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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2/08/15 21:31:38
Name comet21
Subject [일반] [역사] 광복절 특집(?) 일제 강점기 어느 고학생의 삶 (수정됨)

1936년 고등문관시험 행정외교사법 기출문제 포스팅의 외전 격입니다. 댓글에서 자주 언급된 정재윤 변호사의 삶을 조금 더 추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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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이 멸망의 문턱에 접어든 1902년, 평안남도 평원군 한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정재윤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역 유지와는 거리가 먼, 지금으로 치면 태어날 때부터 ‘흙수저’에, 당시의 나라 꼴 역시 망국 직전답게 행정체계는 붕괴하고, 곳곳에서 사회동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태어난 지 몇 년 안 돼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 역시 열강의 전쟁에 휘말린 끝에 1910년에는 일본에 나라가 병탄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구한말 가장 서구 문물을 빠르게 흡수하고 있었던 서북지방, 그것도 평양 지근거리인 평원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로서는 문명의 상징이었던 기독교에 입회한 정재윤 소년은 평양으로 유학가, 미션스쿨 숭실학당에 입학하였고, ‘대학’이라는 이름을 최초로 사용하기도 한 숭실대학(숭실학당 대학부)에 진학하였습니다. 숭실학당, 그리고 대학부까지 그는 당시 식민지 조선의 명사들과 미국인들로부터 최신식 학문을 습득할 수 있었고, 기독교 학생회 활동을 하는 등, 신실한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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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숭실 교사)

 

1922년 숭실대학을 졸업한 그는 오랜 미션스쿨 생활에 힘입어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민족의 장래에 관심이 많고, 식민지 현실을 개탄하던 청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재학 중 조우한 3.1운동은 민족의식의 함양과 더불어, 민족자결주의라는 기치를 내걸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운동의 결과를 목격하게 되면서 조선의 장래가 국제정세와도 밀접히 연결되었음을 인식하였으리라 짐작됩니다. 졸업 이듬해인 1923년 고향 평원군 출신 친구들과 평안도 곳곳을 돌며 시국 연설을 하는 등, 계몽 운동에 앞장섰을 때, 그가 택한 연설의 주제가 “세계대세와 조선”이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졸업과 동시에 짧은 강연회 순회를 마치고 그가 택한 직업은 교사였습니다. 식민지 초기, 조선인에게 양질의 교육을 받을 기회는 극도로 부족했습니다. 전문학교 수준인 숭실대학을 비롯해, 기독교계 미션스쿨 일부와 실업계 전문학교가 일부 있을 뿐, 관립, 사립대학은 존재하지 않았고, 1920년대 초 조선교육령 개정 전까지만 해도 초중등교육의 교육연한마저도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런 만큼 민족 계몽의 일환으로서 교사 생활은 생계 유지라는 현실적 이유 외에도 가장 떠올리기 쉬운 직업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20여 년의 전통이 있어 명성이 높았던 숭실대학 졸업생이라는 점을 배경으로 목포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계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교사 생활을 통해 타인을 인도하는 것도 좋지만, 당시 식민지 조선인으로는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이미 받았던 그로서는 자기 자신의 계발 욕구를 뿌리치기 어려웠습니다. 1925년 근무하던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편입시험에 합격하여 1926년 도호쿠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였습니다. 일본인에게도 고등학교라는 엘리트 교육기관을 요구했던 일제 강점기 당시의 최고의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인 제국대학의 학생이 된 것입니다.

 

머리가 좋아 제국대학에 입학했으나, 현실적으로 다니게 된 직후 직면한 것은 학비와 생활비 문제였습니다. 상당수의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이 식민지인으로서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면장 등 지역 유지의 자제였던 반면, 처음에 말했듯이 정재윤은 이조 시대에는 변방이었던 서북지방, 그것도 빈농의 자식이었습니다. 이때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친 것이 평안도 신문 “조선일보”였습니다.

 

학자금을 마련하고자 약재상으로 떠나는 도호쿠제대 정 군 (조선일보, 1926년 8월 26일)

 

없는 사람의 쓰라림은 실로 제3자의 입장에서는 미처 헤아리지 못할 일이다. 배우고자 하나, 원수같은 돈이 없기에 품은 뜻을 이루지 못하는 청년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환경에 있는 한 사람인 평남 평원군 용호면 약전리 정재윤(25) 군은 빈한한 집의 아들로,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평양 숭실대학(당시 총독부 미인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목포 계명중학교에서 교편을 수 년간 잡고 있다가, 작년 봄에 일본 도호쿠제국대학으로 유학을 가 지금 정치경제(법과를 가리킴)를 전공하고 있다. 어느 배려심 깊은 친구가 한 달 몇 십원씩 원조를 하고 있으나, 역시 어려움이 있어 방학을 이용하여 약재상 일을 하며 지방을 순회할 터인데, 독지가들의 많은 동정이 있기를 바란다. (평양)

 

조선일보 기사입니다. 내용 자체는 고학생인 평남 평원생 조선인 청년이 학비가 없어 약장사를 할 지경이니 독지가들이 이 청년을 후원해달라는 단순한 내용입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라는 신문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이 기사를 읽으면 흥미롭습니다.

