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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1/11/04 08:44:47
Name 글곰
Link #1 https://brunch.co.kr/@gorgom/146
Subject [일반] 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2)
1989-1991 :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 나에게 쓰는 편지 / 길 위에서



신해철이 세상에 내놓은 첫 노래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대학가요제 우승곡인 [그대에게]였다. 이후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고 데뷔한 무한궤도는 의욕으로 가득 찬 밴드의 1집 음반을 내놓았다. 신해철의 공식적인 첫 음반이기도 한 이 앨범의 타이틀곡은 바로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였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나는 기억해요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을
세상이 변해갈 때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보았지만

-신해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소년이라는 키워드는 신해철이 데뷔할 때부터 일관되게 관심을 둔 주제였다. 이 노래에서 그는 ‘소년 시절’을 ‘파랗던 꿈’으로 표현하면서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반면 현재 자신의 모습은 ‘세상이 변해갈 때 같이 닮아가는’ 부정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신해철은 자신의 모습에 때로는 실망하고, 때로는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실망이나 변명은 결국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면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스물두 살의 신해철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무얼 찾기 위해 사는 것일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신해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부류의 주제는 사실 인류의 역사 내내 너무나 흔하게 다루어진 주제이기에 특별할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단지 흔해빠졌다는 이유만으로 배제해야 한다면 전 세계의 사랑 노래는 이미 멸종한 지 오래일 것이다. 이러한 주제가 지속적으로 제시되는 것 자체가 이른바 순수했던 옛 시절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경이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이라는 방증이 아닐는지.  

하지만 신해철은 소년 시절을 긍정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단순히 그 시절로 돌아가기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일단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럴 수 있다 해도 그건 단지 퇴보,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밖에 못 된다. 하지만 눈앞의 어려움에서 고개를 돌리고 도망치기는 길을 선택하기에는 신해철이라는 인물의 자의식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렇기에 그는 걸어가던 길을 되돌아가는 대신, 홀로 걸어가기를 택한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신해철,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모든 소년은 결국 어른이 되고 언젠가는 죽는다. 그 시점에 서서 신해철은 질문을 던진다. 지나간 세월에 후회는 없는가. 나는 비록 어른이 되었지만 소년 시절의 꿈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가. 그렇기에 이는 질문이 아닌 선언이었다. 결코 소년 시절의 꿈을 버리지 않겠다는 선언이며, 향후 삼십 년 가까이 펼쳐지는 그의 음악 인생을 일직선으로 관통하는 굳은 다짐이었다.

물론 냉소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해철의 이러한 모습조차도 그저 젊음의 치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십대 초반은 물론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성인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고, 종종 소년시절의 미숙함을 미처 다 벗지 못한 나이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신해철의 이러한 다짐은 특별할 것이 없으며 요샛말로 다소 뒤늦은 중2병 수준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었다. 그가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그쳤더라면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밴드 무한궤도가 첫 앨범을 끝으로 해산된 후 신해철은 솔로 가수로 전향했다. 농반진반으로 신해철의 아이돌 시절이었던 이 시기에 그가 처음 내놓은 음반은 사랑을 다룬 평범한 노래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 발매한 2집에서 신해철은 앨범의 이름처럼 그 자신(Myself)에 대한 본격적으로 탐구를 시작한다.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지나치게 직설적인 나머지 낯부끄럽게까지 느껴지는 일련의 노랫말을 통해, 신해철은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하게 말하고 있다. ‘돈, 집, 차, 여자, 명성, 지위’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가치 대신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을 찾겠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속적인 가치를 원한다. 그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사회의 주류에 합류하지 못하고 배척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주류에서 배척되는 건 사람을 두렵게 한다. 그렇다면 신해철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 두렵지 않았을까. 그의 대답은 아니라는 단언,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난 약해 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난 후회하지 않아 아쉬움은 남겠지만
아주 먼 훗날까지도 난 변하지 않아
나의 길을 가려 하던 처음 그 순간처럼

-신해철, [길 위에서]



이를 통해 신해철은 그가 일평생 말하고자 했던 바의 기틀을 확립했다. 다소 과장스럽게 표현하자면 이후 그가 내놓은 노래들은 동일한 주제를 다룬 변주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 노래들의 가치가 폄훼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후의 노랫말들을 보면서 그가 어떠한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 갔는지를, 그러면서도 어떠한 변화를 겪어 갔는지를 느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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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21/11/04 09:10
수정 아이콘
오랜 만에 신해철 글 보니 반갑네요.

남성으로 한정지으면 특정세대를 구분 지을 때 편한 방법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쓰는 편지" 랩을 외울 수 있는지 없는지
파랑파랑
21/11/04 09:17
수정 아이콘
어릴 때 친척집 놀러갔다가 별생각없이 친척누나의 넥스트 4집을 들어봤는데 라젠카 세이브 어스 듣고 진짜 와 한국에도 이런 노래가 나올 수 있구나 하고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해에게서 소년에게도 정말 좋았구요.

