한 중화민국의 법제를 어느 정도 참고하여 독립 기관으로 고시위원회가 출범하였고(막상 이후 고시위원회는 총무처 인사국, 그리고 지금의 인사혁신처로 축소되었습니다.), 관련 법제가 정비된 다음, 일본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따 온 모양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최초로 시험에 의해 국가관료를 선발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시위원장 배은희(1888~1981)의 헌사를 보면, 고등고시라는 새 제도에 의해 선발된 이들에게 품은 기대를 엿볼 수 있습니다.


%EB%B0%B0%EC%9D%80%ED%9D%AC.jpeg

- 배은희 고시위원장. 일제 때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앞장선 목사 출신 독립운동가, 정치인


“과거에 우리 민중은 이조 시대의 봉건적 공무원도 지내보았고 왜정 시에 식민지 정치 하의 공무원도 지내보았다. 그리고 해방 후 군정시대의 공무원도 지내본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민족이 요청하는 공무원은 과거의 그런 것이 아니라 진정한 민족적이며 민주적인 민중의 공복으로서의 공무원인 것이다. 이는 봉사적인 동시에 형극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길을 일부터 택하여 응시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인 줄 안다. 원컨대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부가 초대 고시에 합격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런 성원을 받아 치러진 초대 고시인 고시 1회(1950년)에서 행정과 5명, 사법과 15명의 합격자가 배출되었습니다. 이들은 수습행정관, 수습사법관으로 임용될 "자격"을 부여 받았고, 전자는 내무부, 재무부 등 각 부처에서, 후자는 검찰과 법원에서 채용될 예정이었습니다. 고등시험 편에서도 짤막하게 언급했지만, 사법과는 사법시험과 지금의 변호사시험과 달리 변호사 선발이 원 목적인 시험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고등고시 1회 합격자가 발표된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하였으나, 전시 수도에서도 고등고시는 해마다 치러졌고, 5.16 군사정변으로 정부가 전복되면서 공무원 채용 제도가 대대적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행정과 14차례, 사법과 16차례에 걸쳐 실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고등고시는 앞서의 고시위원장의 말과 달리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붙기에는 좀 합격자 수의 예측가능성이 전혀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일단 초대 고시가 불과 행정과 5명, 사법과 16명 합격자를 배출하는 데 그치는 것도 그렇고, 사실 다른 회차 시험도 선발인원이 들쭉날쭉 했습니다. 가령, 사법과 11회처럼 110명을 뽑아 대량으로 선발한 기수가 있는 반면, 사법과 12회에서는 22명만 합격했습니다. 행정과 역시 9회는 선발인원이 7명에 불과한데, 38명을 뽑은 2회나 72명을 뽑은 13회 같은 기수도 있었습니다. 절대평가를 채택한 데 원인이 있다지만, 정부의 중추가 될 관료를 뽑는 시험 치고는 정부의 필요한 인력 수요와 선발 간 연계성도 결여되어 있었고, 고시 출제위원에게 합격 판단을 지나치게 일임했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고시 사법과의 경우, 해방 전 세 차례 시행된 "조선변호사시험"과 같이 오히려 변호사를 선발하는 시험이 있었는데(판검사는 이들 변호사 자격자를 대상으로 별도 임용), 오히려 일제처럼 민간에서 활동하여 할 변호사 시험을 따로 두지 않고 은퇴한 검사, 판사의 소일거리로 변호사 자격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비판 역시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그 결과, 5.16 군사정변과 함께 고등고시 제도는 일단 폐지되었습다. 고등고시 행정과는 3급 공무원 채용시험으로 대체되었는데, 당시는 공무원이 1~5등급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이때의 3급 공무원은 지금의 사무관급(5급) 공무원을 가리킵니다. 채용될 "자격"을 부여하는 시험에서 채용 예정인원을 "채용"하는 시험으로 바뀐 것입니다. 채용에서 "고등"을 뺀 것은 미국식 개방형, 직무에 따른 공무원 채용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이름이 행정고등고시로 바뀌게 되면서 원래의 고등고시 제도와 유사하게 흘러갑니다.


고등고시 사법과는 변호사 선발 시험인 사법시험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흔히 로스쿨 체제 도입 과정에서 구 체제인 사법시험과 신 체제인 로스쿨 체제를 전제로 한 변호사시험이 대비되고는 있으나, 사실 이름만 보면 사법시험라는 명칭도 변호사시험이라는 의미였고 당초 도입 취지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일본은 로스쿨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변호사시험의 명칭이 종전 그대로 사법시험입니다. 예전에는 응시자격이 없었던 사법시험, 지금은 로스쿨 졸업을 전제로 한 사법시험인 차이) 그러나 변호사시험이 되었어야 할 사법시험은 실제 운용 상으로는 고등고시 시절과 하나도 달라진 점 없이 여전히 출제위원의 자의적인 채점 및 사법시험을 그대로 검사, 판사 임용 시험으로 쓰려는 정부 실무관료들의 의도에 의해 운용되었습니다. 그래서 1960, 70년대 사법시험은 역설적으로 사법관 선발 시험이었던 고등고시 사법과보다 선발인원이 더 적은 기현상까지 나타났을 정도였습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사법시험 7회는 단 5명만을 선발했을 정도입니다. 80년대 들어 선발인원이 300명으로 늘어나고 검사, 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인원이 나타난 뒤에야 사법시험은 변호사 선발 기능이라는 당초의 목적을 비로소 수행하게 됩니다.


