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아침마다 챙겨먹던 항불안제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워낙 깜빡깜빡하는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약이 떨어질 때 쯤이면 꼬박꼬박 병원에 가서 약을 챙겨오곤 했는데. 게다가 오늘은 아침일찍 외부 미팅이 있다. 평소같으면 병원에 갔다가 출근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미팅을 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하다. 약을 안 먹어서 불안한건지, 약을 안 먹었다는 사실 때문에 불안한건지...
내일 아침엔 병원에 들려서 약을 받아와야겠다. 일단 전화를 걸어서 예약을 해야지.
"원장님은 이번주 토요일까지 휴가십니다. 월요일에 찾아오세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원장님이 휴가를 가셨단다. 어디보자, 4일동안 약을 거르게 되겠구나. 뭐, 예전에도 하루이틀 정도 약을 빼먹은 적도 종종 있었으니 별 일이야 있겠는가. 맡은 업무 일정이 엄청 빡빡하니, 주말 내내 일을 하다 보면 딱히 다른 생각도 안 들겠지.
금요일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럼 그렇지. 이제 약을 먹어온지도 꽤 됐고, 슬슬 나도 내성이 생겼나보다.
토요일에도 여전히 일을 해야 한다. 출근하기는 귀찮고 해서, 일을 싸들고 집에 왔다. 회사 서버에서 코드를 내려받아 집에서 저녁까지 작업을 하고, 메신저를 통해서 작업 현황을 대표님께 알렸다.
"안군, 고생 많았어! 이제 좀 푹 쉬어~"
하... 얼마만에 맛보는 한가함인가? 영화나 봐야겠다. 보고싶었는데 시간이 안 맞았던 "앤트맨 & 와스프" VOD가 올라와있네.
그렇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느긋하게 영화를 보고 있는데, 몸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손이 덜덜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익숙한 이 느낌. 공황증(Panic attack) 이다.
"하... 이러면 나가린데. 오래 안 갈꺼니까 참아보자."
내가 공황증으로 고생해온건 중학교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부터,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시험공부를 하다가,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도 문득문득 찾아오고 했던 불청객. 나이 30이 넘어서야 이놈의 정체를 알고, 약으로 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만, 여전히 이 느낌은 지독하게 기분나쁘다. 마치 세상이 암흑으로 변하고, 당장 땅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 진짜 싫다.
오늘따라 공황증이 오래간다. 이럴 때 먹으라고 챙겨주신 응급용 약도 없다. 당연하지, 다 회사 서랍에 넣어놨으니까.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이런 상태에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간신히 잠이 든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을 꾸게 된다.
꿈 속에서, 나는 커다란 버스를 몰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도착했을 때, 밖에 서 있던 여성들이 우르르 차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다들 익숙한 얼굴들이다. 대학교 동기, 직장 후배, 교회 동생, 소개팅녀, 해외 출장지에서 만난 통역담당자, 단골 음식점 점원 등등... 다들 내가 조금이라도 호감을 가져봤던 얼굴들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단 한명과도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은 없다.
이쯤에서 난 이게 꿈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자각몽"이다. 저 여성들이 이렇게 한 군데 모여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어쨌건 버스 안에서 다들 깔깔대며 떠들고 있고, 난 묵묵히 버스를 몰아서 어느 건물 앞에 세웠다. 손님들은 모두 내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주차장 한구석에 버스를 잘 주차시킨 다음 버스에서 내려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건물 안에선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건물 안은 마치 커다란 강당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차에 탔던 여성들은 다들 낯선 남성들과 성행위를 즐기는 중이었다!
내가 건물에 들어섰을 때, 그들 중 몇몇은 내가 왔다는 걸 알아챘다. 나와 눈이 마주쳤고, 날 힐끔 쳐다보고는, "어, 안군 왔어?" 하는 듯한 눈빛을 보낸 후에,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잠을 깼다.
곧이어 찾아오는 절망감. 그리고 엄청난 분노.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공황증.
그렇게 나는 하루종일 공황에 시달리며 휴일을 보내야만 했다.