 

조선일보는 지금도 살아남아 한국 최대 일간지이자 보수 정론지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문은 식민지 시기, 그리고 해방 후에도 197-80년대 실향민들이 아직 한국 사회 각계에서 활발히 활동할 때까지 평안도 사람들의 신문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었습니다. 1920년대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 일제 어용 사주와 대립하는 항일 기자 간 대립 끝에 후자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어, 민족주의 지식인인 신석우, 안재홍 등이 신문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평양 등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조선일보 지국이 확장되었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서북 지역의 최고 명사인 고당 조만식, 그리고 조만식의 추천을 받아 역시 평안도 출신인 광산 재벌가 방응모가 연이어 조선일보를 인수하게 되면서 사실상 방응모 일가가 조선일보를 소유하게 됩니다. 사주뿐 아니라, 취재원, 기자 역시 평안도 출신 중심이었고, 해방 후에도 선우휘를 비롯한 평안도 출신이 조선일보를 “우리 신문”이라 여기고, 밖에서도 조선일보를 “평안도 신문”이라 보았던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습니다.

 

다행히 신문의 호소가 힘을 발휘했는지 정재윤 청년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도호쿠제국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했습니다. 그가 “학사(學士)”가 되고 취직한 곳은 모교 숭실전문학교 교수였습니다. 당시, 숭실대학은 총독부가 정식으로 전문학교(College)로 인가하는 대신, 더이상 “대학”이라는 명칭을 교명으로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하튼 숭실전문학교(와 숭실학교 중등부)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1930년대 초 대외적으로는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계몽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이 시기 “조선의 현상과 생활 문제, ”신생활의 기초“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고, 숭실전문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고당 조만식과 함께 농촌강습회를 열었습니다. 한편으로 숭실전문 교내에서는 선량한 성품으로 인해 그를 따르는 학생들도 많았는데,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개신교회의 명사가 되는 강태국 등이 그의 성품 및 조만식과 정재윤이 당시 항일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조만식은 숭실 후배이자 고등교육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민족계몽운동을 벌이는 정재윤을 각별히 여겼고, 그를 맏사위로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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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년의 고당 조만식)


그런데 정재윤은 여기서 또 한 번의 인생의 전환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는 도호쿠제국대학에서 법학사 학위를 받은 법학도였고, 이 전공을 살려 숭실전문학교에서 법학, 경제학 등 사회과학 강의를 맡았습니다. 조선인들을 위한 일자리가 많지 않고 1930년대 초가 경제 공황인 시기였다고는 하나, 당시에도 전문학교 교수는 조선인으로서는 최고 수준의 직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재윤은 교수로 재직하면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응시하겠다는 모험을 시도하였고, 대학을 졸업한 지 7년이 지난 1936년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조선인은 대부분 1년 6개월의 사법관시보를 거쳐, 조선총독부 법원이나 법원 검사국에서 판사, 검사에 임용되는 게 상례였습니다. 정재윤의 고시 동기인 이천상, 김재완 등도 총독부 사법관료의 길을 걸었으며, 행정과까지 고시 양과에 합격한 강명옥은 해방 전 청도군수로 발령 받아 홍안의 군수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재윤은 총독부 판검사가 되는 대신 다시 고향 평양으로 돌아왔고, 평양에서 변호사로 개업했습니다.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제 말기 조선인 민족주의 운동가에 대한 최대 탄압 사건인 수양동우회 사건이 터지자, 가인 김병로(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이인(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 등과 함께 14인의 변호인단에 합류하는 등, 민족 변호사의 삶을 택했습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진행 도중 투옥된 이광수, 주요한을 비롯한 많은 민족주의자의 친일 전향 및 도산 안창호의 병사 등 일제 말 국내 민족주의 운동에 큰 상흔을 남겼으나, 민족 변호사들의 변호가 헛되지는 않아 1941년 연루자 전원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정재윤은 일제 말기 장인 조만식과 함께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방의 대표적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명망을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 개신교계의 원로 강태국 목사를 비롯해 100세 장수로 유명하고 최근에도 활발히 언론 활동을 벌이는 김형석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평남 대동 생, 숭실중학/평양3중 졸업) 역시 회고록인 ”백년의 증언“에서 유년 시절 정재윤 변호사의 민족에 대한 열정에 가득찬 연설을 뜻깊게 들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해방을 2년 앞둔 1943년 마흔한 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1945년 오늘 일본제국주의가 패망하고 광복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서북지방의 명사이자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였던 장인 고당 조만식의 운명 역시 암운이 드리웠습니다. 소련 군정과 뒤이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북한 정권에서 개신교,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중도 우파에 가까우며 서북 출신이지만 이남의 임정계, 그리고 조선일보를 매개로 안재홍과도 친분이 있었던데다, 신탁통치 소문이 들리자 즉시 해방을 외치던 조만식은 눈엣가시였습니다. 차라리 다른 북한 내 우파 인사들이 38선이 유동적이었을 때 월남했으면 모를까, 사위 정재윤이 인생의 기로에 처할 때마다 끝내 고향 평양 일대로 몇 번씩 되돌아왔듯, 조만식에게 평양은 절대 떠날 수 없는 영원한 고향이었습니다. 외부에 공개된 조만식의 마지막 발언이 그가 평양에 갖는 심정을 절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당 치하에서 우리 북녘 동포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1천만 북녘 동포와 함께하기 위해 북에 그대로 남을 것이다.“