여하튼 고등고시는 위에서 지적된 문제가 있어 1960년대에 접어들면 대대적으로 개편되지만, 제1, 2공화국 시기 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를 통해 배출된 인재는 비록 소수였으나 한국의 급격한 경제성장 및 정치발전과 맞물려 곳곳의 요직에 진출, 한국 초기 국가 형성에 기여하였습니다. 행정과는 369명, 사법과는 664명의 인원이 배출되었는데, 지금 5급 공채 시험이 1년에 약 250여 명, 변호사시험이 약 1700여 명 배출되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적은 수였습니다. 고등고시 출범 당시 사람들이 품은 "민족적이며 민중의 공복"이라는 기대에 부응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이를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이 어느 나라보다도 관 주도의 탑다운식 운용이 이루어졌던 한국의 한국 현대 정치행정, 그리고 경제에 깊은 흔적을 남겼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이번 포스팅은 이 해방 후 고등고시 합격자의 행적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번 편에서는 행정과 합격자를 다루었으며, 다음 편은 사법과 합격자가 될 것입니다.


고시 행정과는 1, 2, 3, 4부의 구분이 있었으며, 각각 일반행정, 재정, 외무, 교육에 해당합니다. 대체로 1부와 2부는 매 시험마다 실시 되었고 3부도 대부분 시행되었으나, 4부의 경우, 기수에 따라 선발하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의 행정고등고시/사법시험 체제와 달리, 이 시기에는 중요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일제 고등시험 행정사법과와 마찬가지로 고시 행정과와 사법과는 큰 틀에서는 하나의 시험이었다는 점입니다. 중복 과목이 있는 경우, 합격 여부가 상호 인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과 합격자가 이후의 사법시험 시절에 비해 훨씬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 과목별 중복 합격 인정 제도를 활용하여 행정과 중에서도 부를 달리하여 다른 기수에서 중복합격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통계로 보는 합격자 면면]

- 최종 도달 직급

1_%EC%B5%9C%EC%A2%85%20%EC%A7%81%EA%B8%89%20%ED%86%B5%EA%B3%84.png

고시 행정과는 1회부터 14회까지 총 369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습니다. (합격한 부를 달리한 중복 2명 포함) 총리 2명과 헌법재판소장 1명, 장관급 공직 61명, 차관급 공직 88명을 배출하였으며, 이외에 36명의 국회의원이 고시 행정과 출신으로 등원하였습니다.


차수별 일람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공직 한 우물만 판 사례도 있었으나, 4.19, 5.16 등 혼란스러웠던 정국 변화와 겹쳐 민간으로 이직했다가 다시 퍼블릭 섹터로 복귀한 사례도 적지 않았습니다.


- 출신 대학

%ED%95%99%EA%B5%90.png

서울대가 압도적입니다. 다만, 1950년대 당시에는 사립대보다 단과대 등에 따라서는 정원이 오히려 적기도 한 지금과 달리 서울대만이 유일한 매머드급 대학으로서 다른 대학에 비해 압도적인 규모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지방대학의 강세입니다. 특히 지방대학의 강세는 추후 게재할 사법과 합격자 통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데, 1950년대 당시의 한국에 있었을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표를 보면 김일성대의 이름이 있어서 의아한 분들이 계실 텐데, 고시 3회 합격자 최학선의 사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최학선은 6.25 전쟁 이전 이북에서 김일성대에 다니다 월남하여 동국대로 편입하였습니다. 양주동 등 당대 저명한 국어학자가 있던 동국대 국문과에서 학위를 마친 다음, 고시 합격 당시 서울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이희승, 이숭녕 등의 지도를 받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체신부에 입부하여 대전체신청장까지 역임하였으나 재직 중 반신마비 등의 병이 발병하여 은퇴하였고, 은퇴한 후에 본업이라 할 수 있는 향가 연구에 매진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차수별 합격자 일람]


* 고시 1회(1950년)

%EA%B3%A0%EC%8B%9C%201%ED%9A%8C.png

고시 1회는 5명만을 선발하였습니다. 이 중 김학렬은 박정희 정부의 고도 경제성장의 엔진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경제부총리로 재직하며 한국의 중공업 발전의 토대를 쌓았으나, 과로로 1972년 이른 나이에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이름의 학(鶴)이 일본어로 쓰루로 읽힐 수 있어 쓰루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포항제철 설립에 박태준과 함께 막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EA%B9%80%ED%95%99%EB%A0%AC.jpeg