바로 월요일에 약을 받아서 먹고, 지금은 아주 괜찮아진 상태입니다. 향정신성 약품들이 다 그렇듯이, 이게 반감기라는게 있어서, 약효가 즉시 사라지는게 아니라 서서히 효과가 없어진다더군요. 그래서 원래는 24시간 간격으로 약을 먹어왔는데, 한 3일 빼먹었더니 저렇게 돼더군요.
물론, 살아오면서 만나왔던 여성들 중 단 한 명도 저에게 저런식으로 대한 사람은 없을겁니다. 저 꿈은 아마도 제가 가진 피해의식의 발현이겠죠. 휴일 내내 공황에 시달리면서 머릿속을 지배했던 생각은, '내가 호감을 가졌던 여자들은 모두. 나한테만 철벽을 쳤을 뿐이고, 다른 남자들한테는 쉽게 몸과 마음을 줬을 거야.' 였습니다. 당연히 말도 안되는 망상이지만, 제 마음속 깊은 곳까지 쳐박혀 있는 트라우마가 바로 저것인거죠.
그와 더불어서 요근래 페미 이슈 등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고, 분노를 쏟아냈던 것도, 저런 맥락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요즈음은 길을 가다가 매력적인 여성분을 마주치면 괜히 화가 납니다. "저런 여성이라면 남자 사귀는건 쉽겠지.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나는 아닐거니까." 이런 마인드로요.
이런 식의 마음가짐으론 당연히 연애를 시작할 수 있을 리가 없죠. 이젠 나이가 들어서 소개팅도 안 들어옵니다만, 어쩌다가 소개를 받거나 해도 무서움과 두려움이 앞섭니다. 당연히 소개 자리는 망쳐지고, 돌아와서는 자괴감에 시달리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로 밤을 지샙니다.
뭐.... 그냥, 넋두리를 늘어놓고 싶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해도 제 주변에서는 저의 이런 마음상태에 대해서 공감해줄 사람이 없기도 하고요. 정신과 선생님 말고는, 부모님조차도 이해를 못하시니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오늘은 편안히 잠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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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태어나서 딱 한번 시야가 캄캄해지고 늪에 빠지는거 같이 서서히 빨려들어가면서 엄청나게 불안한 느낌이 들면서 이대로 자살하면 어쩌지 하는 감정에 사로잡힌적이 있는데 인간이 감당할수가 없는 느낌이더라고요. 태어나서 처음 자위행위를 한것보다 세네배는 강렬한 느낌이였는데 그 후로 공황장애나 조울증등 정신적인병을 앓고 있는 분들 얼마나 힘들지 이해가 갔습니다. 한번 그 문턱에 다가가 보니 진짜 장난 아니더라고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수 없는게 정신적인 질환 같습니다. 힘내세요!!
(수정됨) 앞부분이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주인공이 각성하는 과정하고 완전히 똑같...???
공황장애는 안 겪어봐서 뭐라 말씀드릴 것이 없지만, 가지고 계신 것으로 추정되는 피해의식은 굳이 가질 필요가 없어보입니다. 저도 외모가 왜소해서 매력없는 걸로 어디가서 빠지는 편은 아닙니다만, 매력적인 사람들이 안 매력적인 사람들한테 매력을 못 느끼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저는 이성의 호감을 얻는게 의지나 노력의 문제가 아니란 걸 깨닫고부터는 초탈해졌습니다. 그동안 상대가 호감을 표시하기 전에 제가 한건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호감을 느꼈던 분들도 딱히 저한테 뭘 하려 했던게 아니었고요.
또 서로 호감이 있어도 안될 사이는 어긋나고 처음엔 아니었어도 나중에 호감을 느껴서 되는 경우도 있고.. 저는 그냥 이성관계에 신경 끄고 흘러가는대로 사는게 맘편합니다. 물론 얼마 안되는 성경험이 청소년시절의 판타지와 너무 달랐어서 성욕(정확히는 타인과 관계하고싶다는 욕구)이 확 죽어버린 이유도 있겠지만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감을 느낀적은 많고 만남을 가진적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사랑한 적은 없었던것 같습니다. 이런 주제에 남이 나를 사랑하길 원하는건 너무 이기적인것 같기도 해서..