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오아시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영화를 주로 좋아하는 제가 거의 20년 만에 본방 날짜 맞춰서 챙겨보는 드라마입니다. 1화부터 반했고, 그래서 리뷰도 남겼습니다. https://pgr21.co.kr/freedom/95958

회차가 지나면서 착한 판타지적 면모가 더 강조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방구뽕 형님이 등장하셨을 때가 특히 그랬고요.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점은 이 드라마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지고 보면 2회의 게이 엔딩, 6회의 탈북민 이야기도 같은 맥락 안에 있죠.

사실 이런 소재들은 일부의 불편함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합니다. 1회에서는 장애인이 다르다는 사실을, 3회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그 자체와 이를 향한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장애와 능력주의 사이의 딜레마도 작품 전체에 걸쳐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드라마가 모두 끝나고 나면 다시 이야기 할 생각입니다) 이렇게 정면 돌파하는 모습이 저는 정말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10회에서는 장애인의 사랑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지적'장애인이라는 점에서 정면 돌파 중의 정면 돌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미성년자 의제강간이라는 법 조항이 있습니다. 성관계 동의 가능 연령 미만인 상대와 성관계를 하면 이를 강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종래에는 그 연령이 만13세였다가 2020년 5월 19일부터 만16세로 개정되었습니다. 왜 법에서는 만16세 미만인 상대와 성관계를 하면 강간으로 취급할까요? 아동이나 청소년은 사회적, 문화적 제약으로 인해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어렵고 인지적, 사회적, 관계적 자원의 부족으로 타인의 성적 침해 또는 착취행위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적장애인은 어떻게 되는 거죠? 만약 10세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진 20대 후반의 장애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성적 자기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걸까요, 아닌 걸까요? 이에 관해서는 아직 사회적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논란의 여지도 많죠.

예를 들어 성적 자기결정권을 잘못 다루면 성폭력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짧고 끔찍한 소설 하나를 써볼게요. 경계선 지능을 가진 여성이 있습니다. 장애를 가질 정도는 아니지만, 보통 사람처럼 현명하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녀가 이웃에게 빚을 졌습니다. 이웃은 성관계를 하면 빚을 탕감해주겠다고 제안했죠. 그녀는 이에 동의하여 성관계를 합니다. 그녀는 이 행동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상대의 행동이 파렴치한 짓이라는 생각도 못합니다. 그래서 다음에 이웃에게 돈을 빌리면서 그녀가 먼저 성관계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주기적으로 이웃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게 과연 정의일까요? 그럼 경계선 지능보다 더 심각한 지적장애의 경우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이를 성적 자기결정권과 연결하여 다루는 작품은 별로 없습니다. (일단 제가 본 영화 중에는 한 편도 없습니다) 멜로 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인은 보통 시각장애인이나 청각장애인입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는 치매 환자가 등장하지만, 사랑에 빠졌을 때는 아직 증상이 발현되지 않았습니다. <제8요일>에서는 다운증후군 환자의 사랑이 그려지지만, 여기서는 커플 양쪽 모두가 다운증후군 환자라 도덕적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았죠. 다른 작품들도 장애인과 사랑에 빠졌다 한들 그 상대를 역겹게 봐야 할 여지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장애인의 사랑에 엮인 도덕적 불편함을 다룬 작품으로 영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주인공 한공주는 뇌성마비 장애인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인지적 장애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즉, 그녀는 몸이 불편할 뿐이지 생각이 모자란 것은 아닙니다.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맺었다면, 이는 그녀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이라 봐야 합니다.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저에게도 한공주와 홍종두의 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냥 보통의 사랑과 다를 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것은 제가 그만큼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겠죠. 그들의 사랑에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뇌성마비라는 장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봐야합니다. 답이 있죠.

반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지적장애인의 사랑을 다룹니다. 답이 있는 일이 아니라, 답이 없는 일을 다루고 있죠. 그리고 드라마는 이 딜레마를 우영우에게도 대입시킵니다. 우영우는 지금까지 본 책을 전부 기억할 정도로 영리하지만, 동시에 회전문도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습니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영우의 대인관계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우영우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성관계를 유도한다면, 우영우는 온전하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까요? 기망, 협박, 회유... 즉 상대가 가스라이팅을 시도했을 때 우영우가 이에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요?

뭐, 걱정은 되지만 우영우라면 잘 대처할 거라 생각합니다. 우영우의 자폐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고, 일단 저보다 백만배는 더 똑똑해 보이거든요. 하지만 우영우의 사랑이 넘어야 할 벽은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10회에서 이준호의 친구 중 한 명은 대놓고 물어보죠. "부모님께는 뭐라고 할 건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 중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있습니다. 조제는 하반신 마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를 진심으로 사랑하죠. 하지만 조제를 데리고 부모님을 뵈러 가려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얼마 뒤 둘은 쿨하게 이별하죠. 조제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온 츠네오는 이내 길에서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때는 '저 천하의 개쌍놈이 무슨 낯짝으로 쳐 우냐?'라고 생각했는데, 이준호가 술자리에서 폭발하는 걸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요. 길바닥에 주저 앉아 우는 것 말고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영우 엔딩도 이렇게 리얼 버전으로 가는 건 아니겠죠? 이 드라마 판타지 맞죠?

덧. 10회의 모티브로 삼았던 게 이 판결이 아닐까 싶네요.
https://www.khan.co.kr/national/court-law/article/201311010600075#c2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