- 포항제철 기공식. 좌측부터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경제부총리


지금은 외무공무원과 일반직 공무원 사이에 전출입, 임용 등이 자유롭지도 않고 사례가 흔치도 않지만, 당시에는 3부 외무직으로 입직하더라도 김학렬의 예처럼 상공부(지금의 산업부), 경제기획원(지금의 기재부) 등에서 커리어를 밟아 경제관료로 성장하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한국의 초기 경제발전이 소위 외화 벌이, 그리고 수출 경제에 기반한 것임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 고시 2회(1951년)

%EA%B3%A0%EC%8B%9C%202%ED%9A%8C.png

고시 2회 합격자는 대폭 증원되었습니다. 전쟁 중 치러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시 2회 수석은 서울대 정치학과 출신의 김석준이 차지하였는데, 전쟁 중, 그것도 현역 공군 대위 출신의 수석이었기 때문에 화제를 모았습니다. 소령 예편 후 내무 관료로 재직하였다가 미국 유학 후 공직을 떠나 사업가로 변신하였습니다. 


특히 이번 기수에서는 교육직도 선발하였는데, 이 중 허련은 교육직으로 입직하였으나 문교부를 떠나 내무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도백을 역임하였습니다. 양과 합격자 중에는 법원과 검찰을 택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서는 서윤홍이 대법원 판사(대법관이라는 명칭은 민주화 이후 환원되었습니다.)까지 올랐습니다. 서윤홍의 아들인 서동우는 사법시험 수석을 차지했으나 관이 아닌 곧바로 민간 진출을 택한 것으로 당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양과 합격 후 정부를 택했으나 공직에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고건의 형인 고석윤이 대표적인데, 상공부 국장까지 역임하였다가 60년 전후로 한 정치격변 속에 공직에 회의를 품고 공직을 떠났습니다. 비단 그 이외에도 타의로 공직을 떠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고시 2회 등 초기 행정과 기수는, 특히 선거 사무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지방관료, 경찰관료의 경우, 1960년 4.19 혁명으로 인해 상당수가 관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행정과로 공직에 입직한 다수가 내무관료, 그 중에서도 지방관청이나 지방경찰국에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이 둘 모두 이승만 정권의 통치기구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혁명 후 구속, 입건 되거나 비단 그게 아니더라도 공직 자체에 미련을 잃고 아예 다른 길을 택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법과 합격자와 달리, 행정과 합격자는 정치적 외풍을 심하게 받았던 셈입니다.


대표적으로 4.19 당시 마산경찰서장이었던 손석래는 오랜 도피 생활 끝에 8년만에 자수했습니다. 한편, 김석준은 4.19 당시 내무부 보안과장이었으므로 면직 대상이었으나, 면직 후 다시 문공부로 복귀하였으며 문화예술 분야 관료로 변신하여 여러 직책을 역임하다 퇴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용진처럼 4.19로 구속까지 되었음에도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복귀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고시 합격 후에도 한은에 잔류한 송규섭의 선택도 흥미롭습니다. 송규섭은 한은, 외환은행 등에서 근무한 후, 재계로 몸을 옮겨 대한선박 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시를 본 계기는, 언론에 따르면 "내가 그냥 행원으로 눌러 앉을 수는 없다. (공직 입직보다는) 가치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였다고 합니다.


 * 고시 3회(1952년)

%EA%B3%A0%EC%8B%9C%203%ED%9A%8C.png

앞서 출신 대학 통계에서 언급한 최학선이 고시 3회입니다. 고시 3회에서는 차관급 보직으로 이기수가 경남도지사, 이상규가 문교부 차관, 송광정이 서독대사를 역임하였으며, 법조계를 택한 김재주가 춘천지방법원장, 유태선이 광주고검장을 역임하였습니다.


 * 고시 4회(1953년)

%EA%B3%A0%EC%8B%9C%204%ED%9A%8C.png

고시 4회의 스타는 역시 노신영입니다. 육군 장교로 복무 중인 1953년 고시에 합격한 그는 당시로서는 전역을 하지 않으면 정부 임용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미국 국비 유학을 따내 전역, 외무부에 입부하게 되면서 외무관료로서 성장하였습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전두환의 문민 파트너로 간택된 그는, 문민관료로서는 이례적으로 안기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국무총리로까지 영전하는 등, 장세동 등과 함께 전두환의 후계자 하마평에도 올랐습니다. 물론 권좌가 불안했던 전두환의 선택은 노태우였습니다. 인도 총영사로 재직 중일 때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외시 합격 후 첫 공관 발령지가 인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근무연이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EB%85%B8%EC%8B%A0%EC%98%81.jpeg

- 노신영 전 국무총리(우측 두 번째)와 반기문 당시 UN 사무총장(좌측 두 번째)


이밖에도 정상천이 경찰관료로서 내무부의 주요 직위(치안국장, 강원지사, 차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정치인으로 변신한 뒤로도 JP계의 중진으로 활약하였으며, 김대중 정부에서 자민련 몫으로 해수부 장관에 임명되는 등, 20세기까지 현역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한편, 행정과 차석, 사법과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쥔 정천표는 일찌감치 공직을 떠나 미국 유학 길에 올랐는데, 예일대에서 SJD 학위를 취득한 후, 갓 설립된 ADB에 평생 몸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윤희경은 이미 국민대 법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었으나 고시 행정과, 그리고 군법무관전형시험을 합격하였고, 공직에 몸을 담지 않은 채 변호사를 개업하였습니다.