 

1946년 1월 이후 6.25 전쟁 발발까지 조만식은 북한 정권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습니다. 1950년 전쟁 발발 직전, 북한 정권이 남한에서 체포된 간첩 이주하와 김삼룡을 평양에 연금된 조만식과 교환할 것을 한 번 제의하였으나 대통령 이승만의 주저와 38선을 둘러싼 상황 변화 등이 겹쳐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발하고 몇 달 지난 9월 말에는 다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면서 수세에 몰린 북한 정권에 의해 평양을 버리기 전 피살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얄궂게도 전쟁 발발 익일인 1950년 6월 26일 조만식의 친우이자 6.25 전쟁 중 인천시장을 역임한 박학전이 조만식의 월남을 애타게 바라는 편지를 언론에 기고하였습니다. 박학전은 일제 말 조만식과 함께 철저한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활동했으며, 수양동우회, 그리고 항일 농촌운동 단체인 농우회 사건으로 투옥되고 일제 말까지 전향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의 월남을 그리며 (1)/박학전>

 

38 경계선 지점에서 5년 간이란 긴 세월을 유폐 생활에서 벗어나 극적 상면을 할 날을 생각하니 지금부터 약 500년 전 중국의 명작 명필이었다는 축윤명의 글이 상기됩니다. 어찌 축씨 평산에서 5년만에 옛 벗을 만나던 기쁨에 비할 바이겠습니까? 상상만 해도 반가운 나머지 울 것만 같은 마음에 대북, 대남방송이 있을 시간마다 우리 대통령 앞에 사례를 드리며 곧 선생님을 뵈올 맘에 긴장과 초조, 감격과 흔쾌로 밤을 새워가며 무거운 머리로 선생을 추억해 보며 근 30년 간 선생을 모시고, 새롭게 보고 듣고, 또 체득한 생활 속에서 생각나는 것 몇 가지를 두서없이 써보기로 합니다. 나는 먼저 선생의 정에 감읍치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의 사위되시던 정재윤 형이 불의에 세상을 떠난 후의 일입니다. 하루에 두 번 꼭 아침 저녁으로 그 집을 찾아드시다가, 한 번은 서울을 오셨다 돌아가시던 길에 집 대문 앞까지 가셔서 도로 나와 ”애비 없는 저것들의 집을 지나왔구나“하시고 딸의 집으로 먼저 찾으셨으며, 학정에 눌려 갈 곳이 적은 쪽 배를 타고 매일 하루같이 대동강에 고기를 잡는 일로 해를 지우시면서 적은 고기가 잡히면 도로 놓아주고 석양이 되면 몇 마리를 잡아가지고 오셔도 한 번도 자기가 잡은 고기를 잡수신 일이 없었고, 강변에서 조개를 많이 잡고도 적은 놈은 골라서 물에 도로 놓아주며 ”잘 자라라, 잘 자라라“ 하시는 것이 큰 조개를 잡는 것보다 적은 것을 놓아주는 것이 그날의 향락이었더랍니다.