서태지와 더불어 어린 시절 유일하게 노래로 충격과 깊은 감명을 준 아티스트
及時雨
21/11/04 12:01
수정 아이콘
2집에서 연극 속에서도 꽤 좋아했었습니다.
길 위에서는 이후 신해철 음악의 기조를 잡은 노래 같아서 자주 들었었고...
큐제이
21/11/04 18:40
수정 아이콘
연극속에서는 1집일거에요.
퀄리티에 깜짝 놀랐죠. 지금 들어도 편곡의 웅장함은 대단합니다
엑세리온
21/11/04 12:12
수정 아이콘
무한궤도 앨범은 타이틀곡 외에도 좋아하는 노래가 너무 많네요.
여름이야기, 비를 맞은 천사처럼, 조금 더 가까이, 거리에 서면...
닉언급금지
21/11/04 12:12
수정 아이콘
언제나 노래방 시작곡이 '길 위에서'인 1人입니다.
21/11/04 17:09
수정 아이콘
친구분들이 안좋아하거나, 혹은 같이 열창하거나
둘 중 하나겠군요.
엘케인
21/11/04 12:57
수정 아이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가까운 분들의 사망소식이 많았던 2014년 가을, 그의 죽음 이후에 쓴 글을 잠깐 공유합니다.

1.
그냥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랜 친구인 아내는 내게 '괜찮냐'고 물어보았다.

2.
그를 처음 만난 순간이 생생하다.
아직도 그 음악이 들리면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떠오른다.
가요톱텐이 끝나는 순간 카메라가 반대편을 비춰주었고,
객석 뒤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나는 기억해요 내 소년 시절에 파랗던 꿈을..
세상이 변해갈때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보았지만
흐르는 시간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 앞에 생이 끝나갈때
누군가 그대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
대답할 수 있나 지나간 세월에 후횐없노라고
그대여

3.
"매니거즈오뤠이즈텅유라우
암소탈러더탤브싸우
달링유쏘꼴투미
앤아워즈뿔뽀유
유디드워너플라워유워너허니
유디드워너러버유워너머니
유삔테닝어라이
아이저써너쎄이
굿바이"

멋있어 보여서,
가사를 적어달라고 한참을 졸랐던
안녕.

4.
전망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myself를 배우던 무렵
처음 샀던 myself
이때부터 그는 나의 교주였고 hero였었다.

5.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세상에 길들여짐이지
남들과 닮아가는 동안
꿈은 우리곁을 떠나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우리는 꿈에 대해 이야기했고

6.
고3 어느 비오는 여름 밤
운동장에 누워 고래고래 그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게
살려는 일종의 다짐이었던 것 같다.

7.
수능 100일전 모임때,
내가 그의 팬임을 알고 있던 예쁘장한 후배가
"Hope"를 불러주었다.
정작 나는 그때 그의 앨범조차 없었다.
아마, 앨범 자켓이 666을 상징한다고 어머니가 갖다 버렸던 것 같다.
아무튼 난
그로부터 2년 반이 지난 어느날
철원 최전방 부대 내무반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들 속에서 이렇게 힘든 때가 없었다'며
그 노래를 불렀고
기분이 상한 분대장때문에 내무반 전체가 얼차려를 받았다.

8.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엔
'방안에 앉아 혼자 불평해봤자 물론 이 세상이 변하진 않겠지'
라며 내 맘을 서늘하게 하기도 하고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마'
라며 위로하기도 했었다.

9.
대학로의 어느 작은 소극장에서
어렵사리 구한 MR에 맞춰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다.

내게로 와줘
내 생활 속으로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달라질꺼야
매일 똑같은 일상이지만
너와 같이 함께라면 모든게 새로울거야

10.
올해 유난히 가슴아픈 죽음이 많았다.
십수년만에 말 그대로 펑펑 울어봤다.
한 번 터진 눈물샘은 마를 날이 없는 것 같다.
죽음이 그를 안식으로 이끌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아프기만 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을 맘에 갖고 있어
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그의 말투를 따라하며 그의 행동을 흉내내보기도 해
그가 가진 생각들과 그의 뒷모습을 맘 속에 새겨두고서
보자기를 하나 목에 메고 골목을 뛰며 슈퍼맨이 되던 그 때와
책상과 필통 안에 붙은 머리 긴 락스타와 위인들의 사진들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어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그들이 내게 가르쳐 준 모든 것을 가끔씩은 기억하려고 해
세상에 속한 모든 일은 너 자신을 믿는데서 시작하는 거야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은 완전히 바보같은 일일 뿐이야
그대 현실앞에 한없이 작아질때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는 영웅을 만나요...
언제나 당신 안의 깊은 곳에 그 영웅들이 잠들어 있어요
그대를 지키며
그대를 믿으며


안녕
나의 hero
21/11/04 17:13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엘케인
21/11/05 10:46
수정 아이콘
생각해보니 좀 무례한 댓글이었네요.
추억을 공유한다는 생각에... 죄송합니다.
다다음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21/11/05 11:22
수정 아이콘
아뇨아뇨 댓글이 정말 감사하다는 뜻이었습니다. 너무 길게 이야기하면 오히려 사족이 될 거 같아서 짧게 달았었는데요(머쓱)
세인트루이스
21/11/04 23:44
수정 아이콘
참 신해철 좋아했는데, 왜 좋아하는지 설명하자면 잘 못하겠네요. 이렇게 글로 풀어주시니 감사합니다.
대한통운
21/11/04 23:52
수정 아이콘
길위에서가 노래방 시작곡입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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