 * 고시 5회(1953년)

%EA%B3%A0%EC%8B%9C%205%ED%9A%8C.png


엄영달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중 국대안 파동(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따라 관공립 학교를 모두 통폐합하면서 벌어진 사회 분규)에서 우익 학생 운동가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다 다소 늦게 고시에 도전, 수석으로 합격하였는데, 서독 총영사 재직 중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신민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등원하였습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정치 규제에 걸리자 어학 강사로 잠시 변신하기도 했으나, 정치 규제가 풀리자 정치에 누차 도전, JP계에서 활동하였으나 연거푸 낙선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EC%97%84%EC%98%81%EB%8B%AC.JPG


이밖에도 임성재가 충북도지사, 산림청장 등 내무관료로서 차관급 공직을 역임하였고, 유훈은 고시 합격 후 학계에 남아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 고시 6회(1954년)

%EA%B3%A0%EC%8B%9C%206%ED%9A%8C.png


고시 6회에서 돋보이는 인물은 심의환과 최두열입니다. 심의환은 상공부에 입부, 상공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통상관료로서의 길을 걷다가, 박정희 정부 말기에 총무처 장관(인사, 조직 등을 관할하는 부처. 지금의 행정안전부로 흡수)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임 중 사망하였는데, 박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당일의 궁정동 연회에서 심수봉에게 어디 심씨냐고 물어볼 때, 이 작고한 심의환 장관 이야기를 했다는 트리비아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최두열은 경찰관료로서 치안국장, 부산시장 등 내무부의 요직을 역임하였습니다. 정치에 입문을 누차 시도하였으나, 끝내 당선되지는 못했습니다. 이밖에도 노재원이 중공과 수교한 후에 첫 중국대사를 지냈습니다.  


 * 고시 7회(1955년)

%EA%B3%A0%EC%8B%9C%207%ED%9A%8C.png

대량으로 선발한 기수인 고시 7회는 그런 만큼 내무, 경제, 외무 각 분야에서 대성한 사람들이 고루 많았습니다.


고시 7회의 경제관료로 쌍벽을 이루는 최각규와 김용환은 고시 동기로 서로 우애가 돈독했는데, 제4공화국에서는 최각규가 기획원의 요직을 거치며 상공부 장관을, 김용환이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둘 모두 정계에서도 잘 풀린 케이스였습니다. 최각규는 이후 들어선 5공 정권에서는 찍혀 민간을 전전했는데,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면서 재기용, 경제부총리 겸 기획원 장관에 발탁되어 "기획원은 전 부처의 장관"이라는 말을 남기며 경제기획원 황혼 시대(경제기획원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재무부와 통합, 재정경제원으로 개편됩니다.)의 마지막 실세 장관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김용환은 이재국장을 비롯해 금융 분야 요직을 역임하였고, 재무부 장관 재임 시절 8.3 사채 동결조치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습니다. 그 역시 최각규와 같이 민주화 이후 JP계로 정계에 등원하였고 늦은 나이에 전업 정치인으로 변신하였음에도 4선을 역임하는 등, 정계 중진으로 활약하였습니다.


장재식은 경제학자 장하준의 아버지이자, 지난 정부에서 정책실장을 역임한 장하성의 숙부입니다. 막상 공직에 있을 때에는 쟁쟁한 고시 동기들, 그리고 호남 출신이라는 약점 등이 겹쳐 대성을 못했다는 평도 있었습니다. 국세청 차장 역임 중, 전두환 정권 하에서 호남 출신으로 이후 커리어를 이어나가기 어려워 보이자 퇴직하였고, 이후 DJ계로 정계에 입문하여 산업부 장관도 역임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임영득, 나오연, 황병태 등이 국회에 등원하였습니다.


외무관료로는 고시 수석인 최광수가 외무장관을, 최호중이 외무장관과 통일부총리를 역임했습니다. 이번 정부 초기에도 논란이 됐듯 통상을 산업부에 둘 것이냐, 외교부에 둘 것이냐는 지속적으로 나오는 쟁점인데, 아직 정부 조직이 성장 중이었던 당시에는 고시 행정과 3부(외무직)로 입직하더라도 상공부 등에 입부하거나, 최호중처럼 외무 관료 재직 중에 상공부 차관을 역임하는 등, 상호 간의 장벽이 지금보다는 유연했습니다. 