 

엣날로 돌아가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계실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떠나 평양에 오시려고 역을 향하여 나오시다가 다리 절은 노인을 만나 그 방향을 묻고 차를 타고 가시라고 돈 얼마를 내어 주고 차비 5전이 부족해서 도보로 몇 역을 걸으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감옥에서 정신이 이상하게 돼 나왔을 때, 매일같이 오셔서 내 머리를 만져주시고, 전신에 난 상흔을 보시고는 눈물을 나에게 보이지 않으시려고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시고, 들어오셔서는 또 수십 분씩 만져주시던 선생을 떠올리면 평생 ”내 불쌍한 민족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겠다“라고 하시는 선생의 마음씨를 다시금 생각하고, 몇 밤이고 아니 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선생의 굳은 지조를 생각하면 약한 저로서도 돌 같은 마음을 가져봅니다.

 

저는 창씨개명 압박을 피해 다시 서울로 피해 올라올 때, 선생님은 ”원, 강원도 산골로나 가볼까나“하시면서도 당시 헌병, 형사, 기자, 스파이가 와서 신사참배, 창씨개병, 헌납, 학병 장려, 어느 하나만이라도 협력하게 하기 위한 갖은 모략을 썼지만, 끝내 거부하시고 마침내 병원을 찾아오셔서(당시 나는 기독병원에 근무) 입원을 좀 시켜주게나, 박 군” 하셔서 심장과 위가 약하다는 병명을 핑계로 오랫동안 누워 계실 때, 미음과 죽을 잡수셔서 찾아오는 형사를 막아내시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그때 열과 맥을 실제 이상으로 재주기로 나와 약속하고 도와주던 장 모 간호사는 지금 어디 있는지 궁금하다)

 

(2편은 6.25 전쟁 발발로 이후 신문이 편찬되지 않으면서 미연재)

 

이상과 같이 광복절을 맞아 정재윤이란 인물의 삶을 한 번 복원해 보았습니다. 그와 그의 장인인 조만식의 안타까운 죽음, 이들이 주로 활동한 지역의 특성(서북지방), 그리고 분단이 겹쳐져 이 포스팅의 주인공인 정재윤은 그를 기억하는 동시대 또는 동향 사람들의 회고 등을 통해 파편적으로 복원하는 데 그치고 말았습니다. 다만, 이러한 파편적인 복원 속에서도 정재윤이 여유가 없는 환경에서 출발한 삶, 몇 번씩 찾아온 안락한 삶을 향한 유혹, 그것도 식민지 조선인에게 있어서의 최고의 유혹이 몇 번씩이나 찾아온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런 달콤한 유혹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이 고향과 신념이라는 두 가지 주제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일제 36년은 분명 짧지 않은 기간이었고, 개인을 향한 사회와 체제의 압력이 갖가지 형태로 작용했기 때문에 역사의 지평에서 볼 때 그릇된 선택일지언정 개개인이 처한 상황에서는 나름의 소명이 되는, 그런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들을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분명히 객관적으로, 또는 이해(利害)로는 쉽사리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움과 유혹에 직면해서도 신념을 관철한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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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5 21:54
수정 아이콘
근대사 전공자 코스프레하면서 밥벌어먹고 사는 입장에서, 타성에 젖어서 공부하고 일할 때가 점점 많아진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 줄을 보면서 마음을 다시 다잡아 봅니다.

(올려주시는 자료들, 글들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22/08/15 21:59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치블루
22/08/15 22:21
수정 아이콘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조만식 선생을 비롯하여... 북에도 많은 우익 인사들이 있었을텐데요.
일제가 조금만 일찍 항복해서 한반도에 다른 미래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념이 듭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22/08/16 09:10
수정 아이콘
사실 이북에 남은 분들에 대한 자료, 그리고 그들의 삶에 대해 전달해줄 분들이 없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22/08/15 22:30
수정 아이콘
오늘 같은 날 이런 분들을 상기시키는 행사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대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22/08/16 09:1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SAS Tony Parker
22/08/15 23:20
수정 아이콘
레퍼런스에서 정성이 느껴져서 정독전에 추천 박고 읽습니다
22/08/16 09:11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파프리카
22/08/16 09:42
수정 아이콘
독립운동가들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광복을 몇년 안남기고 사망하시는 거 같아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좋은 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2/08/16 13:44
수정 아이콘
41살에 돌아가셨다니 너무 빨리 가셨네요....
콩탕망탕
22/08/16 14:48
수정 아이콘
대단한 삶이네요.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개인의 삶이란 참..
Blue Bayou
22/08/17 05:28
수정 아이콘
통상 '민족'을 어떤 거창한 것으로 여기지만 정재윤 선생의 예에서 보듯이 민족은 고향의 확장 내지 고향이 자리잡고 있는 터전 같은 것이었겠죠. 하이데거의 Heimat이 바로 그런 감성의 철학화였고요.
수리부엉이
22/08/17 14:43
수정 아이콘
좋은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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