%EA%B3%BD%EC%9C%A4%EC%A7%81%20%EB%AF%BC%EB%B2%95.jpg


고시에 합격했지만 입직하지 않은 곽윤직 법대 교수는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어쩌면 고시 7회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일 겁니다. 의외로 고시 사법과가 아닌 고시 행정과 출신인데, 발표가 빨리 나서 봤다고 합니다. 4년 전인 2018년 92세를 일기로 작고했습니다.


 * 고시 8회(1956년)

%EA%B3%A0%EC%8B%9C%208%ED%9A%8C.png

고시 7회가 많이 뽑은 영향도 있어 8회는 11명이라는 소수의 합격자만 배출하였습니다. 그러나 11명 중에서도 장관급 공직을 4명이 역임하는 등, 쟁쟁한 인물이 배출되었습니다. 이상옥은 지금도 흔히 통용되는 외교부 내 북미 라인 정통 코스를 밟은 인물입니다. 북미국장(당시는 미주국장)-차관보로 이어지는 코스인데, 북미국장의 경우, 1973년 미주국장 보직이 생긴 이래, 2010년 역임자까지 아웅산 테러로 사망한 이계철 전 주버마대사, 그리고 신두병 전 주이탈리아대사 2명을 제외하면, 역임자 24명 중 22명이 차관급 이상 보직을 역임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이상옥은 외무부 장관 재직 시절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라는 현안을 처리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정재석 경제부총리, 김태지 주일대사, 그리고 검찰에 입직했으나 서울지검장-검찰총장-법무장관을 모두 역임한 김석휘 등이 장관급 공직을 역임하였습니다. 특히, 김태지는 제1공화국에서 공직을 시작하여 직업공무원으로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퇴임한 공무원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한편, 11회 합격자 중 박정재는 고시 2회의 송규섭과 마찬가지로 한국은행에 잔류하였습니다. 한은 인사부장 등을 역임한 다음, 서울은행으로 이직. 은행인으로서 활동하였습니다.


 * 고시 9회(1957년)

%EA%B3%A0%EC%8B%9C%209%ED%9A%8C.png

 

고시 9회 역시 7명이라는 극소수의 합격 인원만 배출하였습니다. 고시 사법과 8회가 108명, 사법과 9회, 10회가 각 50명이라는 당시로서는 역대급 합격자를 선발하였다는 점도 기인하여 사법과로 이탈한 인원이 1/3에 달합니다. 공직에 남은 인원 중에서는 오준석 씨가 농수산부 차관보를 역임하고 비락식혜로 유명한 비락유업 사장으로 이직하였고, 이상은 씨는 재무부 사무관 재직 시절 담당하는 신탁은행 창설 현안과 맞물려 신탁은행 창설멤버로 합류하였으며, 대한증권 사장을 역임하였습니다.


 * 고시 10회(1958년)

%EA%B3%A0%EC%8B%9C%2010%ED%9A%8C.png

10회는 8, 9회보다는 많은 27명을 선발하였습니다. 신오철 전 국회의원은 행정과 11회(재정), 사법과를 합격한 케이스인데, 과거 고승덕 전 국회의원이 3시 패스로 유명세를 얻자, 본인이 3시 합격의 원조라고 강력히 반박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글 처음에 설명했듯이, 사실 이 시기의 고등고시 제도는 과목별 중복 합격이 있기도 한지라 사견으로는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내무 관료 중에서는 손수익이 단연 돋보입니다. 손수익과 산림 녹화 사업은 뗄래야 떼 놓을 수가 없는데, 무려 5년 반을 산림청장을 역임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산림 녹화를 전국가적인 사업으로 벌이려 하였으나 추진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박정희는 경기도지사였던 손수익을 느닷없이 산림청장으로 발령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산림청을 농림부에서 분리, 내무부로 이관하였고, 그때부터 산림 녹화 사업은 단순한 임업정책의 일환이 아닌, 전국 모든 지방 관서의 내무 공무원들이 총동원되는 사업으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산림 녹화 사업이 마무리된 지 오래라 산림청장 역시 내부의 임업직 공무원 중에서 임명되었지만, 손수익을 필두로 1970, 80년대, 그리고 90년대 초까지 산림청장은 사실상 내무관료의 차관급 중요 보직으로 운용되었습니다. 경기도지사였던 손수익을 비롯해, 경찰총수인 내무부 치안본부장 장일훈, 기타 시도지사를 역임한 보직의 다음 보직이 산림청장이 되면서 산림녹화 사업의 추진력도 그 이전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경제 관료 중에서는 박봉환이 고시 10회 합격자 중 두각을 드러내는데, 가인 김병로의 손녀사위이자 김종인 전 국민의힘/민주당 비대위원장의 자형이기도 한 그는 재무부 이재국장을 비롯해 금융 분야의 재무부 내 요직을 역임하였으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전두환의 경제 과외교사라는 평을 듣는 등, 밀접하게 관계를 맺었고 동력자원부 장관으로 기용되기도 했습니다. 박봉환이 추천한 다음 과외교사격의 인물이 바로 기획원 국장으로 있었던 김재익입니다. 


이밖에도 유종하(외무장관), 이규효(건설장관) 등이 장관급 공직을 역임하였으며, 양과에 합격하여 사법과로 이탈한 인물 중에서도 정해창이 법무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정해창은 검찰 3대 요직인 검찰국장, 법무차관, 서울(중앙)지검장을 모두 역임한 끝에 법무장관으로 발탁되었습니다. 동생인 정해방은 행시 출신으로 예산처 차관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장관급 공직을 역임한 인물 중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로 한갑수가 있습니다. 공직은 경찰관료로 시작하였고 영동경찰서장을 역임하였으나, 이후 경제관료로 전향하여 농수산부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후, 유정회에서 국회의원을 지냅니다. 보통 여기서 커리어가 마지막이 되는 게 일반적일 텐데, 그는 이후 정치활동을 계속하였고, 정치인 몫으로 기획원 차관, 농림장관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유신 정권에서 국회의원의 위상이 격하된 사례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 고시 11회(1959년)

%EA%B3%A0%EC%8B%9C%2011%ED%9A%8C.png

고시 11회의 스타는 아웅산에서 비명에 간 서석준입니다. 서석준은 고시파 중에서도 특히나 빠른 출세 속도를 밟았습니다. 외무직으로 들어왔지만 신설 기획원에 스카웃된 그는 경제관료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특히 박정희 정부에서 기획원 차관보, 차관 등을 역임하며 정권의 핵심과제인 중화학공업화에 매진하였습니다. 


서석준과 동 시기에 재직한 김재익과의 관계, 그리고 경제관의 차이가 흥미롭습니다. 서석준과 김재익은 정치학과(외교학전공) 동기 동창에 1938년생 동갑입니다. 서석준도 검정고시로 1년 먼저 대학에 들어왔고, 김재익도 검정고시로 1년 먼저 대학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서석준은 고시로 기획원에 입직하였고, 김재익은 한은 수석합격 후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기획원에 스카웃되었습니다. 서석준이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중화학 공업화의 기수였다면, 김재익은 유학파답게 자유주의의 신봉자였습니다. 친우이면서도 경제관에 있어서는 서로 상반된 셈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김재익은 경제수석으로 발탁되었고, 박 정권 대비 금융 등 전방위적 자유화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렇다고 이 당시 정부에서 이전 정권의 중화학 노선을 대표하는 서석준이 소외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서석준은 여전히 중용되었고, 오히려 상공장관을 거쳐 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경제수석 김재익, 부총리 서석준 둘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이 있었던 셈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둘은 모두 아웅산에서 테러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학과 동기이자 고시 동기였던 이기욱 재무차관도 함께 사망합니다.


%EC%84%9C%EC%84%9D%EC%A4%80%EA%B3%BC%20%EA%B9%80%EC%9E%AC%EC%9D%B5.JPG

 - 아웅산 테러 전날 호텔 숙소에서 러닝셔츠 차림으로 환담 중인 서석준 경제부총리(왼쪽)와 김재익 경제수석(오른쪽)

   몇 개월 전 세상을 떠난 넥슨 김정주 회장은 김재익의 처조카


사법과에 합격하여 법원과 검찰로 이탈한 인물 중에서도 법원의 최고위직을 역임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윤영철은 법원행정처와 각급 버원의 요직을 거쳐 대법관에 발탁, 이후 헌법재판소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김주한은 당시 서울대 공대에 재학 중이었는데 행정과, 사법과를 최연소로 합격하여, 최연소, 그리고 이공계 출신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오늘날 이공계 고시 합격의 원조인 셈입니다. 검찰 주요 요직을 역임한 끝에 검찰 몫의 대법관까지 역임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이재화 역시 각급 법원 요직을 거쳐 헌법재판관을 역임했습니다.


 * 고시 12회(1960년)

%EA%B3%A0%EC%8B%9C%2012%ED%9A%8C.png

고시 12회의 총아는 강경식과 장덕진입니다. 강경식은 좋은 쪽이 아닌 안 좋은 쪽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을 겁니다. 김영삼 정부에서 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이라는 공룡부처로 통폐합되면서, 국회에 있던 강경식이 재정경제원의 수장이 되는데, 그가 직면한 게 바로 IMF였습니다. 그는 IMF를 놓고 두고두고 비판 받고 있습니다.


장덕진은 박정희의 처조카사위입니다. 어린 나이에 고시 행정과 2부와 3부, 사법과를 합격한 그는 마침 5.16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재무부의 총아로 주목 받았습니다. 재무부의 최고 요직인 이재국장(금융정책국장)을 거쳐 장관, 국회의원 등 화려한 관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투자 실패로 실의에 빠진 채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경찰관료 출신으로 경기도지사,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한 염보현은 83년에 취임, 87년 퇴임 시까지 서울시장을 역임하며 사실상 88 서울 올림픽의 준비를 총괄하였습니다.


%EC%97%BC%EB%B3%B4%ED%98%84.jpeg

- 84 LA올림픽에서 올림픽기를 넘겨받는 염보현 서울특별시장


 * 고시 13회(1961년)

%EA%B3%A0%EC%8B%9C%2013%ED%9A%8C.png

고시 13회는 행정과 역사상 가장 많이 뽑은 기수였고, 그 덕에 각계에 퍼진 동기도 많아 일종의 군단을 형성한 기수였습니다. 이 기수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을 하나 꼽으라면 두말할 나위없이 고건이 꼽힐 것입니다. 고건은 고시에 붙고도 당시 부친이 야당 의원이었기 때문인지 무보직 상태로 수 년 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단 내무부에 입직한 후로는 새마을운동 등을 거치며 정권의 총애를 받았고, 이후 37세 최연소 전남도지사라는 기록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러 정권에서 두루 총애 받았고, 정치에서도 민선 서울시장을 거치며 평판 관리도 잘한 편이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대통령 탄핵에 따른 권한대행을 무리 없이 수행하여 한때 대권이 그에게도 오는가 싶었으나, 대통령과의 관계가 틀어진 끝에 꿈을 접고 맙니다.


%EA%B3%A0%EA%B1%B4.webp

- 37세 최연소 부임기록을 남긴 고건 전남도지사


고건 외에 내무관료 중 관계에서 활약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이효계(농림), 노건일(교통), 전석홍(보훈), 이상배(총무), 송언종(체신), 이상희(내무/건설), 정시채(농림), 이해구(내무),  등이 내무부 출신 중 장관급 공직을 역임한 인물입니다.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한 전석홍은 현재 딸인 전주혜 변호사가 여당 국회의원으로 등원하여 활동 중입니다. 양과 합격 후 법원을 택하여 판사로 재직 중 변호사로 개업한 금병훈 변호사는 금태섭 전 국회의원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경제관료 중에서는 산업은행 총재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정영의, 경제관료 출신으로 이례적으로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이동호를 비롯해, 허남훈(환경), 이진설(건설) 등이 장관급 공직을 역임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시 행정과 2부(재정) 합격자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은 사법과와 양과 합격 후 정계로 진출한 박찬종 변호사일 것입니다. 박찬종은 오늘날 제3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외무관료 중에서는 홍순영이 외무장관을 역임하였습니다.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이 그의 보좌관으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유엔대사를 역임한 선준영, 박수길, 제네바대사를 역임한 허승, 프랑스대사를 역임한 권인혁, 장선섭 등이 장/차관급 대사를 역임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이장춘 전 주오스트리아대사는 4.19 혁명 유공자라는 이력을 갖고 있으며, 조약국장, 싱가포르대사, 기획실장, 오스트리아대사 등 외무부의 주요 요직을 맡았으나, DJ 정부 시절 외교부 인사에 대해 실명으로 정면 비판하여 논란 끝에 공직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이장춘 대사는 이후에도 이명박 대통령-BBK 관련 증언으로 한 차례 언론을 타기도 했습니다. 현재 노령에도 불구하고 SNS를 활발히 운영 중인 것 같으나 트위터의 상태가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 고시 14회(1962년)

%EA%B3%A0%EC%8B%9C%2014%ED%9A%8C.png

고시 14회는 행정과의 마지막 기수입니다. 사법과는 5.16 군사정변으로 인한 군법무관 수요로 인해 이듬해에도 15, 16회 두 기수를 더 뽑았습니다. 이 기수에서는 경제관료 진념이 직업이 장관이라 해도 될 만큼 여러 부처의 수장을 맡는 등 관직에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정계에서는 경찰관료 출신인 유흥수가 충남도지사를 끝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보수 중진으로 활약하였고, 박근혜 정권 말기 주일대사를 역임하는 등, 201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송진우의 손자인 송상현, 최대권 등이 공직 대신 학계로 진출, 서울대 법대 교수를 역임하였습니다. 


%EC%86%A1%EC%83%81%ED%98%84.jpg

- 고하의 손자 송상현 국제형사재판소장


고시 14회를 끝으로 고등고시 행정과는 폐지되지만, 바로 이듬해인 1963년부터 곧바로 3급을류 공개채용시험(행정고등고시 1회로 계산)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960년대에는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의 도입 취지가 탈각될 정도로 시험의 운용이 이전의 고등고시 시절과 유사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한 경로의존성이 작용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60년대 고시 합격자에 대해서도 고시 사법과 합격자 포스팅이 마무리되면 언젠가 다룰 일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CapitalismHO
22/10/10 07:16
수정 아이콘
새벽부터 좋은글 감사합니다. 이 시리즈 너무 좋습니다. 크크
22/10/10 09:41
수정 아이콘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22/10/10 11:24
수정 아이콘
특화된 시리즈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너무 좋아요~ 다음 시리즈도 기대합니다 ^^
22/10/10 22:35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다음 포스팅은 이회창, 김기춘 등을 낳은 고시 사법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22/10/10 11:29
수정 아이콘
어마어마한 정보량입니다.
대단하시네요.
22/10/10 22:36
수정 아이콘
차곡차곡 정리하다 보니 한 세기 전체의 DB가 구축되었습니다.
파핀폐인
22/10/10 11:29
수정 아이콘
재밌네요 잘 읽고 있슴당 :)
22/10/10 22:36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及時雨
22/10/10 14:55
수정 아이콘
진짜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자료인데 책 내시거나 논문 쓰시는 겸 올려주시는건지 궁금합니다.
늘 재밌게 읽고 있어요.
22/10/10 22:36
수정 아이콘
언젠가 정리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너이리와봐
22/10/10 16:0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읽었습니다.
22/10/10 22:3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No.99 AaronJudge
22/10/10 17:17
수정 아이콘
재밌습니다
22/10/10 22:37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No.99 AaronJudge
22/10/11 01:41
수정 아이콘
레포트 써보니까 이렇게 자료수집해서 글 쓰시는분들 존경하게 됩니다…대단하십니다
파프리카
22/10/10 19:51
수정 아이콘
자료 수집을 어떻게 하셨는지 대단하십니다. 재밌게 잘읽고 갑니다~
22/10/10 22:38
수정 아이콘
누락되지 않은 정확한 명단은 정부 관보를 통해, 그리고 약력 추적 등은 언론, 회고록 등을 통해 정리하였습니다.
시식코너지박령
22/10/11 17:51
수정 아이콘
와 대단하십니다.
22/10/11 12:2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22/10/11 13:06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96855 [일반] "유령의 말이 옳다면 그녀는 왜 울었을까" [39] Farce15879 22/10/12 15879 13
96854 [일반] 통신3사: 20대 30대 남성들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고 있어 굉장히 심각한 상황이다 [275] 별가느게31394 22/10/12 31394 10
96853 [정치] 구한말 조선과 일본 사이에는 전쟁이 없었는가 [203] 삭제됨20356 22/10/12 20356 0
96852 [일반] 40대 유부남의 3개월 육아휴직 후기 (약 스압) [28] 천연딸기쨈11255 22/10/12 11255 31
96851 [정치] 정진석, '식민사관' 논란에 "제발 역사공부 좀 하시라" [139] 밥도둑21857 22/10/12 21857 0
96850 [일반] 한은이 빅스텝을 밟았습니다 [197] 길갈25225 22/10/12 25225 6
96849 [정치] 한국 UN 인권이사회 이사선거국 낙선, 아시아 5위 [109] 빼사스19913 22/10/12 19913 0
96848 [일반] 케이팝 아이돌의 위상은 앞으로 틱톡커와 유튜버들이 이어나갈것 같습니다 [70] 보리야밥먹자18175 22/10/12 18175 1
96847 [일반] 모솔경력 38년차, 현43남 결혼했습니다. [94] 43년신혼시작18572 22/10/11 18572 101
96846 [일반] 아이폰 14 프로맥스 몇일간 사용 후기 [43] Leeka16840 22/10/11 16840 5
96845 [일반] 마이너스통장 금리 1년간의 추이 [12] style13530 22/10/11 13530 2
96844 [정치] 탄핵에 대한 이야기 [57] 고물장수16229 22/10/11 16229 0
96843 [정치] 최재해 “대통령도 국민…감사 요구할 수 있어” +정진석 망언 [135] Crochen19356 22/10/11 19356 0
96842 [일반] 내맘대로 개사한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58] 하야로비11898 22/10/11 11898 25
96841 [일반] 전세 대란이 왔습니다. [288] kien.35975 22/10/11 35975 7
96840 [일반] [미드] 엄브렐러 아카데미는? [10] 해맑은 전사11523 22/10/11 11523 1
96839 [일반] [창작] 문제의 핵심 1편 [3] Farce11759 22/10/10 11759 6
96838 [정치] ‘영장 없이’ 디지털 포렌식…감사원, 내부 규정마저 대폭 완화? [40] 베라히18552 22/10/10 18552 0
96836 [일반] [역사] 고등고시 행정과(1950~1962) 역대 합격자 일람 [20] comet2115903 22/10/10 15903 15
96835 [일반] [팝송] 존 레전드 새 앨범 "LEGEND" [6] 김치찌개8974 22/10/10 8974 0
96834 [정치] 감사원, SRT에 공직자 7000명 5년치 정보 확보 [49] 빼사스18791 22/10/10 18791 0
96832 [일반] 책 후기 - <공정하다는 착각> [90] aDayInTheLife14439 22/10/09 14439 10
96831 [정치] 김건희 여사 논문 꺼낸 英기자, "윤석열차 표절? 거울 좀 보라" [99] 베라히20812 22/10/09 20812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